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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32화 (133/222)

132. 피에람(2)

이안은 플로라에게 찾아간다고 미리 편지를 보내두었다.

혹시라도 운 나쁘게 길이 엇갈린다면, 계획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아마 집에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2주간의 마차 여행 끝에 이안과 스텔은 피에람의 영지 근처까지 다다랐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거리는 한참이나 남았다.

그만큼 피에람 가문은 넓은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날씨 한번 죽이는구나.’

이안은 한가롭게 마차를 몰며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이 2주간의 여행은 정말이지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넉넉한 돈과 식량.

바닥이 푹신한 마차.

도적 같은 건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가끔 튀어나오는 괴수들도 이안이 적당히 큰 소리를 내면 꼬리를 말고 도망치기 일쑤였다.

늘 고생만 해오던 이안에게는 마치 봄 소풍이나 나들이라도 나온 듯, 느긋한 시간이었다.

‘이런 게 바로 럭셔리 여행인가.’

정말이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이번 여행만 같았으면 더 바랄 게 없는 이안이었다.

이안은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생각했다.

‘피에람이라…….’

스텔을 동료로 영입한 덕에 파티의 방어력과 안정도는 눈에 띄게 늘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바로 화력이다.

게임의 후반부로 갈수록, 적들은 더 많아지고, 강해지고, 단단해진다.

끝없이 몰려오는 악마의 군세는 상대로 정직하게 검만 휘둘러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최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플로라를 영입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문제는 플로라가 영 불안정하단 말이지.’

화염을 다루는 마법사는 모두 마음속에 불꽃을 품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마법사에 비해 화염 마법사들은 쉽게 냉정을 잃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 강력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전장에서 활약하는 화염 마법사들이 적은 이유였다.

대륙 최고의 화염 마법사 가문인 피에람도 그 점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당장 게임에서는 플로라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으면, 플로라가 악에 타락해버리고 만다.

타락해 플레이어의 적이 되어 버린 플로라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존재다.

‘그래도 코르디스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한 것 같으니, 아직은 괜찮겠지.’

하지만 맘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피에람의 저택 아래에는 악마가 산다.

그 악마를 죽이기 전까지, 이안은 안심할 수 없었다.

***

피에람은 축복받은 땅이었다.

우뚝 솟은 오스트 화산 주위로 펼쳐진 비옥한 토지에서는 매년 풍부한 작물이 재배되고, 레지스 산맥까지 닿는 카란 산에는 철광산이 있다.

북쪽에는 마법사들의 연구 기관인 마탑이. 남쪽을 지나는 호른 강에는 석회질이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깨끗한 물이 흐른다.

이 누구나 탐낼만한 땅은 심지어 오랜 기간 전쟁 없이 평화를 누렸다.

이웃 영지 간의 분쟁은 수백 년 전이 마지막으로, 당대 피에람의 가주가 직접 상대측의 영주성을 불바다로 만든 이후.

그 누구도 피에람을 건들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일까?

피에람의 주민들에게는 여유와 느긋함이 있었다.

호감을 주기 힘든 인상의 이안을 보고도 넉살 좋게 말을 걸어올 정도로 말이다.

“오우. 마차 멋있는데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영지의 변방.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양치기가 심심했는데 마침 잘 됐다는 듯, 마차를 몰던 이안에게 말을 걸었다.

악의 없는 질문에 이안도 순순히 답했다.

“피에람으로 갑니다.”

피에람으로 간다.

즉, 영주성이 있는 도시로 간다는 뜻이었다.

양치기가 사과를 와삭― 베어 물며 말했다.

“오오. 역시 사람은 피에람으로 가야죠. 혹시 피에람에 한번 가보셨습니까?”

“이번이 초행입니다.”

“헤헤. 그럼 아마 깜짝 놀랄 겁니다. 세상 아래 그렇게 사람 많은 도시는 없을 거예요!”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성도며 대초원이면 이곳저곳을 둘러봤던 이안이다.

아무리 피에람이 번화해도 그래 봤자 성도와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굳이 양치기의 자부심을 깨트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예입! 기대해도 좋아요! 그나저나 혹시 상인이십니까?”

“그런 셈이죠.”

“그럼 제가 겸사겸사 캐 놓은 버섯이 있는데, 좀 사시겠습니까? 수프에 끓여 먹으면 기가 막힐 겁니다.”

이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말 건 건 이거 때문이었나.’

잠깐 흥미를 보이던 스텔도 이내 다시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 이안과 스텔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양치기는 태평하게 말했다.

“그나저나 부럽네요. 이런 미인 아내분이랑 같이 상행도 다니시고! 사장님이 엄청 능력 있는 분이신가 봅니다!”

‘아. 부부처럼 보일 수도 있는 건가.’

양치기의 눈에 보이는 아부에 이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하려 했다.

“아, 버섯은 괜찮…….”

“살게.”

“응?”

어느새 다시 고개를 돌린 스텔이 양치기에게 돈을 건넸다.

양치기는 기분 좋은 얼굴로 버섯 꾸러미를 내밀었다.

“역시! 미인이시라 그런지 통이 크십니다!”

“…….”

스텔은 말없이 버섯 꾸러미를 받았다.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한 눈동자가 왜인지 조금은 기뻐 보였다.

이안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래 뭐. 산지에서 직접 공수한 식재료가 신선하긴 하지.”

“헤헤. 마을로 가시는 거죠? 안 그래도 저도 오랜만에 마을에 가는데, 그동안 같이 말동무나 하시죠! 피에람에 대해 궁금하신 게 있다면 모두 물어보세요!”

한 몫 건졌다는 생각에 들뜬 양치기가 마차와 속도를 맞췄다.

이안에게도 나쁠 건 없었다.

스텔과 단둘이 하는 여행은 아무래도 심심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양치기는 쉴새 없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말로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보라 해놓고, 정작 이안이 질문할 틈은 주지 않았다.

애초에 그냥 자기가 심심해서 동행했던 모양이다.

그런 양치기의 수다를 들으며 나아가기를 잠시.

웬 건물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음?’

이곳저곳에 허물어진 벽은 이곳에 한때 성벽이 있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이안은 폐허를 살피며 양치기에게 물었다.

“이게 다 뭡니까. 유적? 고성의 흔적?”

“아…… 이곳 말입니까? 십몇 년 전만 해도 마을이 하나 있던 곳이었습니다.”

양치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흥미가 생긴 이안은 잔해들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성벽 대부분은 처참히 무너졌지만, 개중에는 그나마 멀쩡한 부분도 있었다.

그런 성벽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검 자국?’

검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검이라기에는 절단면이 비정상적으로 깔끔했다.

‘아. 검광으로 베었구나.’

단단한 성벽을 이리 깔끔하게 자르려면, 그 수밖에는 없었다.

이안이 물었다.

“무언가 큰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죠?”

“아, 예. 저도 전해 들은 얘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거대한 대검을 휘두르는 흑기사가 이곳에 왔었다고 합니다.”

“흑기사라…….”

예상치 못한 이름에 이안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흑기사라는 이름하면 떠오르는 건 하나다.

게임에서 후반부에 플레이어의 앞에 나타나는 강적.

그런 괴물이 등장했다면 이렇게 쑥대밭이 되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궁금한 건 흑기사가 누구랑 싸웠느냐다.

그에 대해 이안이 물으니 양치기는 기억을 더듬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흠. 잘은 모르지만 황실의 기사님들이라고 들었는데요. 이름이 분명…… 강철이었나?”

“강철기사단이요?”

“예! 그랬던 것 같아요.”

강철기사단은 대륙 제일의 기사단이자 황태자를 지지하는 세력. 그리고 한때 에스테반이 속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 기사단과 흑기사가 맞붙었으니, 이렇게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전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상은 가지만 이안은 굳이 물었다.

“뭐. 사실 저도 잘 모릅니다. 직접 싸움을 봤다는 사람은 없어서리. 그래도 몇몇 살아남은 기사분들을 마을 주민들이 간호했다 하니, 아마 기사분들이 진 거 아닐까요?”

“그렇군요.”

이안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흑기사와 강철 기사단에 관한 비화는 분명 흥미롭지만, 굳이 더 조사하지는 않기로 했다.

당장 신경 쓸 부분은 플로라에 대한 부분이니까.

양치기는 계속해서 주저리 떠들었다.

“그날 이후 이 성은 쭉 버려진 채죠. 살던 주민들도 전부 죽거나 도망가고. 굳이 재건하기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나 뭐라…… 히익!”

갑자기 양치기가 뒤로 물러서며 몽둥이를 꼬나쥐었다.

양치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화염에 둘러싸인 커다란 도마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새, 샐러맨더입니다! 병사! 아니, 기사님을 불러야 해요!”

양치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평소 짐승을 상대할 일이 많은 양치기의 반응을 보면, 이곳에서 샐러맨더는 퍽 위험한 괴수 취급을 받는 모양이었다.

‘확실히. 좀 크긴 하네. 한입에 사람도 잡아먹겠어.’

파충류 특유의 세로 눈이 이안과 스텔, 그리고 양치기를 살폈다.

아무래도 양치기가 모는 양 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 같았다.

낼름.

샐러맨더가 혀를 내뻗었다 집어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겁먹은 양치기가 울 듯한 얼굴로 외쳤다.

“새, 샐러맨더는 다리가 여섯 개예요! 더럽게 빨라서 도망도 못가요! 젠장! 운도 지지리 없지! 왜 하필 이런 걸 만나는 거야!”

“진정해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흐윽,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진정해요.”

“……딸꾹.”

호들갑을 떨던 양치기는 이안의 힘이 실린 목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이안은 양치기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앞으로 나섰다.

샐러맨더는 그런 이안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봤다.

“쿠릅.”

샐러맨더가 혓바닥으로 입가를 낼름 핥았다.

마치 뱀처럼 끝부분이 두 갈래로 나뉜 혓바닥이었다.

아직 거리가 있던 그때, 이안은 느닷없이 땅을 박찼다.

파악!

집중하지 않던 샐러맨더는 순간적으로 이안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그만큼 이안의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샐러맨더가 다시 이안을 눈에 담았을 때, 이안은 이미 코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캬아아아!”

분노한 샐러맨더가 아가리를 쩍하고 벌리며 제자리를 빙글 돌았다.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소용돌이 모양으로 주위에 퍼져나갔다.

사냥감이 불꽃을 피하지 못하게 만드는 샐러맨더의 사냥법이었다.

불꽃이 이안에게 들이쳤다.

하지만 이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파앗!

은은한 빛을 내뿜는 방벽이 어느새 이안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스텔의 방벽을 뚫어내기에는 샐러맨더의 불꽃은 충분히 뜨겁지 못했다.

이안은 그대로 샐러맨더에게 쇄도했다.

뒤늦게 샐러맨더가 불타는 혓바닥을 채찍처럼 휘둘러 이안을 후려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이 더 빨랐다.

성검이 한번 번뜩였다.

다가오던 혓바닥이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철푸덕.

뒤이어 샐러맨더의 머리가 한 박자 느리게 바닥에 떨어졌다.

너무나 깔끔한 일격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구만.”

샐러맨더의 시체는 이내 불에 타 공기 중에 흩날렸다.

뒤에서 지켜보던 양치기는 샐러맨더가 사라진 걸 몇 번이고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더니…… 그나저나 솜씨가 대단합니다. 상인이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요즘은 상인도 자기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지요.”

“과연! 근데 아내분은 무슨 하얀 빛무리를 다루시던데…….”

“요즘 상인은 다 그 정도 합니다.”

“그, 그런가요?”

양치기가 어수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애초에 신성이 뭔지도 모르는 순박한 사람이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도 양치기는 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저렇게 큰 샐러맨더는 처음 봅니다. 무슨 사람 하나는 꿀꺽 삼킬 것 같은 게 이 주위에 돌아다니는지.”

이안도 동의했다.

‘확실히. 크긴 크더라고요. 일반 주민이 만났으면 뼈도 못 추렸겠어요.’

[샐러맨더는 여건만 갖춰지면 엄청 크게 자라니까요. 그래서 드래곤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종종 있어요.]

커다란 몸집이나 입에서 불을 뿜는 점이나, 확실히 그런 오해를 사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게 영지에 돌아다니는 걸 보면, 마냥 축복받은 땅은 아니라는 건가.’

그렇게 태평한 생각을 하던 이안은 문득, 양치기의 표정이 어두운 걸 알아챘다.

이안이 물었다.

“혹시 어디 아프십니까? 방금 샐러맨더의 불꽃에 맞았다거나.”

“아, 아뇨. 그냥 걱정이 들어서요.”

“걱정이요?”

“예.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는데, 저런 괴물이 이 주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면…… 뭐. 쓸데없는 걱정인 거겠죠!”

마지막에는 억지로 밝게 말했지만, 양치기의 눈에서는 걱정하는 기색이 팍팍 묻어나왔다.

대충 사정을 짐작한 이안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걱정되면 어서 가보죠.”

“아, 예!”

이안과 스텔. 그리고 양치기는 마을을 향해 움직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양치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이동하길 잠시.

야트막한 언덕이 나오자 양치기가 앞으로 달려나갔다.

“언덕만 넘으면 마을이 보일 거예요!”

양치기는 언덕 위에 올라 마을을 살폈다.

“아아…….”

양치기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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