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80화 (81/222)

80. 시간을 아끼기 위해

단순한 이치였다.

이안은 다른 작업자보다 몇 배는 빠르게 일한다.

그렇다면 당연하게도 유물을 발견할 확률은 그만큼 올라갈 터.

이안은 빠르게 삽을 파 내려갔고, 곧 뒤에는 파낸 흙이 산더미를 이루었다.

“허, 허…… 정말.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황당하게 쳐다보던 레이먼은 이내 흙더미를 부지런히 밖으로 날랐다.

편히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정도로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파서 시간을 줄이자. 일단 지금은 이 수밖에 없어.’

이안은 삽을 푸면서 생각했다.

결국, 빨리 성검을 찾으려면 이안이 더 분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안이 준비하는 계획을 생각하면…… 우선 실적을 내 간수들의 신뢰를 사야 했다.

이안은 쉬지 않고 삽을 움직였다.

재밌는 점은, 이미 충분히 잘한다고 생각하던 삽질에도 검술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허리를 쓰는 방향이 중요하지만, 발을 내딛는 위치도 엄청 중요하네요. 마치 검술 같아요.’

[일상 모든 곳에는 깨달음이 녹아 있습니다. 요리를 하다 깨달음을 얻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검사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죠.]

그리고 삽을 푸면서 느낀 중요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각도.

마치 검술에서 상대의 약점에 검을 찔러 넣듯.

삽질도 모레나 땅의 결을 보며 최적의 각도로 삽을 박아야 힘 손실이 적었다.

삽질이라는 게 순수 팔의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의 무게를 실어서 하는 만큼, 그 각도를 조절하려면 신체의 무게중심을 끊임없이 움직여 줘야 했다.

이런 미세한 무게중심의 이동은 단순 검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도 응용할 수 있을 터였다.

가령…… 달리기라거나.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땅을 푸다, 누군가 등을 툭툭 두드렸다.

“이보게.”

“…….”

“이보게!”

“아, 예. 무슨 일이시죠?”

“엄청 집중했구만. 작업 시간이 모두 끝났네. 이제 저녁 먹으러 가야지.”

어서 튀어나오라는 간수들의 고함이 들렸다.

이안이 말했다.

“후우. 오랜만에 땀을 뺐더니 몸이 개운하네요.”

“……그게 겨우 땀 뺀 정도인가? 완전 괴물이 따로 없군.”

“그보다. 오늘은 몇 개나 팠죠?”

레이먼은 품에 받아든 유물을 셌다.

“도자기로 보이는 물건이 하나. 낡은 검처럼 보이는 게 하나. 이 둘은 오래돼서 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군.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양피지? 스크롤인지는 감정해봐야 알겠지만, 어쨌든 한 사람이 파냈다고 하기에는 엄청난 성과지.”

레이먼의 말마따나 유물을 건네받은 간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정말 너희 둘이 모두 파낸 거냐?”

“아. 정확히 말하면, 이 친구 혼자서 파낸 겁니다.”

“……뭐?”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자, 이안이 능숙하게 말했다.

“감이 팍! 온다 싶은 곳을 파니까 나오더라고요.”

그 말에 간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끔 있지. 너처럼 감이 좋은 녀석들이. 일칠삼육이었나?”

“예.”

“기대하고 있겠다. 그나저나 보상은 유물 한 개치만 해주는 게 일반적인데…… 사흘에 나눠서 받겠나?”

보상이라 해봤자 괜찮은 요리와 싸구려 술 정도다.

아무리 많이 받아도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식사량은 정해져 있다.

간수의 제안대로 사흘에 나눠서 받는 게 더 합당할 터.

하지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늘 전부 주세요.”

“흠…… 뭐. 먹성이 좋은가 보군. 알겠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간수는 마지막으로 이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 기대하겠다. 일칠삼육.”

“맡겨만 주십시오.”

이안은 간수를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이안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친근한 미소였다.

정작 간수는 그런 이안의 눈과 머리 색을 보고 꺼림칙하다는 듯, 서둘러 어깨에서 손을 떼었지만.

작업장을 나서고. 식당으로 향하면서 레이먼이 물었다.

“음식을 오늘 전부 받아버리면 어떻게 하나. 다 먹을 수나 있나?”

“혼자 먹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다 같이 나눠 먹어야죠.”

이안은 빵과 술이 담긴 묵직한 바구니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그런 이안에게 죄수들은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어제의 그 일 때문인지 펄먼 패거리는 찾아오지 않았다.

주위에 모두 모인 걸 확인한 이안이 바구니를 열었다.

고소한 빵 냄새가 퍼져나갔다.

“와, 와아”

“……혼자 다 먹는 건가.”

부러워하는 죄수들을 향해 이안이 말했다.

“뭐 해요. 다 같이 나눠 먹죠.”

“네?”

갑작스러운 말에 죄수들은 이해 못 했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하지만 이안이 손수 빵을 떼어 나눠주고, 사과주를 입에 부어주자 그제야 현실로 받아들였다.

“양이 넉넉지 않아서 조금씩 밖에 못 먹으니까, 양심껏 나눠 먹죠.”

“가, 감사합니다!”

“이 귀한 걸…….”

3구역의 죄수들이 몰려들어 각자 눈치껏 음식을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이안의 호의를 경계하며 쭈뼛거리던 죄수들이었지만 곧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어제 펄먼 패거리에 맞서 이안이 나서 주었던 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조금이라 해도 술이 돌았고.

사람들은 실로 오랜만의 술자리에 들떴는지, 아니면 분위기에 취했는지.

각자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억울하게 이 감옥에 끌려온 사연이었다.

“나는 원래 화전민 마을에서 살았어. 자식만 넷이었지. 어느 날 노예 사냥꾼 놈들이 습격했는데, 자식들이 잘 도망쳤을지 걱정이야.”

“나는 실수로 가판대에 넘어졌는데. 물건이 깨졌다고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더라고. 못 주겠다고 버티다 고발당하고, 바로 감방에 처넣어졌어.”

삭막하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단지 음식과 술을 조금 나누어 줬다고 이런 변화라니.

[어쩌면 음식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온기에 사람들의 마음이 동한 거겠죠. 이곳은 따뜻함이라고는 없는 곳이니까요.]

해조차 뜨지 않는 깊은 지하감옥은 언제나 늦가을과 같이 싸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 차갑게 식혀버리는 싸늘함이었다.

그 마음에 오랜만에 온기가 돌고 있었다.

이네스가 물었다.

[그래서 이안. 목적이 뭐죠?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건 좋지만, 제가 아는 이안은 아무 이유 없이 이러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렇죠. 이제 저를 잘 아시네요.’

이안은 빵을 한 웅큼 씹으면서 말했다.

‘간수들과 죄수들의 신뢰를 얻어서. 제가 작업의 고삐를 쥘 겁니다.’

음식을 나눠줘서 죄수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

리처드 펄먼. 죄수 번호 백사십삼.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소문과는 달리, 펄먼은 그리 괴물 같은 인물은 아니었다.

아니, 굳이 표현하자면 평범한 인간에 더 가까웠다.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나 용병업에 뛰어들고.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허덕이다 보니 이 깊숙한 곳까지 흘러들어왔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제법 고되었지만,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금방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펄먼은 다른 죄수처럼 평범하게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느 날.

우연히 감옥에서 시비가 붙어 다른 죄수를 크게 다치게 한 일이 있었다.

그때부터 다른 죄수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음식을 바쳤고, 한명 두명 모여들어 조직을 이루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진즉에 알아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생활은 너무나 달콤했고,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잘못된 걸 알아도 되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난 잘못되지 않았어. 난 오히려 감옥의 질서를 지키는 거야. 이 질서가 계속 유지된다면…….’

하지만 어느 날.

이 감옥의 질서를 깨는 불순물이 들어왔다.

테리오는 3구역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본인의 과실을 숨기기 위해 과장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그놈이 팔을 이렇게! 이렇게! 막 휘두르는데 어찌나 빠르던지…….”

“그만!”

펄먼이 일부러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다.

“어쨌든, 무시 못 할 강자라 이건가?”

“그렇습니다! 저희 간부들이 모두 몰려가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이 테리오! 전력 보존을 위해 무릎을 꿇는 수모도 감당한…….”

“알았다.”

펄먼의 제지에 테리오가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일단 자신을 추궁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 만족하는 듯 했다.

‘후우. 어떻게 하지.’

테리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패거리의 시선이 눈에 들어왔다.

명령만 내리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기세다.

펄먼은 영 탐탁지 않았다.

‘싸우기는 싫은데.’

솔직히 직접 싸우는 건 이제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예전 용병시절이라면 몰라도, 자신은 무려 이 감옥의 왕 아닌가.

부하들끼리 알아서 찾아가서 해결하라 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자칫하면 모든 인망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펄먼은 보수적인 선택을 내렸다.

“일단은 지켜본다.”

“하, 하지만…….”

“간수들과도 얘기를 해보겠다. 너희들도 감시하다 이상이 생기면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부하들이 고개를 숙였다. 몇몇은 펄먼의 결정이 만족스럽지 않은 눈치였지만, 이곳에서 펄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는 사이, 3구역에 대한 여러 소문들이 들려왔다.

“작업 능률이 엄청 늘었다는데? 죄수들이 엄청 열심히 일한다나 봐.”

“걔네는 무슨 힘이 있어서?”

“유물이 많이 발굴된다는데, 그 보상을 다 같이 나눠 먹는다네.”

“그걸 나눠 먹는다고? 미쳤군.”

“그 왜. 3 구역에는 패거리가 상납을 안 받는다잖아. 검은 머리 한명이 테리오를 완전히 박살 내버렸다는데?”

3구역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특히 보상을 패거리에게 뜯기지 않고, 죄수들끼리 나눠 먹는다는 게 다른 구역에게는 꿈 같은 얘기였다.

그 모든 게 가능한 건 이안의 작업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기 때문이었지만.

어찌 됐든, 유보적이었던 펄먼도 슬슬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평소 연이 있던 간수에게 다가가 말했다.

“그 3구역에 검은 머리 놈 때문에 기강이 해이해졌는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죄수들 사이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그라도, 간수 앞에서는 한낱 순한 양일 뿐이다.

굽신거리는 펄먼을 휙 돌아본 간수가 차갑게 말했다.

“안돼.”

평소랑은 태도가 달랐다.

간수들은 펄먼의 쓸모를 인정해, 나름 잘 대해주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냉기가 펄펄 날리지 않나?

그 변화에 불안감을 느낀 펄먼이 더욱 매달렸다.

“아, 안된다니요! 그놈 그거 내버려 두면 죄수들 통제가 안 될 겁니다!”

“안된다면 안돼.”

“저러면 간수님도 힘들어진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그 말이 심히 거슬렸는지, 간수의 눈이 휙 돌았다.

“근데 이 새끼가 오냐오냐해주니까…….”

어느새 손에는 채찍이 들려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채찍의 모습에 펄먼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너가 뭐라도 된 거 같아? 넌 그냥 가축이야. 가축이면 가축답게 시키는 일이나 할 것이지 감히 주인 말에 토를 달아?”

짝!

“끄아악!”

한동안 무자비한 폭력이 휘둘러 졌다.

편안하게 살아오던 펄먼이기에 그 고통이 특히 참기 힘들었다.

실컷 분풀이를 한 간수가 펄먼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말했다.

“잘 들어. 그놈 덕에 이번 할달량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거든?”

“으으…….”

“그러니 건들면 죽여버린다. 너랑 네 패거리. 전부다.”

“우으…….”

간수의 으름장에, 펄먼은 희미한 정신으로 고개를 연거푸 끄덕여 댈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이 조금 흘렀다.

그동안 이안은 연거푸 유물을 파내었다.

그 효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일칠삼육. 오늘도 수고하도록.”

“고생해. 오늘은 특별히 제대로 된 맥주로 준비해 줄테니.”

그 냉랭하고 사납던 간수가 이안에게만큼은 살갑게 굴었다.

이번 달의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모든 근심을 이안이 날려주었기 때문이다.

호의적인 건 간수들만은 아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이안 님.”

“밤사이 평안히 주무셨나요?”

죄수들은 이안을 공손히 대했다.

그동안 나눠준 음식이 효과를 보였는지, 명령만 내리면 뭐든 따를 기세였다.

레이먼은 이 변화에 그저 껄껄 웃었다.

“허허. 불과 열흘 만에 모두 다 자네를 따르고 있군. 자네의 계획대로 되고 있나?”

“이제 토대는 다 마련했습니다. 이제 추진하는 일만 남았죠.”

이안은 간수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조금 긴장되었다.

이놈의 간수들은 툭하면 채찍을 드니, 섣불리 말 거는 것도 위험을 동반했다.

다행히도, 간수가 온화하게 물었다.

“일칠삼육. 무슨 일이지?”

“다름이 아니라, 제가 감이 좀 좋다는 얘기를 한 적 있지 않습니까?”

“아. 유물을 잘 찾던 게 그거 때문이던가? 그래서?”

이안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 소근 댔다. 마치 대단한 비밀 얘기를 하는 것 마냥.

“아무래도 제가 파는 굴에, 뭔가 특별한 게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간수도 덩달아 목소리를 낮췄다.

“트, 특별한 거?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거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한시라도 빨리 파내고 싶은데, 제가 다른 죄수들을 부려서 그쪽으로 파봐도 되겠습니까?”

다른 죄수들을 통솔해서 작업을 주도할 권리를 요구한 것이다.

이안의 건의에 간수는 갈등하는 눈치였다.

혼자서는 결정하기 힘든지, 다른 간수들에게 가 작은 목소리로 상의했다.

그리고 이내 의견 합의를 보았다.

“좋다. 일칠삼육 네 얘기니 한 번 믿어보지. 하지만 산출량이 떨어지거나 하면 네가 다 책임져야 할 거다.”

“물론입니다.”

간수가 크게 외쳤다.

“다들 멈춰라!”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던 죄수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 죄수들에게 간수가 선언했다.

“지금부터 한동안은 여기 일칠삼육의 말을 따라 작업해라! 작업반장인 셈이지! 불만 없나?”

“넵!”

죄수들은 별 저항 없이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이미 이안은 무리의 리더와 다름없었다.

간수가 이안에게 말했다.

“뭐, 어쨌든. 잘해봐라. 기대하고 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건의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또 뭔가?”

“원하는 인력에 한해서 작업 시간 이외에도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간수가 황당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뭐?”

“제가 좀 일하는 걸 좋아해서 말이죠.”

이곳에서 낭비되는 시간을 어떻게든 줄일 수 있다면, 24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