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배교자(2)
대열을 이룬 성기사들이 이단을 향해 노도처럼 달려들었다.
그들은 마치 한 몸처럼 달리며, 동시에 기도를 올렸다.
게르하르트를 선두로 쐐기 진형을 달리던 성기사들의 몸에 은은한 빛이 퍼지더니 거대한 창 형상으로 변했다.
이단들은 급하게 장벽을 준비했다.
하지만 넓은 면을 방어하는 장벽.
한곳에 모든 힘을 담아 뚫어내는 창.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는 명확했다.
채캉!
믿음으로 이뤄진 장벽은 단 한 번의 부딪힘에 유리처럼 깨져나갔다.
기세가 오른 성기사들은 거침없이 적을 베어나갔다.
‘역시. 성기사 대 사제면 성기사쪽이 우위인 건가.’
신성 자체는 사제가 더 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기사는 긴 시간을 수련과 전투에 쏟아부은 인간들이다.
전투 경험은 성기사들이 몇 수는 위였다.
이안은 성기사들이 한번 헤집고 지나간 이단의 진형을 파고들어 칼춤을 추었다.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이단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성기사들이 상처를 내는 역할이라면, 그 상처를 후벼 파는 건 이안의 역할이었다.
“막아라!”
“시간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상대도 필사적이다.
설령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단의 사제들은 광신적인 외침과 함께 이안과 성기사들을 붙잡고 늘어졌다.
덕분에 성기사들의 돌파력도 크게 줄어들었다.
속도를 잃은 성기사들은 어쩔 수 없이 말에서 내려야 했다.
성시가들이 속도를 잃자 천사들이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며 비행하기 시작했다.
강력한 성기사의 영혼은 그들에게 실로 탐스러운 먹이였다.
“외관에 속지 마라! 막상 검을 맞대면 그저 그런 적일 뿐이다!”
게르하르트는 빠르게 하강하는 천사의 검을 튕겨내며 외쳤다.
확실히, 위태로운 다리에서 다른 이들을 지키며 싸울 때와 달리.
게르하르트는 본 실력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천사들을 압도해냈다.
이안이 게르하르트의 등에 접근해 같이 천사와 싸우며 말했다.
“제법 싸우네? 다리 위에서는 비실거리더니.”
“하! 그때는 봐준 거였다!”
“하여튼 허세는.”
이안은 벽을 힘껏 걷어차 높이 뛰어오른 뒤, 막 하강하던 천사의 날개를 단칼에 베어 버렸다.
이미 한번 상대해본 터라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늦었어. 도망이라도 친 줄 알았네.”
“도망? 하? 누가? 이 게르하르트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군.”
“그럼 왜 늦은 건데.”
잠깐의 침묵 뒤에 대답이 돌아왔다.
“……혼자서 고민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명확한 답은 안 나왔더군.”
게르하르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미소지었다.
“그래서 그냥 감에 따르기로 했다. 뭐, 부딪혀 보면 알 수 있겠지!”
“좋아. 나는 저 첨탑까지 갈 거야. 따라올 거냐?”
“그 말은 틀렸다.”
게르하르트는 또 하나의 천사를 베어내고 말했다.
“우리가 너를 따라가는 게 아닌, 네가 우리를 따라오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우는 그 자존심과 긍지에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천성을 알아서인지, 얄밉지는 않았다.
이안이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방어부터 준비해.”
“음?”
“쟤네. 레이저 쏘려 한다.”
“레이저가 무슨 뜻…….”
게르하르트는 이안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에서 비행하던 천사들이 그 두 쌍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날개가 빛이 난다.
그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게르하르트도 잘 알았다.
게르하르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방어 준비!”
전투를 벌이던 성기사들이 일제히 게르하르트를 향해 결집했다.
그러고는 동시에 기도를 읊어, 반투명한 천처럼 얇은 장막으로 동료를 덮었다.
이안은 머리 위에 얹힌 부드러운 장막을 매만졌다.
“이건 분명…….”
파아아!
하늘에서 수십 줄기의 광선이 지상을 향해 떨어졌다.
성서에서 경고하는 심판의 날이 이러한 모습일까.
광선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든 걸 파괴할 기세로 지상에 내리꽂혔다.
그중 반수 이상은 밀집된 성기사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이안은 보았다.
광선에 모두가 직격당하기 전. 게르하르트와 성기사들이 몸에 있는 모든 신성을 끌어다 쓰는걸.
그리고 장막과 광선이 부딪혔을 때.
장막은 크게 한번 출렁이더니, 그대로 광선을 왔던 곳으로 그대로 되돌려보냈다.
콰아아아!
순식간에 절반가량의 천사가 격추되었다.
‘받은 공격을 그대로 되돌리다니, 말도 안 되는 효과야. 이게 온 대륙에 퍼진 교단의 저력.’
이안은 다시 검을 잡았다.
천사의 광선에 직격당한 주위는 아수라장이었다.
적들도 설마 자기들한테까지 공격을 할 줄 몰랐던지, 천사들의 광선에 크게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마냥 상황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방금 그 기적으로 성기사들은 신성을 모두 사용하고 말았다.
이제부터 순수 육체 힘과 기량으로만 싸워나가야 한다는 뜻.
하지만 사기를 잃거나 주춤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번 돌격이다 형제들!”
게르하르트의 외침에 성기사들이 다시 달렸다.
이안은 뒤를 살폈다.
다행히도 그 혼란 속에서도 스텔은 아직 무사했다.
‘하긴. 이상한 부분에서 예리하거나 감이 좋았던 느낌이 있으니까.’
스텔과 한번 눈을 맞춰준 이안은 성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태양의 활도. 피에람의 긍지도 지금은 아낀다.’
이안은 검을 휘두르며 냉정히 상황을 판단했다.
아직 배교자와의 전투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
졸개들에게 가로막혀 힘을 허비한다면, 배교자를 상대해 낼 수 없었다.
이곳에서 배교자를 상대할 수 있는 건 아마 이안뿐일 테니까.
그렇게 성기사들과 이안은 거침없이 전진했다.
잇따른 전투로 동료들이 쓰러져갔지만, 주저 없이 걸음을 옮겼다.
격렬한 전투 끝에 이안과 성기사들은 첨탑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안 그래도 드높은 첨탑은 성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져 있었다.
언덕을 따라 쭉 이어진 계단에 발을 올리며 이안은 위쪽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첨탑 위만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쨍한 햇빛이 이 주위만을 비추고, 천사들도 왜인지 이곳에서는 공격해 오지 않았다.
첨탑의 꼭대기에서 솟아 나온 사슬 다발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머리가 더 지끈거려왔다.
‘막아야 한다.’
강렬한 생각이 이안의 머릿속을 채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첨탑 주위에는 이안을 막아서는 세력이 없었다.
이안은 앞장서서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
***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수많은 시련과 희생을 넘어, 결사대는 악마의 군세를 뚫어내고 이곳에 도착했다.
대륙에서 북쪽으로 한참이나 떨어진 악마의 거주지.
‘지옥’
에릭 그린은 지옥에 처음 발을 들여본 감상을 내뱉었다.
“하하. 지랄 맞은 곳이네요.”
그의 말마따나 지옥은 참으로 김묘한 곳이었다.
펄펄 끓는 용암과 유황불. 족히 만년은 넘게 그 자리에 있었을 빙하. 폭풍우와 붉은 번개.
그 모든 것들이 한 장소에 공존했다.
공기도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때로는 독성을 띄었다가, 때로는 공기 그 자체가 사라지기도 했다.
여러모로 사람이 살만한 환경은 아니었다.
로잘리아 피에람은 에릭 그린이 만들어준 보호막 속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적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요. 다행인 걸까요? 아니면 숨어 있다가 기습?”
무뚝뚝한 전사 아타바가 딱딱하게 말했다.
“기습. 없다.”
프리츠 클로딘도 검을 굳게 쥔 채,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바깥에서 연합군이 그만큼 시선을 잘 끌어준다는 거겠죠. 아니면…….”
“대악마께서 혼자서 우리를 맞이하고 싶거나.”
에릭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그 반응에 에릭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왜들 그래요. 기록에서 보면 대악마는 언제나 영웅들을 혼자서 상대해왔어요.”
“자신의 힘에 대한…… 자만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이거나. 뭐. 우리야 좋죠. 악마들이 힘을 합쳐서 동시에 싸우면 인간들은 이길 수 없으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일행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
상대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이다.
그간의 여정을 결사대는 더더욱 강해졌다.
한 명 한 명이 대륙에서는 적수가 없는 초인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까?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악마를 무찌를만한 역량이 갖춰진 걸까?
만약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발을 돌리는 게 옳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결사대의 모두는 너무나 잘 알았다.
이곳에 당도하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그들을 위해 몸을 던졌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실낱같은 희망에 의지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기꺼이 희생했는지 안다면 도망칠 수가 없다.
한참이나 이어진 침묵.
내심 기습이나 매복이 있지 않을까 긴장하던 피에람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하. 그래도 마지막으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은 준다는 건가요? 제법 신사적인 악마네요.”
농담 아닌 농담에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거리던 피에람이 말했다.
“여, 여러분. 그동안 고마웠어요.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즐거웠어요. 이 앞에 어떤 결과가 있든. 저 로잘리아 피에람. 후회 없이 여러분과의 추억을 간직하겠습니다. 영원히.”
붉은 머리 마법사의 말에 동료들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로잘리아는 아무도 대꾸를 하지 않자 얼굴을 붉혔다.
“뭐, 뭔가요. 기껏 속마음을 얘기하는데…….”
“붉은 머리치고는 말을 예쁘게 해서 놀랐다.”
아타바의 말에 로잘리아가 더더욱 얼굴을 붉혔다.
“그렇게 말하면 제가 평소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처럼 들리잖아요!”
“…….”
“왜 갑자기 침묵하는 거야!”
그제야 동료들도 긴장을 풀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프리츠가 로잘리아에 이어서 말했다.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괴로울 때도,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여러분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모두 고마워요.”
“같은 의견이다.”
“뭐야뭐야. 이러니 꼭 죽으러 가는 것 같잖아요.”
에릭 그린이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어조로 말했다.
“추억 얘기는 악마를 후딱 해치우고 주점에서 하자고요. 취기도 없이 다들 부끄러운 소리들을 잘도 하시네.”
“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악마를 무찌르도록 계시를 내려받은 영웅이 있잖아요? 이미 우리가 이긴다는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다고요.”
에릭의 말에 모두의 시선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가장 앞에 서 있으며 아무 말도 없던 이네스가 흠칫 놀라며 눈가를 훔쳤다.
프리츠가 당황해 물었다.
“이네스. 울어?”
“아니. 그냥. 모두가 말하는 걸 들으니 뭔가 가슴속에서 북받쳐 올라서.”
“하여튼. 이네스 님은 늘 마음이 너무 약해서 문제에요.”
“이네스. 너보다 강하다.”
“아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타바 님…….”
이네스는 눈가를 훔쳐내고, 고개를 들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계단이 하늘을 향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악마라 하면 저 깊은 지하에 처박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높은 곳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이네스는 성검을 뽑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랑 함께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자. 가죠. 여정을 마무리 지으러.”
결의를 다진 얼굴을 하며 이네스는 앞장서서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