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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1화 (112/222)

111. 페텔(7)

방패술을 가르쳐준 게 이안이라는 얘기를 들은 게르하르트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큼. 지금 보니 이곳저곳 허술한 부분이 많군. 릭. 부디 사람은 가려서 사귀길 바란다.”

“네…….”

“어쨌든 합격 축하한다. 이따가 2차 시험에 대한 공지도 할 터이니, 이곳에서 쉬고 있도록.”

“네!”

게르하르트가 떠나자, 릭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저 합격한 거죠? 그죠?”

“1차는. 2차가 뭔 시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이안 님! 다 이안 님 덕분이에요!”

릭은 해맑게 이안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그 순수하게 기뻐하는 모습에 조금 가라앉았던 이안의 기분도 풀렸다.

“오냐. 열심히 해라.”

“스텔 님도 고마워요!”

“……뭐가?”

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순순하게 왜 고마운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당황한 릭이 말했다.

“어, 그러니까…… 이렇게 응원해주러 오셨잖아요!”

“……응원 안 했는데?”

그저 이안이 이곳에 왔으니까 따라 왔을 뿐.

스텔이 나쁜 의도로 그렇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응원을 안 했으니까, 안 했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릭이 다시 당황하자, 이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때는 그냥 응원했다고 말하는 거야.”

“……거짓말은 나빠. 많이 하면 지옥에 갈 거야.”

“근데 얘는 못 하는 말이 없어.”

이안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고민하던 그때, 릭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두 분은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한 것 같아요.”

“뭐가.”

“두 분께서는 길에서 우연히 만나 성도까지의 여정을 함께한다고 하셨죠? 근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아요.”

이안은 머리를 긁적였다.

하루에 말하는 횟수가 손으로 꼽는 스텔과 이안의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이안이 의문을 표하자 릭이 아직 솜털도 나지 않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요. 말로는 할 수 없는 유대가 느껴진다 할까. 실제로 이안 님은 스텔 님의 눈빛만으로 뭘 원하는지 알아차리잖아요?”

“그거야……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었어?”

스텔은 눈빛만으로 자기 의사를 전달하는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말수가 적어도 큰 불편함은 없었고.

“글쎄요. 저는 아직 잘 모르겠네요. 이안 님이라서 읽을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런가?”

이안과 스텔의 눈이 마주쳤다.

역시 잘 모르겠다.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이 흐릿하고 무감정한 눈동자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자기마저 흐릿한 색깔에 물들어 버릴 것 같았다.

기다리는 사이 시험이 끝났다.

게르하르트가 지원자들을 격려했다.

“모두 훌륭했다! 그대들이 앞으로 교단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이란 생각이 드니, 실로 마음이 뜨거워지더군! 아쉽게 탈락한 사람들은 더욱더 정진해 다음 기회를 노리고, 합격한 사람들은 소중한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도록 하라. 두 번째 시험에 대해서는…….”

게르하르트가 얘기를 하던 도중, 뒤쪽에 있던 사제 중 하나가 게르하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게르하르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뭣?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직 어린 청년들이오.”

“…….”

“물론 우리들은 강하오. 오우거 따위가 우리의 위협은 되지 않겠지. 하지만 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법이오.”

“…….”

“……주교님의 뜻인가.”

격한 어조로 실랑이를 벌이던 게르하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참가자들을 향해 외쳤다.

“2차 시험의 내용이 전해졌다. 그대들은 내일, 교단의 병사들과 함께 순례자의 길을 행군할 것이다.”

“뭣? 순례자의 길이라면…….”

“오우거가 나오는 곳이잖아?”

“엄마가 오우거는 사람을 한입에 잡아먹는 괴물이랬는데…….”

게르하르트의 선언에 지원자들은 웅성거렸다.

그래 봤자 아직 어린 청년 혹은 소년들이었다.

오우거라는 말에 몸을 떨었다.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게르하르트가 외쳤다.

“그저 행군을 통해 체력을 시험하고, 실전 경험을 쌓는 것뿐이다! 별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설령 오우거가 나타난다 해도 괜찮다! 교단의 정예병과 기사들, 고위 사제들, 그리고 내가 그대들을 책임지고 지켜낼 것이니!”

“오, 오오.”

“역시 게르하르트 경이야!”

그제야 지원자들은 안심한 눈치였다.

릭은 미묘한 얼굴을 했지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오우거가 나올지도 모르는 곳에 애들을 같이 행군시키는 거?”

“예.”

“진짜 오우거가 앞선 사건의 원흉이었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겠지.”

게르하르트를 포함한 성기사가 다섯에 교단의 병사들. 거기다 고위 사제들까지 지원한다면 오우거 정도는 가뿐히 사냥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위험을 헤쳐나가면 전우애나 동료의식은 금방 자라나니까. 빠르게 전력을 기르고 싶은 교단의 입장에서라면 못할 것도 없다고 보긴 해.”

“하지만…….”

“그래. 원흉이 오우거일 때의 얘기지만.”

이안은 머릿속 기억을 뒤졌다.

이 시기 성도에서 벌어지는 가장 큰 이벤트라 한다면 바로 교단의 신자들끼리 벌이는 내전이다.

각지에서 수상한 낌새들이 목격되다 결국 성도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종막에는 배교자의 존재가 드러나며 그 배교자를 플레이어가 상대하는 게 주요 스토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후반에 악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너무 약해지면 안 되기에,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순례자의 길에서는 딱히 기억할 만한 사건은 없었는데…….’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미 게임과는 다른 변수들이 튀어나오는 걸 숱하게 겪지 않았던가.

‘성도까지의 길을 뚫어준다면, 그걸로 된 거겠지.’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심쩍은 표정을 짓던 릭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네요. 병사가 되려면 행군에 참여해야겠죠. 집에 가서 할아버지께도 말씀드려야겠어요. 너무 걱정 안 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날 밤.

예배당으로 돌아온 애덤에게 릭이 상세히 설명했다.

의외로 애덤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우리 선조께서도 동료들과 함께 순례자의 길을 지나셨단다. 그때 악마에게 물든 사악한 악마 숭배자들이 순례자들을 습격하는 걸 목격하셨지. 선조님과 동료들은 강한 힘으로 악마 숭배자들을 물리쳐 여행자들을 구출하셨단다.”

애덤의 옛날 이야기를 이네스가 정정했다.

[정확히는 순례자들을 구하려 했는데, 그 순례자들도 변장한 악마 숭배자였죠. 미끼였던 거예요. 그때 교단에서 자진해서 따라나선 병사들이 몇 명 따르고 있었는데, 모두 안타깝게 전사하고 말았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네요.’

[이야기란 미화되기 마련이니까요.]

어쨌든 릭은 애덤의 이야기에 감명을 깊게 받은 듯했다.

애덤은 릭의 머리를 자상하게 쓰다듬어주었다.

“너도 좋은 동료들을 만나, 선조님의 경험을 조금이나마 느껴봤으면 좋겠구나.”

“네! 성도에까지 들렀다가 온다고 하니, 꽤 시간이 걸릴지 몰라요! 그동안 건강히 계셔야 해요! 땔감도 아끼지 말고 쓰고요.”

“이놈아. 벌써 봄이다.”

“꽃샘추위란 말도 모르세요?”

“어쨌든 단단히 준비하거라. 괜히 동료들에게 폐 끼치지 말고.”

“그건 이안 님이 도와주기로 했어요!”

원래는 릭보고 직접 짐을 싸보라고 했었다.

직접 부딪혀 보는 게 의미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저히 혼자서는 들기도 힘들어 보이는 빵빵한 배낭을 본 순간, 이안은 도저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애덤이 이안에게 감사를 표했다.

“허허. 아들이 시험에 합격한 것도 그렇고.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아 버렸군요.”

“먼저 은혜를 받았으니, 돌려드린 것뿐입니다.”

“겨우 허름한 방을 내준 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은데…….”

이안은 이네스를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다 돌고 도는 거 아니겠어요. 어쨌든 재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안 님도 내일 떠나실 겁니까?”

“행군에 몰래 따라가게요. 그편이 제일 안전하지 않겠어요?”

교단 사람이 아닌 이안은 행군에 낄 수가 없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몰래 따라가는 것쯤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신경도 좀 쓰이고.’

이번 행군.

안 좋은 예감이 든다.

기왕 릭을 도와주기로 한 거, 성도에 갈 때까지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

다음날.

게르하르트를 이끄는 교단의 병사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대로를 걸었다.

선두에는 게르하르트와 그를 따르는 성기사 넷이 나란히 말을 몰았고, 그 뒤에는 깔끔한 로브를 차려입은 사제들이.

어수룩한 얼굴로 주위 눈치를 보며 걷는 청년들.

그리고 교단의 정예병들 순서로 대열을 이뤘다.

엄청난 인파가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게르하르트 경 만세!”

“신께서 축복하시길!”

“힘내라!”

엄청나게 인기 있는 게르하르트가 교단의 새싹을 이끄는 행사니, 그 반응이 몹시 뜨거웠다.

게르하르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안은 그런 게르하르트를 보며 생각했다.

‘게르하르트. 재수는 없지만, 살아 있으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긴 하지.’

만약 일이 생긴다면, 가능한 선에서 도와줄 용의는 있었다.

성문으로 마지막 병사가 빠져나가자, 환호하던 인파도 해산했다.

이젠 이안도 도시를 뜰 때였다.

‘불쾌한 도시였어요.’

[아마 이안에 대한 선입견은 성도에서 더 심할 거예요.]

‘그것도 있지만, 가끔 시선이 느껴져서요. 한 번쯤은 모습을 드러낼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도시 안에서 공격하는 건 부담스럽나 보네요.’

이안은 자신과 스텔의 로브를 푹 눌러쓴 뒤, 병사들의 뒤를 적당한 거리에서 뒤따랐다.

이안과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몇몇 상단이나 여행자들도 함께하고 있었다.

반나절 정도 걸으니 암석지대의 초입에 다다랐다.

봄이 왔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바위의 이곳저곳에 키 작은 풀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지형이 험해.’

저 멀리 레지스 산맥까지 닿아 있는 바위산이다.

위험한 구간도 많고 포악한 괴수도 많다.

지금은 교단에서 길을 닦고, 주기적으로 순찰을 해 그나마 상황이 나은 편이었다.

먼 과거에는 이 길에서 참으로 많이도 죽었더랬다.

[과거에는 순례자의 길이라는 이름 말고, 천국에 향하는 계단이라고 많이 불렀다고 하네요.]

‘천국이라…… 제가 아는 천국과 같은 개념이겠죠?’

[아마도요. 교단에서 말하는 천국은 아무 고통도, 슬픔도 없이. 선한 사람들이 영원토록 즐겁게 지내는 낙원이에요.]

‘제가 아는 천국이랑 같네요. 그럼 교단 사람들은 전부 천국에 가기 위해 교를 믿는 건가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렇겠죠?]

이안은 멍하니 봄바람을 쐬는 스텔의 어깨를 잡고 한숨을 쉬었다.

스텔은 왜 그러냐는 듯, 고개만 올려 이안을 아래에서 올려다봤다.

‘세상일이 전부 다 단순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이안은 저 멀리 행군하는 이들을 보며 눈을 집중했다.

도시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에, 이제야 월안을 사용해볼 만했다.

저 앞서나가는 사람들도 충분히 많지만…….

‘크윽.’

갑작스럽게 흘러들어 오는 정보량에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안은 재빨리 영혼들을 훑었다.

마음을 정교하게 읽지는 못해도, 간단한 감정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검다. 그리고 긴장하고 있어.’

무언가 안 좋은 의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것도 다른 이들이 아닌 고위 사제들이 그러했다.

음모의 냄새가 났다.

‘역시 뭔가 있는 건가.’

이안은 양손을 벌려 그 위에 호크를 소환했다.

날개를 활짝 펼친 호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최근에 연습을 꾸준히 한 덕에, 호크가 날아갈 수 있는 거리가 크게 는 참이었다.

이안은 호크와 감각을 공유해 하늘에서 바위산을 살폈다.

워낙 그림자도 많고 숨을 곳도 많았기에, 좀 더 꼼꼼히 살펴야 했다.

‘꿍꿍이가 있다면 매복부터 찾아야지…….’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던 이안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이안은 자기가 제대로 본 게 맞나 싶어, 눈을 한번 비빈 뒤 다시 감각을 고유해야 했다.

그러고는 떨떠름한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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