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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0화 (111/222)

110. 페텔(6)

“어, 어라?”

릭의 신성 수준이 이안의 예상을 웃돌았다.

릭은 스텔 만큼은 아니어도, 일반 사제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너, 너…… 신성을 엄청 잘 다루는구나.”

“헤헤.”

당황한 이안의 말에 쑥스러운 듯, 릭은 머리를 긁적였다.

스텔도 릭의 신성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안이 물었다.

“혹시 애덤 씨도 너만큼 신성을 다룰 줄 아시니?”

“당연히 저보다 뛰어나죠! 페텔 안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걸요?”

“……그럼 대체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 거야.”

이 정도 치유 기적이면 대충 귀족 가문에 찾아가 병 한번 치료해주고 두둑이 보수를 챙겨올 수 있을 터.

이렇게 나무 조각을 깎으며 쪼들리는 생활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하지만 릭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성을 돈벌이로 사용하지 말라는 건 선조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던 가르침이에요. 믿음을 돈 받고 팔라고 하지 말라고 했죠.”

“……그런.”

“돈은 정직하게 땀 흘려서 버는 게 저희 종파의 교리에요. 그래서 저희도 가끔 빈민가에 들러서 병을 치료해주는 걸 빼면 신성을 쓸 일이 잘 없네요.”

“쩝.”

이안은 입맛을 다셨다.

부를 얻을 능력이 있는데도 스스로 가난을 자처하다니.

괜스레 이안이 아쉬움을 느꼈다.

“이 정도면 그냥 병사가 아니라 사제로 교단에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하하. 그건 또 여러모로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복잡한 이유가 있는지라…… 그리고 저는 교단의 병사로 삶을 마칠 생각은 없어요.”

릭은 두 눈에 강한 의지와 꿈을 담아 말했다.

“병사로서 여러 무술을 배우고 힘을 길러서, 온 대륙을 여행해보고 싶어요. 마치 선조님처럼요!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북해의 광활한 바다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대륙의 척추, 레지스 산맥!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과 울창한 대수림!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잔뜩 흥분한 릭이 하늘에 양손을 펼치며 말했다.

천장의 둥그스름한 부분에는 에릭 그린이 각지를 여행하는 벽화가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신성도 뛰어난 데다가 꿈은 각지를 여행하는 모험가. 아직 어려서 성장 가능성도 커. 어쩌면…….’

침을 꿀꺽 삼킨 이안이 릭을 채근했다.

“다른 기적도 쓸 수 있지?”

“네. 몇 개 정도는요.”

“빨리 써봐! 빨리!”

“그렇다면야…… 은은하게 내리는 비.”

하늘에 원형의 영역이 만들어지더니, 그 아래로 빛살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그 비에 맞으니 체력이 차오르고, 의지가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광역 버프네.’

“다음은?”

“참회의 가시.”

릭이 한 손을 펼쳐 앞에다 뻗자, 손바닥에서 가시가 숭숭 나 있는 나무줄기가 뻗어 나와 앞에 있던 기둥을 옭아맸다.

‘적을 쳐내거나 속박하는 능력. 공격력도 제법 출중해.’

그 뒤로도 릭은 두어가지 정도의 기적을 더 선보였다.

모두 뛰어난 효과를 자랑하는 기적이었다.

‘게다가 기술들이 한곳에 치우쳐진 게 아니라 밸런스가 잡혀 있어. 어쩌면…….’

고민하는 이안에 릭이 외쳤다.

“이안 님!”

“……어?”

“뭘 그렇게 고민하세요. 이제 상처도 나았겠다, 다시 수련 시작해야죠.”

“아. 그랬지. 수련 중이었지.”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안은 다시 몽둥이를 들고 릭의 방패를 후려쳤다.

하지만 몽둥이를 후려치면서도 이안은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 늦게까지 이어진 수련은 애덤이 돌아오고 나서야 끝이 났다.

***

“이안.”

“…….”

“이안.”

“……네.”

고민에 빠져 있던 이안이 고개를 들었다.

이네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고민이 많아 보여요.”

“……릭에 대해 생각했어요.”

“동료에 관한 문제군요.”

“릭을 받아들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릭은 몹시 탐이 나는 인재였다.

동료로 들이고 싶을 만큼.

‘하지만 릭이 들어오면…….’

이안은 밸런스를 고려해 최적의 파티를 구상했다.

여기서 누군가 들어온다는 건 한 명이 빠져야 한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악마를 상대할 수 있는 결사대는 언제나 다섯 명이었죠. 저희도 그랬고, 저희의 전에도. 그전에도 변하지 같았어요.”

“네…… 다섯 명 파티에 사제가 두 명인 건 효율이 나빠요.”

“스텔과 릭. 둘 중에 고민하는 거네요.”

릭을 새로 받아들이면 스텔을 빼야 했다.

게임에서의 능력치를 생각하면, 무조건 스텔이 옳았다.

스텔은 나중에 성장해 악마의 공격조차 막아낼 정도의 방어력을 갖춘다.

게임에서는 나오지도 않는 캐릭터인 릭보다는 고점이 훨씬 높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은 신성을 못 쓴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쓸 수 있게 된다는 보장도 없다.

지금껏 이안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스텔에게는 여러 특이한 점들이 있지만, 신성만 잘 쓰면 상관없다.

신성을 사용해 전투의 안전도를 올릴 수만 있다면, 상대가 인형이든, 기계든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스텔은 신성을 사용하지 못한다.

냉정히 말해, 지금은 짐 덩이에 불과하다. 쓸모가 없다.

스텔이 한번 깨진 잃어버린 신성을 되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여기서 스텔과 헤어지는 게 맞나?’

신성도, 동료도 모두 잃은 스텔을 홀로 내팽개치면 어떻게 될까.

분명 높은 확률로 죽어 버리고 말겠지.

하지만 그걸 이안이 신경 쓸 필요는 어디에 있는가.

인생은 이용당하고 버려지거나 이용하고 버리거나 둘 중 하나.

자기 코가 석자다.

앞으로의 힘겨운 싸움을 생각하면 헤어지는 게 맞다.

애초에 어떤 유대가 있어 동료로 받아들인 게 아니라, 단순히 스텔이라는 캐릭터가 성능이 좋아서가 아닌가?

그러니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다.

쓸모를 다한 사람은 버림당하는 게 당연하다…….

이안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스텔을 단순한 게임 캐릭터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기에.

그리고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하는 감정이 이안의 마음속에 있기에.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안의 곁에 어느새 다가온 이네스가 부드럽게 손을 어깨 위에 올렸다.

“수백 년 전. 대륙에 위험에 빠지자 교단에 이런 계시가 내려졌어요. 진정한 영웅의 믿음과 헌신이 대륙을 구해내리라.”

“네…….”

“이어진 계시는 저를 가리켰고, 저는 하루아침에 악마에 맞설 영웅이 되어 버렸죠.”

이네스가 코르디스에 다닐 적. 아직은 어렸을 때이다.

“처음 결사대에 합류한 건 제 오라버니였어요. 오라버니는 어린 제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짐이라 말하며 함께 해주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에요.”

이네스는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이어서 말했다.

“그다음은 에릭이었어요. 에릭은 교단에서 자기한테 귀찮은 일을 떠넘겼다고 화를 냈지만, 자기 할 일은 또 성실히 했죠. 그 뒤로 피에람 양이 들어오고. 아타바 씨가 들어오고. 결사대가 완성되었죠.”

“…….”

“저희는 강했어요. 하지만 최강은 아니었죠. 분명 저희보다 강한 영웅들도 있었어요. 하지만 끝끝내 악마의 앞에 도착한 건 저희뿐이었죠.”

이네스는 살며시 이안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 포근하고 안정되는 느낌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건 동료 간의 믿음 덕분이었어요. 어떤 위기가 다가오고, 동료가 어떤 상태가 되든. 우리는 강한 유대로 시련을 헤쳐나갔어요. 그렇기에 대악마의 앞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거예요.”

“…….”

“이안에게 동료란, 필요 없으면 버리는 존재인가요?”

잠깐 말을 잃은 이안이 되물었다.

“이네스 님은 스텔을 동료로 들이는 걸 마음에 안 들어 하셨던 거 아니었어요?”

“지금도 그래요. 이안은 강해져야 해요. 악마조차 홀로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해요. 실력이 뒷받침되어야 동료들은 이안을 신뢰할 거고, 고된 시련 앞에서도 유대가 흔들리지 않을 거예요.”

이안은 말을 잃었다.

이네스의 생각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힘에 대한 이상할 정도의 집착.

애당초, 혼자서 악마를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면 동료가 왜 필요하겠는가.

모순적이다.

하지만 이안은 수긍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볼게요. 그리고…… 어차피 성도까지는 데려다줘야 하니까요.”

아직 생각할 시간은 있었다.

***

“게르하르트 경이다!”

“게르트하르트 경! 이쪽 좀 봐주세요!”

“손 한 번만 잡아주십시오!”

백마를 탄 청발의 잘생긴 사내가 위풍당당하게 대로를 거닐었다.

입고 있는 흰 갑옷은 어찌나 반짝거리는지, 보고 있으면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와! 진짜 엄청나게 멋있지 않나요? 와. 진짜. 어떻게 저렇게 기품이 넘치시지?”

릭은 옆에서 호들갑을 떨어댔고, 이안과 스텔은 시큰둥하게 게르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게르하르트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하하. 교단의 병사를 뽑는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러주어서 실로 기쁠 따름이다! 부디, 참여한 이들 모두가 최선을 다해 건승하길 바란다!”

릭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째 밤낮 가리지 않고 방패로 공격을 막는 것만 수련했다.

이제는 이안의 공격도 제법 막아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게 이안의 전력은 아니었지만.

게르하르트가 외쳤다.

“1차 시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각자 나에게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걸 보여주면 된다! 검이든, 창이든 상관없다!”

“자, 자율 재량이군요.”

“뭐. 고수들은 검 하나 뻗는 것만으로도 실력을 가늠할 수 있으니까.”

시험에 지원한 청년들은 곤란한 얼굴을 했다.

자신 있는 걸 하라고 했지만, 뭘 보여줘야 좋을지 헤매는 듯했다.

누군가는 우스꽝스럽게 허공에 칼질을 했고, 누군가는 창을 굳게 쥐고 앞으로 내질렀다.

또 누군가는 옆에 있는 지원자와 짝을 지어 대련을 펼쳤다.

게르하르트는 청년들 사이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격려의 말을 건넸다.

“음. 좋아. 제법 날카로운 찌르기군.”

“기합이 잔뜩 들었군! 보기 좋아!”

“제법 훌륭한 대련이야!”

좋은 반응에 참가자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그럼 합격인가요?”

“아니!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엑…….”

그런 식으로 게르하르트는 참가자를 하나하나 살폈다.

교단에서 알아주는 성기사라면 이런 일 따위는 대충 해도 될 텐데.

게르하르트에게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지원하는 이들 대부분은 다 교단의 열렬한 신자들이니까요. 아무래도 잘 챙겨주고 싶겠죠.]

고위 사제나 성기사들도 적어도 표면상으로라도 교인들에게 친절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교인이 아닌 자들에게는…….

“음? 경비들은 뭣 하는가! 척 봐도 수상해 보이는 녀석이 있지 않나!”

놀랄 만큼 냉랭해지는 법.

이곳저곳 움직이던 게르하르트는 이안을 보자마자 검을 뽑으며 그리 외쳤다.

말이라도 잘못했다가는 곧바로 벨 기세다.

한숨을 내쉰 이안이 적당히 대꾸했다.

“참가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어, 구경하러 온 건데요?”

“하! 하찮은 놈이 말대꾸를! 거짓말하지 마라. 분명 우리 교단의 병사가 될 이들을 미리 감시하러 온 이교도의 세작이겠지! 그 눈과 머리 색이 명백한 증거다!”

“아, 아! 이분은 저, 저를 보러 와주신 분이에요. 게르하르트 경.”

“……그게 정말이냐?”

“예!”

릭이 끼어들어 설명을 하자 게르하르트가 눈매를 좁혔다.

“흠…….”

게르하르트는 릭과 옆에서 멍하니 있는 스텔을 슬쩍 보더니 중얼거렸다.

“곧은 믿음을 가진 자가 두 명이나 같이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겠군.”

이안은 눈매를 좁혔다.

‘얘, 설마 방금 둘의 신성을 읽어낼 수 있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스텔의 신성은…….’

궁금증이 들었지만 물어볼 상황이 아니었다.

게르하르트는 릭에게 물었다.

“이름을 말해다오. 소년.”

“릭 그린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린? 그렇군, 자네가…… 어쨌든 뭘 보여줄 거지?”

“저는 이 방패입니다! 게르하르트님이 공격하면, 한번 막아내 보이겠습니다!”

그 말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어린놈이 건방지게 뭐라는 거야.”

“게르하르트 경의 공격을 막겠다고?”

“아니, 잠깐. 그린이라 하지 않았나…….”

게르하르트는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다른 무기는 없나?”

“예! 오로지 방패입니다!”

“왜 방패를 선택했지?”

“동료들을 제 손으로 지키고 싶었습니다!”

이안이 미리 일러준 대답을 그대로 읊자, 게르하르트를 비롯한 시험관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게르하르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좋은 마음가짐이군! 교단의 병사들이 다 자네 같은 마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명심하게. 시험 중 신성 사용은 금지야.”

게르하르트가 메이스를 꺼냈다.

허공에서 메이스를 한번 붕 휘두른 게르하르트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안 봐줄 거다! 그러니, 배에 힘 팍 주도록!”

“예!”

“간다!”

양손으로 메이스를 붙잡은 게르하르트가 그대로 휘둘러, 릭의 방패를 후려쳤다.

쾅!

강한 충격이 방패에 전해졌다.

두 걸음 정도 물러난 릭은 제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게르하르트가 흥미를 보였다.

‘흐음? 전력은 아니었어도, 제법 강하게 쳤는데?’

릭 또한 놀랐다.

‘이안 님에 비하면 별거 아닌데?’

의외의 사건에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몇몇은 릭이 무언가 속임수를 썼다고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그 게르하르트의 일격이었으니까.

조금 봐줬다고 해도 해도 아직 어린 청년이 막아냈다니, 선뜻 수긍하기 힘들었다.

그런 침묵을 깬 건 게르하르트의 박수 소리였다.

짝짝짝!

“아. 이거 훌륭하군. 기대 이상이야. 굉장했다, 릭.”

“막아내는 것밖에 못 하는 데요 뭘…….”

“아니. 방패를 든 자세나 무기가 부딪칠 때 본능적으로 힘을 흘려내는 기술 모두 완벽했다. 독학으로 이런 걸 배울 리는 없고,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스승을 두었을 텐데. 괜찮다면 스승의 성함을 알려 주겠나?”

게르하르트의 질문에 릭은 곤란한 듯, 이안을 흘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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