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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18화 (119/222)

118. 성도(3)

이안과 스텔을 맞이한 건 해럴드라는 이름의 사제였다.

해럴드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었는데, 주름 탓인지 아니면 원래 눈이 작은 건지.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도 구분할 수 없는 게 특징이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말하는 어조, 억양 모두 부드러움과 인자함을 자아내어 쉽사리 이안의 경계심을 녹여 버렸다.

실제로 그 영혼 상태가 몹시도 맑기도 했고.

해럴드는 복도를 앞장서서 걸었다.

벌써 해가 졌건만, 벽에 좁은 간격으로 매달린 촛불 덕에 건물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과연.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순례자의 길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게르하르트 경께 이미 얘기를 들었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우리 교단의 식구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해럴드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자세가 어찌나 품위 있던지, 이안은 저도 모르게 마주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맡은 바 일을 다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릭도 이 건물에 있습니까?”

“예. 지금쯤이면 저녁 기도를 드리고 있겠군요. 만나보시겠습니까?”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어차피 같은 건물에 있다면 한 번쯤은 마주치겠죠.”

“아. 그러시다면, 바로 식사와 목욕물을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먼 여정 탓에 분명 지치셨겠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전에, 잠시 스텔 양과 단둘이 대화를 나눠봐도 괜찮을까요?”

“예?”

“저는 긴 세월을 살았고, 믿음을 잃어 방황하던 형제자매들을 많이도 봐 왔습니다. 어쩌면 저와의 대화가 스텔 양의 고민을 해소해 줄 수도 있겠지요.”

“아…….”

기꺼운 제안이다.

스텔이 신성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해보고 싶은 게 지금의 심정이다.

이안은 스텔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이쪽을 올려다보던 스텔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이면 되는데. 갔다 올래?”

스텔은 살짝 머뭇거렸다. 뭔가 불안한지, 이안의 소맷자락을 꾹 잡았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굳힌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럼 사제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허허. 그저 대화만 나누는 겁니다. 너무 그리 기대하지는 말아주십시오.”

해럴드는 이안을 방 앞까지 안내해준 뒤, 스텔을 데리고 사라졌다.

이안은 방문을 열기 전 이네스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조용하시네요. 기분이라도 안 좋으세요?’

[…….성도에 들어선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어요. 마치 벌레가 등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게다가 이 건물에 들어서고 그 느낌이 더 강해졌어요.]

‘위험한 건가요?’

[모르겠어요. 제 감각으로도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엄청 위험한 거겠네요.’

이네스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기운이라.

이안은 조금 긴장한 얼굴로 방문을 열었다.

끼익. 쿵.

이안은 방에 들어선 뒤 굳게 닫았다.

굳이 불은 켜지 않았다.

창문에서 흐릿하게 비쳐 들어오는 달빛만으로도 충분했다.

“후우.”

이안은 작게 심호흡하며 성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방구석에 펼쳐져 있는 그림자를 향해 빠르게 내달렸다.

***

해럴드가 스텔은 안내한 곳은 작은 방이었다.

어렸을 적, 스텔이 갇혀 있었던 독방과 똑같은 생김새였는데 사실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지방의 예배당들은 성도에 있는 건물들을 흔히 모방해 짓곤 했으니.

탁자 위에 은촛대를 내려놓은 해럴드가 반대편에 손짓했다.

어서 앉으라는 뜻이었다.

스텔은 시키는 대로 했다.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하셨지요?”

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럴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좋습니다. 뭐든 문제가 생겼을 때는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되짚는 게 오히려 가장 빠른 법이지요. 자매님의 어떤 이유로 신께 대한 믿음을 가지시는 것입니까?”

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믿음의 이유라니.

사제가 할 말도 아닌 것 같으며, 그런 걸 왜 묻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럴드가 말했다.

“보통 종교를 가지는 이유는 가장 간단하게는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서겠죠? 더 나아가면 꿈을 이루고 싶어서. 부자가 되고 싶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대부분의 평범한 이들은 이런 세속적인 이유로 믿음을 가지고 교단에 헌금을 내지요.”

해럴드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조언을 건네는 노인처럼, 그저 부드럽게. 그저 자상하게 설명했다.

“물론 이러한 이유로 믿음을 가지는 게 결코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제가 되어 신성을 다루게 되려면 그 이상의 이유와 목표가 필요하죠. 내가 왜 이 신성이라는 걸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이 기적 같은 힘으로 무얼 이루어내고 싶은지.”

이유와 목적.

스텔은 그 단어들을 입에서 굴려보았다.

그녀에게는 참으로 낯선 것들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교단에 거두어진 그녀는 지금까지 오로지 시키는 대로만 살아왔다.

여러 사람의 기대와 관심을 받으며, 수많은 사람의 꿈과 열망을 짊어지고, 그저 하라는 대로 하루하루를 태워 나가면 그만.

그 안에는 스텔의 의지도, 감정도, 그 무엇도 없다.

스텔은 고개를 들어 해럴드를 보았다.

그러고는 눈빛만으로 물었다.

해럴드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인지.

용케도 눈빛에 담긴 뜻을 알아챈 해럴드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오래전. 정말로 눈부시고 아름다운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지요. 신께서 만든 이 세상을 그때 봤던 그 광경처럼, 아름답게 만드는 게 제 목표랍니다.”

스텔은 고개를 갸웃했다.

해럴드가 말한 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해럴드는 더 설명해주지 않고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마음속에 강한 심지를 품고 있어야, 시련이 닥쳤을 때 흔들리지 않는 법이랍니다.”

스텔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이해할 순 없었지만, 확실히.

지금의 대화는 스텔의 마음에 무언가 영향을 주었다는 건 명확했다.

***

이안은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향해 주저 없이 검을 휘둘렀다.

평범해 보이던 그림자가 꿈틀거리더니 그곳에서 칼날이 튀어나와 이안의 검을 막아냈다.

깡!

양손에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을 가늠하며, 이안은 다음 일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상대 쪽에서 돌연, 검을 바닥에 버렸다.

“자, 잠깐!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이안은 멈칫했다.

텅 빈 공간의 어둠이 마치 커튼이 열리듯, 양옆으로 갈라지고 그 사이에서 복면을 쓴 이의 모습을 드러냈다.

목소리나 몸의 선을 봤을 때, 여자였다.

이안은 성검의 끝을 상대의 목에 향한 뒤, 차분히 물었다.

“누구야. 암살자냐? 안타깝게 됐네. 마침 스텔이 없는데.”

“아으. 방금 말했잖아요! 적이 아니라고!”

이안은 눈에 집중해 복면인의 영혼을 살폈다.

그녀의 말마따나 적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복면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눈에서 빛이 나와요. 그거 되게 신기하네요. 무슨 마법 같은건가?”

“그래서? 적이 아니라면 왜 몰래 숨어 있는 건데. 그것도 품에 칼을 들고.”

“휴, 흉흉한 세상이잖아요. 칼 한 자루는 들고 다녀야죠. 예. 그나저나 칼솜씨가 대단하시네요. 성기사들중에서도 적수를 찾을…….”

“계속 말 돌릴 거야?”

“아뇨. 예. 죄송합니다. 방금 죽을 뻔했다 생각하니 좀 흥분했네요.”

복면인은 복면의 입 부분만 내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야. 빨리 정체부터 밝혀. 그리고 대화를 하려면 복면도 벗고.”

“그, 그건 죄송합니다. 밝힐 수 없습니다.”

“그래?”

이안이 성검을 들어 올리자 복면인은 양손을 들고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끝내 복면은 벗지 않았다.

“워, 원칙이라서요. 이미 말하지 않게 금제도 걸려 있고. 그저 교단 내부에 종파 중 하나가 스텔님을 보호하기 위해 왔다, 정도로 이해해주시면 안 될까요?”

“사제였다고? 그런 것치고는 사용하는 기적들이나 하는 행색이나 암살자에 가까운데?”

“그, 그건 편견입니다. 꼭 사제라고 갈색 로브를 입고 다니라는 법이 어디 있나요.”

나름 아픈 부분이었던지, 복면인은 울분을 토해냈다.

“게다가 교단이 아직 작았을 때는 숨어서 예배해야 했단 말입니다. 은신과 금제의 기적은 필수였죠. 아시겠어요? 근본과 역사로 따지면 저희만 한 곳이 없어요!”

“아. 그래.”

본인이 믿는 종파에 꽤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어쩐지 점점 상대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 같다고 생각한 이안은 다시 이야기를 되돌렸다.

“게르하르트가 이미 우리를 보호해주겠다 했어. 근데 우리가 너희를 왜 따라가야 하는데.”

“물론, 게르하르트 경은 매우 훌륭한 인물이죠. 저도 개인적으로 흠모하고 있답니다.”

“취향 참 별나군.”

“예?”

“계속해.”

“아, 예. 어쨌든. 게르하르트 경은 훌륭하지만, 당장 스텔 님의 옆에 붙어 호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이 건물 자체는 그리 안전하지 않아요. 당장 저만 해도 이렇게 간단히 들어왔잖아요?”

“그렇…… 긴 하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어왔다는 건 건물의 보안이 그리 단단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저희가 준비한 은신처에 가신다면, 적어도 습격당할 일은 없을 거예요!”

“흠.”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이제 곧 배교자가 일을 벌일 거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당장 이안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성도를 돌며 위험한 일이 벌어질 거라고 외치고 다녀도, 불길한 소리 하지 말라며 감옥에 수감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결국 다시 혼자서 검이나 휘두르며 수련이나 하는 방법밖에 없을 터.

그러면 습격받을 염려가 없는 은신처가 차라리 낫지 않을까?

‘문제는 얘를 신뢰할 수 있냐는 건데.’

적어도 악한 의도는 보이지 않는다.

복면인은 진심으로 스텔을 구해주려 하고 있었다.

‘뒤에서 칼 맞을 일은 없으니까. 만약 은신처에 가봤다가, 시원찮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면 되는 거고.’

이안은 복면인의 제안을 승낙했다.

다가올 사태에 대비해 복면인이 속했다는 종파의 협조를 얻을 수도 있는 거고, 스텔에게 얽혀 있는 복잡한 내막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계산까지 포함해 내린 결정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공교롭게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쿵쿵.

“형제님. 식사를 준비해드릴까요?”

해럴드의 목소리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오늘은 피곤해서 이만 자고 싶어서요.”

“그러시군요. 무언가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시길 바랍니다. 스텔 님도 좋은 밤 되시길 바랍니다.”

“……예.”

해럴드와 스텔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작게 들린 뒤, 문이 스르륵 열었다.

평소처럼 멍한 얼굴로 방에 들어온 스텔이 걸음을 멈췄다.

“어, 상담은 잘했어?”

스텔은 왜인지 살짝 놀란 얼굴로 이안과 복면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뒷걸음질 치며 문을 닫으려 했다.

“어딜 가는 거야.”

“……몰래 모르는 여자 데려왔어.”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이안은 스텔을 잡아당긴 뒤, 방문을 닫았다.

“너를 지키러 온 사람이라더라. 이름은 못 밝힌 데. 엄청 수상쩍지?”

스텔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복면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스, 스텔 님. 예전부터 소문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 이를테면 팬인 거죠. 예.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스텔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안은 그 얼굴에 희미하게 서린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떨떠름함.

확실히, 눈앞의 복면인은 좀 못 미더운 구석이 있었다.

복면인은 미묘한 기류를 읽었는지, 서둘러 방구석에 있던 침대를 잡아당겼다.

드르륵.

침대를 치우고, 나무 바닥을 힘껏 들어 올리자 놀랍게도 그 아래에는 비밀 통로가 있었다.

복면인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흐흐. 저희 종파는 언제 어떤 상황이 와도 대비할 수 있게, 이렇게 모든 건물에 통로를 만들어 놓는답니다.”

“본인들에게 허락은 맡은 거지?”

“당연히 아니죠! 이런 걸 허락해주겠어요?”

“그렇구나…….”

왠지 자랑스러워하는 복면인을 보며 이안은 생각했다.

‘바닥이나 가구에 구멍이나 뚫어대는 게…… 꼭 흰개미 같네. 그런 소리 안 들으려고 옷도 검정색으로 입고 다니나?’

아마도 복면인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기에, 이안은 그저 속으로 말을 삼킬 뿐이었다.

***

다음 날 아침.

해럴드는 식사를 챙겨 이안의 방문을 두드렸다.

“형제님. 일어나셨습니까? 형제님?”

의아하게 여긴 해럴드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방안은 텅 비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급한 일이 있어 떠나게 됐다는 편지가 놓여 있었다.

편지를 읽은 해럴드는 인자하게 웃었다.

“꼭 자기만의 답을 찾아내었으면 좋겠군요. 자매님.”

해럴드는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드넓은 하늘의 서쪽 끝에서, 조금씩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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