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98화 (99/222)

98. 초원의 시험(4)

바톨은 대칸의 아들답게 실력 있는 전사였다.

100명의 전사들 중에서도 바톨은 가장 선두에 서며, 맹렬하게 말을 몰아 달려왔다.

둘 사이의 거리가 금방 좁혀졌다.

“멈춰라! 네놈도 전사라면 도망치지 마라!”

“너 같으면 서겠냐!”

아무리 이안이라도 100명은 너무 많다.

심지어 저 안에 어떤 능력을 다룰지 모르는 놈들이 섞여 있다면, 정면 대결을 펼치는 건 바보짓이었다.

이안이 속도를 줄이지 않자 얼굴이 새빨개진 바톨이 외쳤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다니! 한심한 녀석! 라이젤 그 건방진 년이 데려온 손님이라 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아. 그러셔. 그래서 나를 죽이려고, 다른 부족들이랑 붙어먹은 거야?”

바짝 독이 오른 바톨이 손가락으로 이안을 가리켰다.

“네놈의 목을 가져가야 성이 풀릴 것 같다! 그리고 영애!”

갑자기 자신이 불리자 스텔이 뒤를 힐끔 쳐다보았다.

바톨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영애를 꼭 가져야겠소. 영애의 마음을 힘으로라도 빼앗겠소!”

“…….”

“초원식 로맨티스트인가…….”

스텔은 대꾸도 하지 않고 고개를 훽 돌렸고, 이안은 바톨의 추태에 황당해했다.

하지만 바톨은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에 든 단창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반대쪽 손은 여전히 이안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런……!”

이안이 황급히 검을 뽑고, 그와 동시에 바톨의 손이 흐릿해지며 단창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단창이 향하는 건 이안과 스텔이 탄 흑마의 허벅지.

이안이 어떻게든 단창을 튕겨내려던 그때, 한발 먼저 반투명한 장벽이 허공에 만들어졌다.

단창과 장벽이 맞부딪혔다. 어찌나 강한 힘으로 던졌는지, 쇠를 긁는듯한 소음이 장벽에서 울렸다.

까가가가각! 캉!

단창이 장벽을 뚫었다.

스텔의 두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힘을 잃은 단창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장벽이 뚫렸다는 사실이 충격인 듯했다.

“쳇.”

짧게 혀를 찬 바톨이 말의 속력을 올렸다. 바톨은 곧 이안의 바로 옆으로 따라붙었다.

어느새 곡도 한 자루가 바톨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디 솜씨 한번 보자!”

바톨이 맹렬하게 검을 뻗어왔다.

단순한 움직임.

하지만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각!

검과 검이 한차례 부딪힌 뒤의 짧은 틈, 이안이 곧바로 활공하는 단검을 꺼내 팔을 뻗었다.

노리는 곳은 바톨의 흉갑이 가려주지 못하는 겨드랑이.

타이밍이 좋았다.

이안의 계산대로면 실패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순간.

바톨의 상체가 뒤로 확 물러났다.

캉!

단검이 흉갑에 가로막혀 튕겨 나왔다. 가슴에 느껴지는 충격에 바톨의 상체도 잠시 젖혀졌지만, 이내 다음 반격을 준비했다.

바톨이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 이건가.”

반대로 이안은 자기 검을 쳐다보았다. 분명 성공했어야 할 일격이 실패했다.

대체 왜?

이안은 금방 깨달았다.

‘바톨에게 공격을 가할 때, 순간적으로 바톨이 탄 말이 감속했어요. 자기 몸처럼 말을 다루는 기마술이라니…….’

초원 전사들의 검술은 기본적으로 기마 검술이다.

그들은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망아지를 선물 받고, 평생을 말 위에서 살아간다.

말은 그들의 친구요 가족, 그리고 한 몸이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톨은 그런 전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대칸의 아들.

어쩌면 ‘진짜’ 초원 전사들의 검술을 겪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라!”

바톨의 말이 순간적으로 가속하는 동시에 그의 검이 가로로 휘둘러졌다.

이안은 검을 곧장 세로로 세운 뒤, 검의 양 끝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캉!

생각보다 바톨의 검에 실린 힘이 강했다.

이안은 요령 없이 순수 근육의 힘만으로 버텨내야 했다.

매우 비효율적인 교환이었다.

‘말이 흔들리는 것 때문에 무게 중심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아. 이대로 계속 검을 섞었다가는 체력이 다 빠지겠어.’

그렇다고 말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저 뒤에는 아직 100여 명에 달하는 전사들이 이안을 추격하고 있었다.

속도를 잃으면 순식간에 포위당할 뿐이었다.

바톨은 쉼 없이 곡도를 휘둘러댔다. 한번 흐름을 빼앗기니, 되찾아오기가 쉽지 않았다.

기껏해야 코르디스에서 잠깐 승마를 배운 이안은 바톨의 기마술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기세가 오른 바톨이 외쳐댔다.

“푸하하! 어디 언제까지 버티는지 보자!”

바톨이 검 손잡이를 가슴까지 끌어당겼다가, 폭발적으로 앞을 향해 내질렀다.

그 검이 향하는 건 흑마의 목.

급하게 검을 내뻗어 튕겨내려는 이안이지만, 튕겨 나간 검이 어디를 어떻게 벨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전투 중에 과감하게 걸어오는 도박.

문제는 이 도박이 이안에게 지극히 불리하다는 점이다.

그때였다.

캉!

바톨의 검이 튕겨 나갔다.

어느새 스텔이 양손을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그 손이 은은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 맞다.”

이안은 불현듯, 자신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너무 오래 혼자 다니다 보니 잘 익숙해지지 않았다.

스텔은 무감정한 표정 그대로 펼쳤던 손을 힘껏 그러모았다.

우둑!

환하게 빛나는 거대한 손바닥이 바톨을 덮쳤다.

바톨은 본능적으로 말에서 힘껏 뛰었고, 말은 그렇게 하기 쉽게 등을 옆으로 기울여주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돈 바톨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몇 번을 구른 뒤 다시 일어섰다.

놀라운 기예로 스텔의 일격을 피한 바톨이지만, 그의 말까지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리가 처참하게 뭉개진 말을 감싸 안으며 바톨이 울부짖었다.

“전사의 결투 중에 도움을 받다니! 비겁한 새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아!”

그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어찌나 한스럽던지, 이안은 소름이 끼쳐 팔을 문질렀다.

“언제부터 결투였냐고. 이러니까 꼭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어쨌든 이제 당분간은 바톨이 추격할 일은 없다.

이안은 잘했다는 의미로 스텔과 하이파이브를 하려다, 멍하니 쳐다보는 스텔을 보며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이제 내가 혼자 안 해도 돼.’

그러기 위해 들인 동료다.

이안은 든든한 마음으로 고삐를 쥐었다.

이제 저 뒤에 따라오는 100명에 달하는 적들을 어떻게 할지가 고민이었다.

‘일단 계속 도망쳐? 아니, 결국 흑마가 지치고 말 거야. 그렇다고 저 안에 들어가서 싸우는 건 그런데. 저번에 검게 물든 무기처럼 무슨 준비를 해왔을지 모르겠고.’

고민을 하면서도 이안은 부지런히 화살을 꺼내 적에게 날려 보냈다.

시위를 한번 놓으면, 어김없이 한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약이 오른 적들도 응사를 해왔지만, 이쪽에는 스텔이 있다.

불합리한 교환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끝이 났다.

화살통에 가져간 이안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아.”

화살이 전부 떨어지고 말았다.

이제는 이안의 원거리 공격 수단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이안의 공격이 없어지자, 화살이 다 떨어졌다는 걸 알아챈 적들의 공세가 거세졌다.

사제를 태운 전사들이 앞쪽으로 움직였고, 사제들이 기적을 부렸다.

꽈릉!

하늘에서 내려온 은빛 벼락이 스텔의 장벽을 마구 두드렸다.

이안은 착잡한 얼굴로 장벽을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진짜 갉아 먹히겠는데.’

말에 탄 습격자들이 부채꼴 모양으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기마술의 달인들이라 저토록 뭉쳐 있어도 누구 하나 서로 얽히는 법이 없었다.

그들의 기마술에 순수한 감탄을 흘리던 그때. 문득, 저렇게 진열을 갖춰 오는 걸 보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안은 태양의 활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이안의 원거리 공격 수단. 그것도 아주 강력한.

이안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었지만 그 가운데에 딱 한 군데, 구름이 뻥 뚫려 빛살이 흘러내리는 지점이 있었다.

아까 사제들이 하늘에서 벼락을 부를 때 뚫렸던 구멍이다.

그 틈에서 흘러들어오는 햇빛은 어떤 종류의 계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몸 최대한 숙이고 있어. 혹시나 안 맞게.”

스텔은 시킨 대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이안은 활을 들어 부채꼴로 달려오는 전사들의 한 가운데에 겨냥했다.

스스스스.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빛이 활로 모여들더니 화살 형상으로 변해갔다.

아만과 싸우던 당시, 햇빛이 없어 호크를 이용하던 그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힘이 모여들었다.

저 멀리서 추격하던 사냥감이 갑자기 반짝거리자, 눈 좋은 전사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들은 이안의 뒤에 탄 스텔이 또 요사스러운 재주를 부린다고 착각했다.

“겁먹지 마라! 이곳에도 제국의 요술쟁이들이 있으니까!”

“요술쟁이가 아니라 신을 섬기는 사제들입니다. 말을 삼가시지요.”

“우리한테는 그게 그거야!”

상대가 무언가 술수를 부린다는 생각에 더 흥분한 전사들이 열을 올렸다.

그 사이에도 이안은 활에다 빛을 모으고 있었다.

태양의 활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어깨에도 엄청난 압박감이 가해져 고통마저 느껴질 정도였지만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화살은 점점 더 커지고, 난폭해져 갔다.

아무리 둔한 사람도 보는 순간 어떤 종류의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기세를 풍기기 시작했다.

“뭐, 뭔지는 모르지만 위험하다!”

“흩어져!”

그제야 전사들은 황급히 산개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이를 악물고 온 힘을 다하던 이안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시위를 손에서 놓쳤다.

후우욱!

한 줄기 거대한 섬광이 전사들의 한복판을 훑고 지나갔다.

***

“워워.”

이안은 흑마를 멈춰 세웠다.

오랜 시간 달려온 흑마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안과 스텔은 말에서 내려 펼쳐진 참상을 보았다.

대지 한가운데에 일직선으로 커다랗게 상처가 생겨났다.

그 경로에 있는 모든 게 깔끔히 소멸했는데, 사실 참상이라 부르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깨끗했다.

빛이 지나간 경로의 가장자리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팔이나 다리가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넌지시 증명할 뿐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죽인 건 처음인데…….”

태양의 화살에서 쏘아진 섬광은 단 일격만으로 육십에 달하는 습격자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이렇게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 병기가 새삼 두려워졌고, 그걸 만들어낸 고대인들이 대단하게 느껴졌으며, 그 고대인도 이기지 못한 악마가 더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섬광을 운 좋게 피한 습격자들은 한순간에 사라지는 동료들을 보며 겁에 질려 도망쳐 버렸다.

이런 걸 봤으니, 또 한동안은 이안을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알지?”

멍하니 서 있는 스텔에게 괜스레 이안이 변명하자, 스텔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쨌든 한고비를 넘겼으니 이 틈을 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흑마가 체력을 보충하도록 그 자리에서 밤을 보낸 이안은 대칸의 말을 전하기 위해 다음 부족으로 향했다.

점점 더 험해지는 날씨에 다 때려치고 싶어질 즈음, 부족에 도착했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타 버린 텐트와 이곳저곳에 묻어 있는 핏자국.

습격의 흔적이었다.

‘부족끼리 싸운 건가.’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시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시체를 묻거나 태우지 않고 내버려 두는 초원의 풍습을 생각했을 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안은 주위 흔적을 살피다가 멈칫했다.

무너진 텐트에서 손도끼 같은 거로 베인 흔적이 엿보였는데, 그 흔적에서 기시감이 들었다.

“분명 어디서 이걸 봤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음 부족으로 향한 이안과 스텔은 또다시 참혹한 광경을 목격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얼어 죽은 아이와 노인, 여인들의 시체.

가축이나 식량 따위가 깔끔히 비워진 걸로 보아, 습격자들이 와 전사들을 죽이고 식량만을 탈취해 사라진 듯했다.

굶주림 때문에 부족 하나를 몰살해 버리다니.

새삼 초원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게 뼈저리게 느껴졌다.

“가자.”

“…….”

“어서.”

참혹한 광경을 쳐다보는 스텔의 손을 이안이 잡아끌었다.

더는 이놈의 시험이 진절머리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대칸에게 가 초원의 사정을 모두 보고하고 싶었다. 빨리 해결책을 강구하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아직 한군데가 남았다.

라이젤이 뒤가 구리다고 경고한 바로 그 헬렝게 부족이었다.

사실 지난 열흘간 그들을 습격한 게 바로 그 헬렝게 부족이란 건, 거의 확실했다.

이 주위에서 그만한 세력을 모을 수 있는 부족은 흔하지 않으니.

부족의 전사들을 참으로 많이 죽인 이안은 그들에게 철천지원수일 것이다.

이미 전령으로서 찾아가는 건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주변에서는 확인할 게 한 가지 있었다.

이안은 말을 몰아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한참을 단조롭게 달리다 보니 자연스레 이안도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 들었는데, 흑마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래. 왜 갑자기 멈춰.”

멍하니 있던 이안은 그제야 바닥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잔뜩 쌓여 있던 눈이 어느 지점에 일러 모두 녹아 있었고, 그 안쪽의 대지가 죽어 있었다.

새까맣게.

헬렝게 부족의 영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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