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초원의 시험(5)
아마도 초원에서 가장 거칠고 호전적인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
테무르 헬렝게는 분노한 얼굴로 눈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대칸을 존중한다. 그의 이념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전사로서 그 사내는 존경 받아 마땅하지.”
“…….”
“그렇기 때문에 맡겼던 거다. 네가 대칸의 아들이니까. 너를 믿고 부족의 전사들과 무기를 내어준 거란 말이다. 그런데 그걸 모조리 잃어버려? 단 두 명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졸전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겠지. 내 검을 가져와라. 내 직접 네 목을 쳐, 네 아비에게 보내겠다.”
옆에 있던 전사가 성인 남성의 몸통만 한 검신 가진 대검을 가져왔다.
족장의 싸늘한 시선이 바톨의 뒤통수에 내리꽂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한 번 더 기회를 주십시오.”
“뻔뻔하군.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가?”
“이대로 그들을 그냥 보낼 겁니까? 헬렝게 부족의 전사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복수를 정녕 하지 않으실 거냔 말입니다!”
바톨이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그의 눈에는 분노가, 목소리에는 지독한 독기가 들어있었다.
주제를 모르고 도리어 역정을 내는 모습에 주위에 있던 전사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새끼가!”
“뭘 잘 했다고 큰소리를 치는 거야!”
“그만.”
족장이 손을 뻗자,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대검을 바닥에 푹― 찍은 족장이 턱짓했다.
마치 더 떠들어 보라는 듯이.
“그들은 이곳을 잠깐 살피고 바로 돌아갈 겁니다. 저와 헬렝게 부족이 결합해 대칸의 전령을 공격했으니, 저희 의도는 이미 밝혀진 셈입니다.”
“그래서?”
“때가 되면 아버지께서는 그자를 성소로 데려갈 겁니다. 제가 중간까지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미리 대기하고 있다 뒤를 치면 됩니다.”
족장은 무성히 기른 수염을 더듬었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 생각했는지, 입가에 사나운 미소가 걸렸다.
“하하. 네 아비를 치자는 말을 이리 쉽게 하다니, 패륜아가 따로 없구나.”
“자기 자식을 두고 피하나 안 섞인 외부인에게 기회를 준 아버지의 자업자득일 뿐입니다.”
엎드려 있던 바톨이 일어섰다.
분노와 탐욕이 어우러져 잔뜩 일그러진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아들은 아비를 넘음으로써 진정한 사내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죠.”
“하하하! 그래! 초원의 전사들에게는 이런 짐승 같은 방식이 더 잘 어울리지! 그동안 너무 오래 잊고 있었어. 그런고로…… 도와주겠나?”
족장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두 무리의 사제들이 똥 씹은 얼굴로 서 있었다.
한쪽은 머리를 깔끔하게 밀었고, 다른 한쪽은 마치 쌍둥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무리였다.
머리를 민 사제 하나가 앞으로 나와 불평했다.
“그대들을 믿고 나섰다가 잃은 형제가 몇인 줄 아시오? 우리에게서 받아먹기만 하고 그대들이 보여준 게 대체 뭐요. 이게 초원의 일 처리인가?”
실로 타당한 말이었다.
스텔을 처리해준다는 조건을 걸고, 그들은 사제들에게 참으로 많이도 받아먹었다.
하지만 족장은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뭐. 너무 열 올리지 마라. 이번에는 부족의 총력을 기울일 테니. 샤카자이를 밀어내고 내가 대칸이 된다면, 그 백배도 되갚아 줄 수 있다.”
“갚을 필요 없소. 예전부터 우리가 바라는 건 하나요. 스텔이라 불리는 그 소녀를 죽이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사제가 시선을 돌렸다.
야만인, 다른 종파의 혐오스러운 종자들, 그리고…… 커다란 솥에 무언가를 젓고 있는 뚱뚱한 마녀.
“랄라라.”
마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솥 안에 시체들을 풍덩 풍덩 넣었다.
옆에서는 다른 마녀들이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연신 재잘거렸다.
솥에서 흘러넘친 내용물이 대지와 닿자, 흙이 검게 변하며 죽어 버렸다.
사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신을 섬기는 종복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광경이었지만, 그래도 참아냈다. 참아내야만 했으니까.
사제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그 무엇과도 손을 잡을 수 있소.”
“허. 제국인들의 종교도 사연이 참 복잡한 것 같군. 그 소녀가 그리도 두려운 건가?”
“계시가 내려졌소. 그녀가 성도에 오면. 큰 재앙이 닥쳐온다고. 그뿐이오.”
“흐음.”
족장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계시니 뭐니, 그에게는 하등 관심 없는 것들뿐이었다.
그때.
솥을 휘젓던 마녀들의 어머니가 그 안에서 무언가를 끄집어냈다.
거구의 체구와 길쭉한 팔다리, 딱딱한 피부가 인상적이었는데 그 손에는 손도끼가 굳게 들려 있었다.
“좋아! 딱 적당히 요리됐어! 지금 바로 사용해보고 싶은데!”
뚱뚱한 마녀가 족장을 향해 기대 어린 얼굴로 쳐다봤다. 그 두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고개를 끄덕여준 족장이 대검을 쥐고 일어서며 말했다.
“좋아. 그럼 어서 가보자고. 샤카자이의 성소를 부수러.”
***
검게 죽어 있는 대지는 누가 봐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흑마에서 내린 이안은 대지를 천천히 살폈다.
‘고약한 냄새. 전사들의 무기에 발려 있던 검은색 액체와 비슷한 냄새. 마녀 짓이군. 이곳에서도 헬렝게는 마녀랑 손을 잡은 거야.’
코헨에서 도망친 마녀들의 어머니는 대초원을 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대초원의 부족들도 마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헬렝게 부족에서 그녀들을 받아들였으니, 그 시커먼 의도가 무언인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싸움이 벌어지겠어. 게임에서처럼.’
하지만 게임에서 헬렝게 부족에서 싸움을 걸어오는 건 플레이어가 성소에 들르고 좀 뒤의 일이다.
이후의 싸움은 샤카자이 부족의 몫이다.
따지고 보면 헬렝게 부족이 반기를 드는 것도 날씨가 추워지는 것도 있지만 대칸이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 아닌가.
라이젤을 생각하면 도와줄 수도 있지만…… 게임에서 상대하던 마녀가 떠오르니 썩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자. 어차피 헬렝게 부족이 돌아선 건 확인했으니, 임무는 끝이네. 얼른 돌아가자. 빨리 성도로 가야지.”
스텔이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이안은 이미 말머리를 돌려 속도를 올렸다.
아직 대칸이 정해준 기한까지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런 곳에서 알짱거리다 괜히 또 습격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흑마가 가볍게 달렸다.
요근래 강행군으로 지칠 법도 하건만, 흑마는 투정 하나 부리지 않고 묵묵히 뛰었다.
‘얘가 없으면 훨씬 애먹을 뻔했네.’
이안은 뿌듯한 얼굴로 흑마의 갈기를 쓰다듬어주었다.
흑마가 기분 좋은 듯, 푸르르 투레질을 하며 꼬리로 이안의 허벅지를 툭 쳤다.
그 모습에 이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초원의 전사들이나 제국의 기사들이 왜 말을 자기 가족처럼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자 문득 떠오른 건 바톨의 얼굴. 아끼는 말을 잃은 바톨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맴돌았다.
얄미운 녀석이지만 참으로 구슬픈 울음소리였다.
‘차라리 그때 같이 죽였어야 했나…… 그럴 여유는 없긴 했는데.’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바톨이 이별의 아픔을 잘 극복하길 바랄 뿐.
그렇게 잡상 속에서 쉬었다 달렸다를 반복하길 나흘.
일행은 샤카자이 부족이 다스리는 도시, 토보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토보르의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도시 옆에 있는 호수의 표면은 꽁꽁 얼었고, 거리는 예전만큼 북적이지 않았다.
추운 겨울이 와, 상인들이 다들 고향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나마 따뜻한 지역인 토보르가 이 정도니…….’
도시에 들어서자, 이안과 스텔은 말에서 내려야 했다.
스텔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눈동자에 미약한 아쉬움이 엿보였다.
“저번처럼 안 북적거려서 그래?”
“…….”
스텔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정답인 듯했다. 왠지 모르게 점점 스텔의 표정을 읽는 게 능숙해진다는 생각에 이안이 쓴웃음을 짓던 그때.
스텔의 앞에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손을 모아 내밀었다.
“…….”
“…….”
“…….”
둘 간의 눈 씨름이 한참 이어졌다.
그러다 스텔은 아이가 뭘 원하는지 퍼뜩 알아챈 것 같았다.
스텔은 품을 잠시 뒤지다 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돈도 없냐?”
한숨을 내쉰 이안이 스텔의 손에 동전 하나를 올려주고, 스텔이 그 동전을 아이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
고개를 꾸벅 숙인 아이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자, 스텔은 멍하니 그 아이가 서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안에게 물었다.
“……왜?”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목소리에 잠시 멈칫한 이안이 되물었다.
“왜 저런 어린아이가 구걸하고 다니는지 묻는 거야?”
스텔을 고개를 끄덕였다.
“왜라고 할 게 있나. 부모가 죽은 거지. 아니면 애를 포기하고 버렸든가.”
“왜?”
“배가 고프거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거나 애를 키울 능력이 안 돼서? 뭐. 책임감 없는 사람들이긴 하지.”
이안의 설명에도 스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말로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얼굴이었다.
이안은 더 설명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뭐가 이해하기 힘든지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저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 스텔의 등을 밀어주며, 길거리를 부지런히 걸을 뿐.
저택에 들어가자, 사용인들이 둘을 극진히 대해주었다.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주고 근사한 의복을 입혀주었다.
꾀죄죄한 몰골로 대칸을 알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준비를 마친 이안은 대칸과 독대했다.
2주만에 만난 대칸의 모습은 전과 똑같아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대칸이 입을 열었다.
“어서 말해 보거라.”
“예.”
이안은 전령으로서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얘기를 전부 전해주었다.
추운 겨울과 굶주린 부족들. 습격. 바톨과 헬렝게 부족. 사제들과 마녀들까지.
대칸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입을 다문 채, 경청했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끝나자, 감탄을 흘렸다.
“후우. 내 생각보다도 더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군. 특히 로크를 사냥해 부족들의 신임을 얻은 건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타모그 족장께 지혜를 빌렸을 뿐입니다.”
“조언보다는 그걸 듣고 직접 실천하는 게 더 어려운 법이지. 그에 반해 바톨 그놈은…….”
아들 생각에 깊은 한숨을 내쉰 대칸이 말을 돌렸다.
“어쨌든. 훌륭하다. 헬렝게 부족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 헌데, 사제들도 모자라 마녀들한테까지 손을 벌렸다니…… 이 또한 나의 부덕함이라 할 수 있겠지.”
마른세수를 한 차례 한 대칸이 다시 힘이 있는 목소리로 돌아와 말했다.
“이안. 올해의 가장 뛰어난 전사는 바로 너다. 너는 샤카자이의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정도의 업적을 세웠다.”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대칸이 엄숙하게 외쳤다.
“약속대로 성소에 발을 들이는 걸 허락하마! 아마도 이방인 중, 처음으로 성소에 발을 들이는 인물이 되겠군! 그 길잡이는 나와, 이미 성소를 밟아 봤던 전사들이 할 것이다!”
엄숙한 선서와 함께 전령으로서 이안의 임무도 끝이 났다.
성소에 입장할 수 있는 건 일 년 중 특별한 단 하루.
그 정해진 날까지 이안은 조용히 수련에 매진했다.
하지만 수련 와중에도 전멸한 부족에서부터 시작된, 머릿속 한구석에 계속해서 남아 있는 기시감이 계속 남아 집중을 방해했다.
뭘까. 대체 뭐가 마음에 걸리는 걸까.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등 허리를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