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피에람(3)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아, 안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양치기가 손에 든 지팡이마저 내팽개치고 마을을 향해 뛰어갔다.
이안과 스텔도 마차에서 내려 그 뒤를 따랐다.
양치기는 뜨거운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구 있어요? 제가 도우러 왔어요! 대답해주세요!”
양치기의 애타는 외침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타는 집들 사이를 미친 듯이 걷던 양치기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새까맣게 타버린 주민의 시체였다.
“저, 정신 차리세요! 이, 일단 불부터…….”
이미 죽은 게 확실하건만.
양치기는 윗옷을 벗어 시체에 남아있는 불을 털어내려 했다.
그런 양치기의 머리 위로 건물 하나가 기우뚱 넘어지려 했다.
급히 달려나간 이안은 양치기의 옷을 잡아당겨 뒤로 빼냈다.
쿠구궁!
양치기가 서 있던 자리에 건물이 무너졌다.
자욱한 먼지와 매캐한 연기가 얼굴에 훅 불어닥쳤다.
“아, 아으…….”
완전히 넋을 잃은듯한 양치기에게 이안이 말했다.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나가죠.”
“하,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주변의 기척을 확인했어요.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어요.”
“어떻…….”
그걸 어떻게 아냐? 라고 물으려던 양치기는 입을 다물었다.
이안의 말에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양치기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과 양치기가 뒤로 물러서려 하던 그때.
멍하니 보던 스텔이 이안에게 물었다.
“불. 곤란해?”
스텔은 불타는 마을을 보며 얘기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안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아니. 당연히 불 옆에 있으면 뜨겁지.”
“알았어.”
“……뭐가 알았다는 거야.”
스텔은 대답 대신 교단의 상징을 손에 들었다.
상징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하다, 빛무리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하늘로 솟구친 빛무리는 잘게 부스러지더니, 땅을 향해 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이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치유의 비…….”
이 화려한 기적은 겉보기에만 비처럼 보일 뿐 진짜 비는 아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비에 닿은 불꽃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이안이 놀란 얼굴로 스텔에게 물었다.
“……이런 기적은 또 언제 배운 거야?”
“방금.”
“방금? 방금 떠올려서 기적을 배웠다고?”
스텔은 무감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듯했다.
황당해진 이안이 물었다.
“그보다 왜 저 비에 닿으면 불이 꺼지는 건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그냥.”
이안은 ‘그냥’이라는 말 뒤에 따라올 설명을 기다렸다.
하지만 스텔은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제야 이안은 스텔이 말 그대로 ‘그냥’ 해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신성이 다른 마법이나 정령술에 비해 범용성이 높다고 하지만…….’
새삼 스텔의 말도 안 되는 재능이 실감이 났다.
그렇게 마을에 붙은 불은 모두 진압되었다.
처참한 광경에 양치기는 눈물을 글썽였다.
“샐러맨더. 분명 샐러맨더가 마을을 덮친 거예요. 빌어먹을 자식!”
“흠.”
확실히.
앞서 상대했던 샐러맨더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정도 마을쯤을 능히 쑥대밭으로 만들고도 남았다.
기사나 마법사가 아니었다면, 불꽃을 내뿜는 도마뱀에게는 저항조차 힘들고 말이다.
하지만 영 찜찜한 부분도 있었다.
‘왜 시체가 남아있었을까요? 그 덩치를 생각하면 남겼을 것 같지는 않은데.’
양 냄새에 이끌려 이안 일행을 습격하기까지 했던 샐러맨더다.
배가 불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괴수 중에 지능이 높은 개체는 재미로 사람을 사냥하기도 해요. 이 경우에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이 남았지만, 지금으로선 역시 샐러맨더가 벌인 짓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마음을 추스른 양치기가 힘없이 말했다.
“도시에 가서 상황을 알려야겠네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여러분이 샐러맨더를 퇴치해주셔서. 마을 사람들도 안심하고 하늘로 떠났을 거예요.”
허망한 표정의 양치기에게 이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요즘 플로라는 기분이 좋다.
틱틱대기 일쑤였던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조금 게을리하던 수련도 다시 신경 썼다.
오랜만에 이안은 만났는데, 실력이 별로 안 늘었다고 놀림 받으면 몹시 열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 있으면 성인식이다.
성인식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피에람 가문답게 매우 특별할 것이다.
플로라는 최고의 실력으로 성인식을 치러내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꿈이 있었으니까.
대륙에 자기 이름을 퍼트려 가문의 이름을 드높인다는 꿈이.
언젠가는 그 대단한 로잘리아 피에람에게까지 이르는 게 플로라의 원대한 포부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성인식도 완벽하게 치러낼 필요가 있었다.
“흡!”
가문의 수련장에서 플로라는 수련에 매진했다.
플로라가 한번 손짓하자 완벽한 구체 형태의 불덩이가 허공에 맴돌았다.
플로라는 한 번 더 손짓했다.
그러자 불덩이는 4등분으로 나뉘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동작을 반복해 불덩이를 점점 쪼개나갔다.
처음에는 사람 머리만 한 불덩이가 나중에는 모레 알갱이만 하게 줄어들었다.
플로라는 수천 조각으로 나뉜 불꽃을 몸 주위에 회전시켰다.
마치 붉은색 꽃가루가 흩날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역시 어려워.’
불꽃은 그 크기가 작을수록 사그라들기 쉽다.
이런 식으로 작은 불꽃들을 다루는 건 단순히 힘뿐만 아니라, 대단한 섬세함을 요구했다.
게다가 화염 마법은 사용할수록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지는 특성이 있다.
가슴 속 한구석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 기분.
하지만 플로라는 식은땀을 흘려대면서도 불꽃의 제어를 놓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답답하다고 금방 불꽃을 부풀렸을 걸 생각하면 확연한 변화였다.
그렇게 한참을 몰입해 수련하다 보니, 어느새 늦은 시각이 되어버렸다.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묘한 뿌듯함과 개운함을 느끼며 플로라는 수련장을 나섰다.
자그마한 불덩이를 앞세워 복도를 걷던 플로라는 문득, 땀을 많이 흘렸다는 걸 알아챘다.
‘음. 찝찝해. 이대로 자면 냄새도 날 것 같고.’
귀족 영애 플로라는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그대로 몸을 돌린 플로라는 욕실로 향했다.
사용인들에게 목욕물을 부탁해도 되지만, 곤히 자고 있을 그들을 굳이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이 또한 변화였다.
예전 같았다면 귀족에게 부림받는 것 자체가 평민에게는 영광이라 생각했을 테니 말이다.
제법 온순해진 그녀의 성격 탓에, 저택이 사용인들도 최근 플로라를 친근하게 대해오고 있었다.
그녀 또한 그러한 사용인들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달빛이 이쁘네…… 어?’
플로라는 복도를 거닐며 창밖을 보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가 안뜰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침입자? 아니, 이렇게 조용히 들어오는 건 불가능해.’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피에람이다.
그런 피에람의 대저택에는 황궁 못지않게 마법적인 방비가 잘 되어 있었다.
설령 초인이라 해도 이렇게 조용히 침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용인 한 명이 밖으로 나가는 건가?’
들은 적이 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새벽에 밀담을 가진다는 이야기.
“흠흠.”
괜스레 헛기침한 플로라는 멀어지는 괴한의 뒷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왜인지 그 뒷모습이 익숙한 것이, 보다 보면 누군지 알 것도 같았다.
“……!”
멀어지던 괴한이 뒤통수가 간질거렸는지, 휙 뒤를 돌아보았다.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몸을 숨겼다.
잠시 저택 쪽을 살피던 괴한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플로라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빠?”
잘못 보기엔 달이 너무나 밝았다.
안뜰 가로지르던 괴한은 분명 로드릭 피에람이었다.
‘이 시간에 왜…….’
의아해하던 플로라는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이 늦은 시각에 로드릭이 어딜 가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직접 눈으로 보면 될 일이다.
***
“마을 전체가 샐러맨더한테 불타버렸다 이 말이지? 흐음.”
“미, 믿기지 않을 수 있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집채만 한 샐러맨더를 제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에 도착한 이안 일행은 곧장 경비대에게 가 사정을 설명했다.
경비대원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최근 들어 샐러맨더의 피해가 눈에 띄게 늘고 있긴 한데 말이지. 근데 집채만 한 샐러맨더라니. 말이 돼?”
“말은 되지.”
선임으로 보이는 경비대원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런 괴물한테서 도망쳤다는 건 썩 믿기 힘든데?”
“여, 여기 뒤에 두 분이 퇴치해주셨습니다.”
“심지어 그냥 도망친 것도 아니고 퇴치를 해버렸다라? 아무래도 깊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군.”
의심이 빛이 더욱 진해졌다.
선임 경비병이 은근슬쩍 뒤쪽으로 이동해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이안이 재빨리 스텔에게 말했다.
“경비병분들이 조금 지치신 것 같은데, 피로 좀 풀어드려.”
“응.”
고개를 끄덕인 스텔은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꼭 쥔 양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경비병들을 감싸 안았다.
처음에는 당황하던 경비병들은 이내 피로가 멀끔히 가신 걸 느끼고는 표정을 싹 바꿨다.
“이거 몰라뵙습니다. 교단의 사제님이셨군요.”
“네? 사, 상인이 아니었나요?”
놀라는 양치기에게 경비병이 면박을 주었다.
“이 사람아. 세상에 신성을 다루는 상인이 어딨어.”
“신성이요? 그게 뭔데요?”
“모르면 됐어.”
양치기를 무시한 경비병들은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마을에 사람을 보내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샐러맨더를 처리해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경비병은 하루 정도만 기다리면 보상금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돈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지 교단에서 뜯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경비대를 나선 이후, 양치기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했습니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의 여행을 신께서 가호하시기를…….”
“당신도요.”
고개를 푹 숙이고 멀어져가는 그 등이 몹시 쓸쓸했다.
아마 불타버린 마을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영 마음이 안 좋았지만 이안이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이네스도 양치기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저 순박한 청년이 아픔을 딛고 일어섰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그렇게 하룻밤을 도시에서 하룻밤을 머무른 스텔과 이안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피에람까지는 약 1주일은 더 가야 했다.
사흘 동안 이안과 스텔은 크고 작은 마을을 하나씩 거쳤는데, 두 마을 모두 갑자기 늘어난 샐러맨더의 숫자에 걱정하고 있었다.
샐러맨더는 주로 화산에 서식하는 괴수다.
그런 괴수들이 이곳까지 내려왔다면, 오스트 화산에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게 주민들의 의견이었다.
‘화산이라…….’
일전에 거대한 샐러맨더를 마주친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던 것일까.
이안에게는 대충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빨리 피에람으로 가야겠어.’
이안은 마을에서 하루를 묵지 않고 바로 다음 마을로 향했다.
지도대로라면 조금만 서두르면 늦은 밤쯤에는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여름의 초입이라 해가 길었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은 부지런히 평지를 달렸다.
스텔이 신성으로 밝힌 빛 덕분에 밤길에도 움직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곧, 스텔의 기적이 필요 없어도 될 정도로 사위가 환해졌다.
이안은 말을 멈춘 뒤, 마차에서 내렸다.
저 멀리에서 마을이 활활 타오르고, 주민들의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샐러맨더 따위가 아니었다.
괴한이 마을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런 씨…….”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은 이안이 성검을 뽑으며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