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페텔(4)
이안과 스텔은 활기차게 걷는 릭의 뒤를 따랐다.
릭은 몹시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인파를 헤쳐나가면서도, 밝은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좋나.’
릭은 도와주는 대가로 간단한 가르침을 요구했다.
그 가르침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건지는 나중에 이안의 볼일이 끝나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어쨌든.
이안은 에릭 그린의 후손을 손이 닿는 데까지 도와주고 싶었다.
이네스가 그리하기를 원하는 것 같았으니까.
[보면 볼수록 똑 닮았어요. 기분 좋아지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까지. 페텔에서도 에릭은 저희의 길 안내를 했었지요.]
이네스는 추억에 젖어 입을 다물었다.
이백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자기가 지나온 길을 이안과 에릭의 후손이 그대로 밟는 건 이네스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릭이 부지런히 향한 곳은 화려하게 지어진 거대한 예배당이었다.
예배당이라기보다는 신전이라는 말에 더 가까운 건물이었다.
멍하니 웅장한 건물을 올려다보는 스텔과 이안에게 릭이 설명했다.
“페텔에서는 어떤 정보를 얻으려면 예배당으로 가는 게 좋아요. 모든 정보가 이곳에 한 번씩 거쳐 가거든요.”
“……그렇구나. 그래서 용병 길드보다 예배당을 찾아왔구나.”
“아. 용병 길드의 역할도 예배당에서 하니, 참고해주세요.”
아무래도 페텔에서 웬만큼 굵직한 사업들은 모조리 교단과 연결되어 있는 듯했다.
활기찬 걸음으로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려던 일행을 흰 갑옷을 입은 병사 둘이 막아섰다.
“멈춰라.”
“신원이 증명되지 않은 자는 들어갈 수 없다.”
릭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신원이라니. 예배당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공간 아닌가.
그러다 릭은 뒤에 있는 이안을 떠올렸다.
그 머리 색과 눈 색깔을.
릭이 미안한 얼굴로 이안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페텔 사람들이 좀 꽉 막힌 구석이 있는지라…… 저 혼자 들어가서 일을 보고 올게요.”
“아. 괜찮으면 얘도 데려가.”
이안은 스텔의 등을 밀었다.
예배당 안의 웅장한 풍경이나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면, 어쩌면 스텔의 마음속 신앙도 안정을 찾을 수 있을 터.
스텔의 이안을 힐끔 쳐다봤다.
마치 너는 같이 안 가냐는 듯한 얼굴이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게. 릭 말 잘 듣고.”
그 순간 스텔이 자리에서 딱 버티고 서 버렸다.
이안이 더 세게 밀려 하자, 도리어 등을 기대다시피 해서 버텼다.
“……들어가기 싫은 거야?”
스텔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생각하던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한가.’
같은 교단의 사제들에게 동료들을 모두 잃고 목숨을 위협받는 스텔이다.
신성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
예배당 안에 이안 없이 들어가는 건 조금 두려울 터.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지만.’
결국 이안은 릭의 손에 자그마한 자루를 하나 들려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야겠다.”
“……이건?”
“공짜로 정보를 주지는 않을 거 아냐.”
“하하. 저희는 헌금이라고 부르죠.”
쓴웃음을 지은 릭은 금방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안과 스텔은 계단의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돈 많은 상인부터 타국에서 온 늙은 귀족까지.
예배당 안에는 참으로 많은 사람이 드나들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교단의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페텔에서도 이 정도인데 성도도 얼마나 더 붐빌까.
예배당을 찾는 인파의 대부분은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이안은 스텔은 양손에 부모의 손을 잡고 행복한 얼굴로 걷는 남자아이를 구경했다.
‘가족이라…….’
이안은 문득,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곳에 떨어진 지도 벌써 2년이 넘었다.
이네스를 만나고부터는 그 빈도가 줄었지만, 한창 힘들 때는 매일같이 부모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가족은 이안의 강력한 생존 동기 중 하나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첫 번째 목표요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 게 두 번째 목표다.
지금은 첫 번째를 달성하는 것만도 쉽지 않아 잠시 제쳐두고 있지만, 언젠가 기회가 되면 다시 돌아가 부모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당장은 너무나 꿈같은 얘기지만…….
이안은 힐끔 스텔을 쳐다보았다.
스텔은 행복해 보이는 세 가족이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불쌍한 놈이야.’
부모에게 버려져, 평생을 인간답지 않은 삶을 강요받은 스텔이다.
저 광경이 스텔에게는 어떻게 다가올까.
그렇게 멍하니 구경하던 이안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선!’
강한 적의를 품은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대부분의 행인들은 이안을 보며 미약한 혐오와 적의를 품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안 좋은 의도가 느껴지는 적의였다.
이안은 서둘러 눈에 집중했다.
지나가는 이들의 영혼을 훑었다.
‘이런…….’
눈이 욱신거려왔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들어오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사이, 적의를 품었던 시선도 자취를 감췄다.
‘누군가한테 감시를 받고 있는 건가.’
게임에서 스텔은 성도에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습격을 받는다.
이곳 페텔도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닌 셈이다.
긴장하며 서 있는 이안의 뒤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왜 서 계세요?”
일을 마치고 나온 릭이 멀뚱히 서 있는 이안을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이안은 대충 얼버무린 뒤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것보다, 어떻게 됐어?”
“아. 바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어요. 안 그래도 이미 많은 상인이나 여행자분들이 물어보러 오셨던 모양이에요. 근데…….”
말끝을 잠시 흐리던 릭이 이어 말했다.
“교단에서 곧 해결할 테니 안심하라고 말해주셨어요.”
“……보통 그런 경우에는 아무 대책이 없던 때가 많던데.”
“그런 것과는 좀 느낌이 달랐어요. 뭔가 준비한 게 확실히 있는 느낌이니, 조용히 있으라는 느낌? 조금만 기다려보면 어떨까요.”
“흠.”
축제가 코앞인 지금, 교단에서도 이래저래 신경을 쓰고 있을 터.
아직 시간 여유가 있는 만큼 조금쯤은 기다려도 상관은 없었다.
다만…….
‘도시 안에도 적이 있단 말이지. 도시 한복판에서 당당히 습격할 것 같지는 않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상대가 누군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지금으로선 딱히 뾰족한 수도 없지만 말이다.
‘뭐. 방심만 안 하면, 적당히 대처할 수 있겠지.’
대충 앞으로의 가닥을 잡은 이안이 릭에게 물었다.
“그래. 아무튼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다. 그래서. 나한테 대체 무슨 가르침을 받고 싶은 거냐.”
“아. 그거 말인가요? 혹시 이번에 페텔의 교단에서 병사들을 대대적으로 뽑는 거 아시나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때문에 시골 마을에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겪지 않았던가.
릭이 가볍게 말했다.
“그거. 저도 지원할 거거든요.”
“……네가? 그래도 돼? 너희 가문의 종파를 책임져서 사제가 돼야 하거나 그런 거 아니야? 아. 아까 사제 지망이 아니라고 했었나.”
릭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네. 그런 거 아니에요. 애초에 선조께서는 자기 후손들이 성직자가 되는 걸 엄청나게 싫어했거든요. 종파의 장을 세습하는 것도 혐오하던 분이었고요.”
에릭의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도 당연하지만, 강력한 신성을 다뤘다.
후손들은 힘과 에릭 그린의 후손이라는 점을 이용해 종파의 장이 되었지만, 에릭 그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기 삶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늘 주장하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말년에 자취를 감춘 것도 자식들 하는 꼬라지가 맘에 안 들어서일 수도 있겠네요.’
[부정하고 싶지만…… 왠지 에릭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슬프네요.]
갑자기 저 혼자서 생각에 잠긴 이안을 보며 잠깐 의아해하던 릭은 자기가 병사가 되려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꼭 교단의 병사가 되고 싶어요. 일단 들어가면 월급도 주고, 밥 굶을 걱정은 없어지니까요. 가서 싸우는 법도 좀 배우고. 할아버지가 더 물건 팔러 안 가도 괜찮고요.”
가난한 예배당과 허리가 굽은 애덤이 떠올랐다.
이안은 기특한 소년의 다짐에 릭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그렇구나. 힘내라. 그래서.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니.”
“교단의 병사가 치르는 시험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무술 시험이고, 하나는 신학 시험이요. 신학이야 지금 수준에서도 아무 문제 없지만…… 아무래도 제가 무술엔 영 자신이 없어서요. 그러니 이안 님께서 저를 합격하게 만들어주세요!”
“아 그래. 검 쓰는 법은 조금 가르쳐 줄…… 응?”
“어떤 불법적이고 치사한 수를 써도 좋아요! 그냥 합격하게만 만들어주세요! 네?”
생각보다 더 적나라한 부탁해 잠시 말을 잃은 이안이 물었다.
“불법이니 치사한 수니 뭐 그렇다고 치고.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니?”
“……왠지 이안 님은 그런 쪽으로 빠삭하실 것 같아서요.”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새삼 서러워지는 이안이었다.
***
페텔의 거대한 예배당. 그 거대한 건물의 가장 은밀한 심처에 로브를 얼굴 깊이 눌러쓴 사제 몇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준비는?”
“순조롭다. 어리고 깨끗한 제물들이 모이고 있다.”
“성도에서의 감시는?”
“하. 이미 3할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소. 지금껏 눈치도 못 챈 교황이 이제 와 무얼 하겠소.”
“새로 성기사를 보낸다고 들었다.”
“게르하르트 경 외 세 명. 예상대로 성도에서는 이번에 끝장을 낼 작정이오.”
“우리와 뜻은 같지 않으나, 신실함만큼은 진짜인 사람이군.”
“20년 후에는 반드시 초인의 영역에 들 것이라고 기대되는 사람이니, 아쉽게 됐어.”
“그래도 준비는 확실히 해야 합니다. 만약 이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언젠가 강력한 적이 되어 우리의 목을 노릴 자입니다.”
“걱정 마라. 최고의 함정을 준비했다. 게르하르트는 제물들과 함께 순례자의 길에서 그 고귀한 영혼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오래도록 지속되던 회의 중,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던 사내가 돌연, 입을 열었다.
“스텔이 이곳, 페텔에 찾아왔습니다.”
모두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가 그중 하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계시에서 가리키는 인물이 맞나?”
“인상착의가 같습니다. 그런 은발은 흔하지 않습니다.”
“끝끝내 대초원을 가로질렀군…….”
한 사제가 책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당장 죽여야 하오! 그녀가 성도에 다다르면 엄청난 재난이 교단에 닥쳐온다고 계시에 나와 있지 않소!”
과묵한 사내가 옆에서 거들었다.
“특이한 자를 호위로 두고 있습니다만 그래 봤자 한 명.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다른 사제가 곧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그녀에 대한 계시는 종파마다 다릅니다. 오히려 그녀의 존재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애초에 한 인물에 대한 계시가 다른 건 흔치 않은 일이오. 그만큼 불안정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지. 변수는 제거되어야 마땅하오.”
“그만!”
분위기가 격해지자, 가장 높은 위치의 사제가 그들을 중재했다.
“우리의 거대한 계획에서 그녀는 너무나 작은 퍼즐 한 조각일 뿐이오. 지금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 하겠소. 신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면, 그녀는 결코 우리의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오.”
말 그대로다.
그들이 하려는 일이 진정으로 옳고, 저 하늘의 신이 그들의 편을 들어준다면.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도, 걱정할 것도 없다.
언성을 높이던 사제들도 수긍한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만족스럽게 주위를 둘러본 사제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이것으로 해산하시오. 하늘을 무너뜨리면.”
나머지 사제들이 일제히 제창했다.
“지상에 천국이 도래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