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배교자(3)
“뭐하나 이안. 어서 움직이지 않고. 게르하르트 경과 성기사들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어서 가야한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사내. 에스테반이 이안을 채근했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이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옆에 선 붉은 머리 소녀, 플로라가 말을 받았다.
“그새 또 존 거야? 하여튼. 수업 시간에도 맨날 졸더니 변한 게 없네.”
“하하! 그렇다면 수업 시간 마다 이안을 쳐다봤다는 건가?”
“그, 그런 거 아니거든요?”
에스테반과 플로라가 티격태격하였다.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이안은 이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방금 전까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는데, 어느새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뭘 흐뭇하게 서 있는 거야 멍청아!”
“아. 미안. 어서 가자.”
“긴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 스콰이어 이안. 대륙을 어지럽히고 평화를 위협하는 거악이 이 계단 아래에 있다. 자신은 있나?”
이안은 성검을 굳게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좋아. 그래야 내 종자라 할 수 있지. 어서 가자. 놈을 무찌르고, 영웅이 되는 거다!”
히히힝!
에스테반의 애마, 레이야드가 힘차게 울부짖었다.
벅차오르는 감정과 강적을 상대한다는 긴장감이 가슴속에서 어우러졌다.
이안은 곧장 계단 아래로 달려 나가려다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런데 에스테반 경.”
“음?”
“저희 셋뿐입니까?”
“셋뿐이라니?”
“아니. 다른 동료가 더 있지 않습니까? 더 있어야 하는데…….”
“하하.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처음부터 이 셋이었지 않나.”
“아.”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에스테반의 말에 이안은 수긍했다.
“그랬었죠. 참. 원래 세 명이었지.”
“혹시 어디 아파? 조금 쉬었다 갈까? 아니면 약이라도 줄까?”
플로라가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안의 안색을 살폈다.
쓴웃음을 지은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피곤해서 그런가 봐. 하지만 괜찮아. 어서 내려가자.”
“응!”
이안과 에스테반. 플로라는 계단 아래를 빠르게 내려갔다.
그 아래서 기다리고 있을 거악을 향해.
마침내 계단의 아래쪽에 도착하자, 드디어 기다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에스테반이 외쳤다.
“제이드! 온 대륙 범죄 조직의 수장! 칼날 형제들의 맏형! 밤의 황제! 죽음을 몰고 다니는 대재앙! 너를 처단하려고 왔다!”
이안에게도 실로 익숙한 얼굴이다.
제이드는 이 세계에 떨어지고 약 10개월. 이안에게 끔찍한 학대와 폭력을 가했던 장본인이었으니까.
‘여정의 마지막 적이, 처음 나를 괴롭히던 놈이라네. 수미상관 죽이네.’
뚱뚱하고 거대한 체구를 가진 제이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맨손, 맨몸이었지만 그 근육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는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뚜둑― 몸을 푼 제이드가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이안. 우리 사이에 쓸데없는 대화는 필요 없겠지. 와라.”
그렇게 외친 제이드의 눈에서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인간이 아닌, 기계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오냐.”
땅을 박찬 이안은 곧바로 성검을 쥐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성검에는 찬란하게 화려한 검광이 덧씌워져 있었다.
제이드도 솥뚜껑만 한 주먹을 앞세운 채, 이쪽을 향해 쿵쿵 달려들었다.
빠르게 달려나간 둘은 그대로 중간 지점에서 교차했다.
그 뒤로 둘은 우뚝 멈춰 섰다.
이안은 성검을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핏!
제이드의 몸에 붉은 실선이 여러 개 생겨나더니, 그대로 피를 분수처럼 쏟아내며 바닥에 허물어졌다.
에스테반이 외쳤다.
“대단해! 대단하다 스콰이어 이안! 그 제이든을 단칼에 처치하다니!”
“대륙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다니…….”
“스콰이어 이안! 이제 너는 부자야! 너를 위해 지어진 궁전에서, 수백 명의 시중을 받으며 놀고 먹고, 아무 근심 없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다!”
“근심 없는 편안한 삶이라…….”
세상 모두의 염원 아닌가.
이안 역시 간절하게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멍하니 중얼거리는 이안에게 플로라가 다가왔다.
플로라는 걱정스럽게 이안의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괜찮아? 다친 데 없어?”
“그래. 멀쩡해.”
“그 제이든이니까. 알게 모르게 상처가 남아 있을 수도 있어. 일단 사제를…… 아니. 일단 약부터 바르자.”
플로라는 연고약을 꺼내, 상처 없이 멀쩡한 살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그 정수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이안은 고개를 들어 에스테반을 보았다.
에스테반은 여전히 이후에 누릴 부귀영화와 행복한 삶에 대해 떠들어대고 있었다.
“행복한 삶이라…… 제법 아픈 곳을 찌르네.”
“응? 뭐라고 했어?”
“두 가지.”
이안은 검지와 중지를 펼쳤다.
“하나는, 에스테반 경이 저렇게 부자니 편안한 삶이니 말할 사람이 아니라는 거.”
“뭐?”
“둘. 플로라는 이렇게 친절하지 않아. 더 싸가지가 없어야지.”
“무슨 짓을…….”
이안은 성검을 들어서 발등을 힘껏 찍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주위 풍경이 변해 있었다.
“미치겠구만.”
이안은 분명 게르하르트와 함께 계단의 거의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계단의 가장 아래다.
어느새 배교자의 정신 간섭에 의해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께 올라갔던 성기사들이 모두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행복에 겨운 표정.
이안은 몸을 흔들거나, 뺨을 때려보기도 했지만 일어나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었다.
“헙! 누, 누구냐!”
화들짝 놀란 게르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는…….”
“좋은 꿈이라도 꿨나 봐?”
“……그렇군. 역시 그런 거였나.”
쓸쓸하게 중얼거린 게르하르트가 말했다.
“오랜만에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와 만났다. 동생과 할아버지도. 사실 환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깨어나고 싶지 않더군.”
“괜히 깨웠나?”
“아니. 고맙다. 마음의 약점을 이렇게 찌르고 들어오다니, 실로 무서운 적이다. 이안. 다시 가자. 아무래도 우리 둘뿐인 것 같군.”
배교자는 사람의 마음속 가장 나약한 곳을 찔러 들어온다.
설령 초인의 경지에 오른 전사라도 마음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배교자는 까다롭다.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하군. 환상을 빠져나온 아쉬움이 쉽게 안 사라져.’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마음을 꽉 붙잡아야 할 것이다.
영원히 계단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안과 게르하르트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오를수록 머리에 전해지는 지끈거림은 심해져,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게 위에서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힘겹게 오르던 이안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스텔은…….’
스텔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기절해 쓰러져 있는 건가?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오히려 이안을 따라오지 않는 게 스텔에게는 더 안전할 테니 말이다.
이안은 마침내 계단을 전부 올라, 첨탑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첨탑은 몹시도 고요했다.
마치 주위에 일어나는 사건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쪽으로.”
굳은 얼굴을 한 게르하르트가 이안을 안내했다.
경건한 분위기의 복도를 지나니 거대한 홀이 나왔다.
원형의 홀에 가장자리에는 수백 명의 사제들이 균일한 간격을 두고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눈을 감고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서 뻗어 나온 사슬은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 대규모의 의식을 주도하는 이는 홀의 중앙에 서 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하얗게 새어 버린 머리.
게르하르트가 중얼거렸다.
“해럴드…….”
“아. 게르하르트 경과 이안 님이 오셨군요.”
“내가 아는 해럴드는 이런 짓을 할 위인이 아니다. 네 진짜 정체를 밝혀라.”
이를 악문 게르하르트가 검 끝으로 해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숨길 생각도 없는지, 해럴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해럴드는 이미 수십 년 전에 병으로 목숨을 잃었었죠. 저는 그 가죽을 뒤집어썼을 뿐이고요.”
“정체를 밝히라고!”
씨익 웃은 해럴드의 얼굴이 녹아내렸다.
뼈마디가 뒤틀리고, 근육이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세상에.”
게르하르트는 바뀐 해럴드의 모습에 경악했다.
소년처럼 반짝이는 녹색 눈동자에 탐스러운 은발 머리.
릭 그린과 꼭 닮은 청년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참으로 죄 많은 신자, 에릭 그린이라 합니다.”
게르하르트와 더불어 이안의 눈도 크게 뜨였다.
에릭 그린이라 하면 이네스의 옛 동료가 아닌가.
‘그렇다면 배교자가…… 에릭 그린이라고?’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
악마를 무찔러 대륙을 구한 결사대의 일원이 이런 짓을 벌이다니.
‘이네…….’
무심코 이네스를 찾으려던 이안이 멈칫했다.
차라리 이네스가 없는 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만약 이네스가 이 광경을 봤다면, 매우 슬퍼했을 테니까.
배교자는 마치 짓궂은 장난이라도 성공한 소년 같은 표정을 지었다.
“많이 놀라신듯하군요.”
“성자께서는 어째서 이런 짓을!”
“이해해주시길. 결코 나쁜 뜻으로 이러는 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꼴이 다 뭡니까! 사제님들은! 천사들은! 그리고 이 사슬은!”
게르하르트의 반응은 격했다.
평생을 존경해온 인물을 이런 식으로 만났으니, 그럴 수밖에.
배교자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말했다.
“천국을 떨어트리려는 겁니다. 오만하게 저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들을 말입니다. 정작 숭배받고 찬양받아야 할 이는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눈감아주실 수는 없을까요? 당신들과는 별로 싸우고 싶지 않군요.”
에릭 그린과 이안의 두 눈이 마주쳤다.
이안은 에릭 그린의 영혼을 살폈다.
강대하고 찬란한 영혼이었다.
게다가 순수하다.
그 신실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악마에게 물든 게 아니라 진짜 신성력을 사용했다는 건가.”
아까 보았던 환상도 전부 에릭 그린의 신성으로 일궈낸 기적이라는 소리.
이 무슨 비틀린 형태의 신앙인가.
이안은 성검을 뽑아 자세를 잡았다.
배교자는 가만 놔둬서는 안 된다.
애초에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요. 그 검. 성검이죠?”
에릭 그린이 성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질문했다기보다는 아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에 가까운 어조였다.
듣던 게르하르트는 이번에도 경악했다.
“서, 성검이라고?”
“겉보기에는 투박하지만 익숙한 분위기를 풍기는군요. 다만, 완전한 상태는 아니에요. 저한테는 실로 다행스럽게도 말이죠.”
이안은 에릭 그린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
직접 마주한 에릭 그린이 뿜어내는 압박감에 몸이 저릿저릿했다.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온 저 괴물은 분명 다른 의미로 초인의 영역에 들어있었다.
검과 무기를 휘두르는 초인이 아닌, 고강한 정신을 가진 초인.
이네스의 도움 없이 저런 강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 무조건.’
이네스가 없어졌다고 이네스의 가르침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분명 이네스는 다른 형태로나마 이안을 지탱해주고 있다.
성검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이 이안의 자신감과 의지를 되찾아주었다.
“좋아요. 그럼 이번 세대를 이끌어갈 영웅의 실력을 좀 엿보도록 하죠.”
에릭 그린은 두 손을 깍지를 껴 이마에 댄 뒤, 눈을 감고 기도를 올렸다.
눈에 보일 정도로 막강한 신성이 에릭 그린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신성에 이끌리듯.
무언가가 첨탑의 문을 부수고 날아들었다.
쾅!
잔해와 먼지가 걷히자 눈에 들어온 건 네 쌍의 날개를 찬란하게 펼친 거대한 천사.
손에 번개가 번쩍이는 삼지창을 들고 숨 막힐 듯 밝은 신성을 뿜어내는 천사들의 대장.
천사장이 지상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