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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07화 (108/222)

107. 페텔(3)

에릭 그린이 누구인가.

악마를 물리친 결사대의 일원이자, 이네스의 동료가 아닌가.

그 후손을 이런 식으로 마주치다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었다.

충격받은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에, 에릭 그린은 생각이 자주 바뀌는 사람이었지만, 적어도 결혼에 대해서는 확고했어요. 빈손으로 내려와 빈손으로 떠나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지상에 자식들이 있다면 미련이 남아 천국으로 갈 때 마음이 힘들 것 같다고 얘기하곤 했거든요.]

그렇기에 이네스는 애덤 그린의 이름을 듣고, 그 생김새를 보고도 선뜻 에릭 그린의 후손일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이안은 이네스가 느낀 놀라움에 공감하며, 그녀의 궁금증을 대신 물어보았다.

“성자께서 결혼을 하신 줄은 몰랐네요. 사제님들은 원래 결혼을 잘 안 하지 않나요?”

“허허. 대부분은 그렇지만 종파 마다 교리가 다르다오. 선조께서 만드신 이 종파에서는 연애와 결혼 또한 자유롭지.”

껄껄 웃은 애덤은 다시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복도가 끝에 난 문으로 들어가자, 기다란 의자들과 파이프 오르간이 마련되어 있는 커다란 방이 나왔다.

그 한쪽 구석에서 촛불이 미약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는데, 그 불빛의 앞에서 한 소년이 나무토막을 조각칼로 깎고 있었다.

소년의 옆에는 나무로 깎은 신상(神像)이나 조각품들이 늘어 있었다.

제법 정교한 모양이었는데, 소년의 솜씨가 훌륭한 듯했다.

애덤이 소년을 보며 외쳤다.

“릭! 눈에 안 좋으니 촛불을 넉넉히 밝히라 했잖니! 그리고 이렇게 춥게 하면 감기 걸린단다! 장작을 더 때렴!”

소년이 고개를 들더니 노인을 향해 환히 웃었다.

“저 밤눈 좋은 거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리고 저는 아직 어려서 이 정도 추위는 추위도 아니에요!”

“이 녀석이……!”

“그나저나 뒤에 분들은 손님이신가요? 그럼 어서 식사 준비해야죠!”

릭이라 불린 소년은 애덤의 말을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덤과 똑같은 녹색 눈동자가 촛불을 받아 반짝거렸다.

이네스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에릭의 젊을 적 모습과 똑 닮았어요…….]

“어디서 오신 손님들이에요?”

“성도로 가시는 데, 여관을 구하지 못해 곤란한 듯하더구나.”

“아…… 하긴. 속 좁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럴만하네요. 쯧. 신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릭은 툴툴거리며 요리를 준비해왔다. 맑은 스프에 딱딱한 빵.

초라한 식사였지만 이안은 내색하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친절에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허허. 차린 게 없어서 죄송스러울 뿐이오.”

죽과 빵을 순식간에 해치운 이안은 천천히 숟가락을 들던 애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러모로 호기심이 동했다.

특히 이네스는 궁금한 게 많은 듯했다.

이안은 이네스를 대신해 물었다.

“에릭 그린 님의 이야기는 흥미가 깊네요. 제가 학식이 짧아 그러는데, 그분의 이야기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허허. 아무래도 악마 토벌 이후의 행보가 여타 다른 영웅님들과는 다르니, 잘 모르실 수도 있겠소…….”

애덤이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자 릭이 고개를 들고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이미 여러 번 들어 외워 버릴 정도의 이야기였지만, 소년에게는 아직 너무나 재미난 이야기였다.

큼― 하고 목을 푼 애덤이 입을 열었다.

“결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은 악마가 토벌되고. 결사대의 여정은 막을 내렸지만, 선조님은 곧바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셨소. 무엇을 위한 여행이었는지는 저희도 모르오. 하지만 확실한 건, 선조께서 어떤 문제에 대해 고뇌하고 있었다는 것이오.”

에릭 그린은 홀로 온 대륙을 떠돌았다.

그가 각지에서 일으킨 수많은 기적들과 사건들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지금껏 구전되고 있다.

“어느 날 선조께서는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오셨소. 그 품에는 자신을 똑 닮은 아기와 투박하고 낡은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소. 그 아기는 내 고조할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었소.”

“그 뒤로는 이곳에 정착을 한 거군요? 이 예배당을 세웠고요?”

이안은 이 거대하고 낡은 건물을 둘러보며 말했다.

애덤은 씁쓸하게 말했다.

“그렇소. 선조께서는 자신만의 종파를 세우셨소. 꽤 파격적인 교리들을 주창했지만, 에릭 그린이라는 이름 덕에 한때나마 우리 종파는 융성했다고 하오. 하지만 어느 날 선조께서는 말없이 자취를 감추셨소.”

에릭 그린의 갑작스러운 실종.

혹자는 에릭 그린이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은 그가 죽어서 신의 곁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에릭 그린은 이미 80이 넘은 나이였고, 가끔 사제들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곤 했기 때문이다.

애덤이 주위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 이후로는 보시는 그대로요. 선조께서 사라지시자마자 수많은 견제가 들어왔고, 잠깐의 황금기를 누리던 종파는 거짓말처럼 몰락하고 말았소.”

이안은 스텔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없이 애덤의 이야기를 들었다.

영웅의 후손이 이런 식으로 빈궁하게 사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플로라나 레아만큼은 아니어도, 이런 식으로 힘들게 살아갈 이들이 아닐 텐데…….

경청하던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에릭은…….]

말끝을 흐리던 이네스가 물었다.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그가 남긴 말은 없었나요? 성격상 그냥 떠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이안이 그 말을 그대로 옮겨 물어보자, 애덤의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맞소. 예언 같은 걸 하셨었소. 하지만 그건 외부인에게 밝힐 수 없소. 그저 선조님은 짐도 챙기시지 않고 낡은 검만을 챙기고 사라지셨다고밖에…….”

검이라는 말에 이안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혹시 그 검이 무엇인지는 아셨습니까?”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오. 선조님께서 다른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셨다고 하오. 미래를 구할 검이라고.”

이안은 아마 그 검이 성검이 아니었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이네스의 영혼이 깃들어있으니, 동료들은 소중하게 여겼을 터다.

그렇게 애덤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사라진 에릭 그린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했지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네스는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얘기하던 애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늦었군요. 침구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침구라고 했지만, 예배당의 한편에 이불을 조금 깔았을 뿐이다.

‘이런 장소에서 자본 건 처음인데.’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달빛이 은은하게 주위를 비췄다.

창문에 새겨진 에릭 그린의 눈을 마치 이곳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마치 자기 후손에게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어쨌든 그런 환경 속에서도 놀랄 만큼 잠이 잘 왔다.

조금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흐릿해지는 의식 속.

숙면을 취하려는 이안의 귓가에 어렴풋이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가장 신뢰하는 이를 의심하라.”

남자의 목소리였다. 마치 이네스의 것처럼 호소력 있고, 신뢰감이 절로 드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머리에 맴돌자,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노곤해진 신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이안의 의식이 깊은 수면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

당황스러울 정도로 푹 자 버렸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본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스텔 만큼은 아니어도 부지런히 생활하는 게 이안이었건만.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이안은 멋쩍은 얼굴로 일어났다.

스텔은 이미 일어나 멍하니 햇빛을 아름답게 투과하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구경하고 있었고, 애덤은 이미 물건을 팔러 나간 듯했다.

나무를 깎던 릭이 부스스한 이안을 보고 씩 웃었다.

“일어나셨군요!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아무래도 이런 추운 겨울에 여행을 다니는 건 엄청 체력을 잡아먹겠죠. 한동안 푹 쉬세요!”

밝게 말하는 소년을 향해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장 성도의 축제 기간까지는 한 달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그곳까지의 거리를 생각하면 몇 주 정도는 이곳에서 생활해도 문제없을 터.

하지만 이안은 이 도시에서 머무는 게 별로 내키지 않았다.

따뜻하지만, 자기에게만큼은 냉랭한 이 도시를.

“……부지런히 가야지. 성도 구경 좀 하고.”

“아. 아직 얘기를 안 했네요. 오늘 아침에 교단에서 강력히 권고했어요. 성도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로 다니지 말라고 말이에요.”

순례자의 길은 험준한 바위산 사이로 절묘하게 나 있는 길이다.

그 길을 통하지 않고 성도로 가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교단에서는 그 길을 가지 말라고 강력히 권고했다.

말이 권고지 명령이나 다름없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파진 이안이 이마를 쓸어내리며 물었다.

“왜. 예의 그 오우거 습격 때문에 그런 건가?”

“아! 알고 계셨군요. 맞아요. 순례자의 길을 순찰하던 교단의 병사 다섯이 또 안타까운 일을 당했다네요. 시체에 커다란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는데…… 으으.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몸을 부르르 떤 릭이 문득,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이안을 보았다.

“그…….”

“이안이라고 불러.”

“이안 님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분이시죠?”

“뭐. 많이 돌아다니긴 했지.”

“역시! 저 누나는 왠지 어딘가 맹한 느낌인데, 이안 님에게서는 날카로운 기운 같은 게 느껴졌어요!”

저기 얘기가 나오자 스텔이 살짝 고개를 돌려 릭을 쳐다봤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릭은 이안에게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이안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뭐가?”

“이번 사건이요! 다들 오우거의 소행이다 뭐다 난리는 치지만, 하필 축제로 난리인 이때 오우거가 딱 등장했다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릭은 녹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자기 생각을 늘어놓았다.

“제가 봤을 때는 뭔가 뒤가 구린 일이 있는 거 같아요. 특히 종파끼리 싸움이 치열해지는 이맘때라면…… 시체에 난 이빨 자국은 단순히 그렇게 보이도록 꾸몄다는 쪽에 생각이 쏠리네요. 물론, 제가 직접 그 현장을 본 건 아니지만요.”

“…….”

이안은 말을 잃었다.

소년의 추측은 확실히 이안도 생각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릭의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다.

“너는 뭐 사제나 그런 거 지망 아니냐? 에릭 그린의 후손이라며.”

“공부하기는 했지만, 사제가 될 생각은 없어요. 왜요?”

“아니. 사제 지망 꼬맹이가 할만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릭의 사고방식은 일반적인 사제들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는 듯. 릭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저희 종파가 특이하긴 하죠. 그러다 보니 다른 종파들에게 특히 미움을 더 많이 샀고요. 선조이신 에릭 님도 눈치 없이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다니시다 싸움이 많이 붙곤 했다니, 피는 못 속인다는 거네요.”

‘진짠가요?’

[…….예.]

스스럼없이 자기 선조를 까는 릭을 보며 이안은 말을 잃었다.

자기 가문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던 플로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렇게 선조를 함부로 말하고 다녀도 되는 거야? 엄청난 영웅이었다며.”

“아. 저희 선조님께선 인간이 존경을 받을지언정,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다니셨던 분이에요. 이 정도의 합리적인 비판은 너그러이 봐주시겠죠.”

“이거 아주 웃기는 놈이었네.”

피식 미소지은 이안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릭이고 에릭 그린이고, 일단은 성도로 가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냥 혼자 뚫고 가? 뭐가 있든 꽤 귀찮아질 거 같은데…….’

단순한 습격이면 오히려 상관없다.

하지만 복잡한 알력 다툼에 어떤 식으로든 휘말렸다가는 여러모로 곤란해질 수 있다.

이곳은 교단의 세력권이다.

검은 머리가 함부로 눈에 띄었다가는, 언제 화형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뭐. 교단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않겠지?’

어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마냥 죽치고 기다리는 건 이안이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다.

‘정보를 좀 모아야겠어. 솔직히 이 도시를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지만…… 일단 정보를 모으려면 도시 사정에 밝은 사람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어.’

누구에게 도움을 받을까.

그 생각에 이르자, 아직도 자기를 왠지 모르게 초롱거리는 눈으로 보는 에릭 그린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근데 지금 꽤 곤란해하시는 것 같은데요. 제 도움이 필요한가요?”

“눈치가 빠르네…….”

이안이 물었다.

“너. 여기가 고향이지?”

“그렇죠.”

“그럼 도시 상황도 잘 알겠네. 좀 도와줘. 보수는…… 넉넉히 할게.”

이안은 진심이었다.

숙박비까지 해서 이 궁핍한 할아버지와 손자에게 넉넉히 금화를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릭은 고개를 돌렸다.

“아뇨. 돈은 됐어요.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어요.”

“그럼…….”

“대신! 이안 님도 절 좀 도와주세요!”

이안의 손을 덥석 잡은 릭의 두 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돈도 마다하고 대체 무얼 원하는지. 왠지 귀찮은 일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슬쩍 눈치를 살핀 이안은 말했다.

“그냥 돈으로 주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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