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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0화 (141/222)

140. 피에람(10)

“이네스! 이네스! 이네스―! 그래. 너한테서 나는 그 역겨운 냄새! 그년의 냄새와 닮아 있어!”

이네스의 이름을 듣자, 로잘리아의 눈빛이 광기가 흘렀다.

“대체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지? 분명 그 존재가 영원히 지워졌을 텐데! 설마 아직 살아있나? 말도 안 돼!”

생각보다도 더 격한 반응에 이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데. 혹시 둘이 사이가 안 좋았나요? 엄청 싫어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짙은 적의를 느껴본 건 처음이었다.

로잘리아는 이네스를 증오하고 있었다.

이네스 역시 크게 당황했다.

[그럴 리가요. 저랑 로잘리아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어요. 서로의 비밀이나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영웅으로 선택받은 이네스와 결사대에 합류한 로잘리아.

유일한 동성 친구였던 둘의 관계는 다른 결사대원보다 더 각별했다.

적어도 이네스의 생각으로는.

[로잘리아는 제정신이 아니에요. 너무 오랜 시간을 가주들의 부정한 감정에 노출된 것 같아요.]

‘정신이 돌아 버린 영웅이라 이거군요.’

이안이 이네스와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무시 받았다 생각한 로잘리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감히! 감히 날 무시해! 산 채로 태워주겠어!”

로잘리아의 손에 검은 불꽃이 모여들었다.

손바닥 위에 검은 장미가 피었다.

로잘리아는 그 장미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파아아!

장미가 부서지면서, 바닥을 타고 거센 불길의 파도가 주위에 퍼져나갔다.

이안이 외쳤다.

“스텔!”

“응.”

굳이 외칠 필요도 없었다.

스텔은 이미 준비를 마쳐두었다.

기도를 외운 스텔과 이안의 앞에 빛의 장벽이 세워졌다.

퍼져온 불꽃이 맹렬하게 장벽을 훑었다.

크레이 사가 최고의 화력과 방어력의 대결.

하지만 그 명성이 무색하게, 불꽃은 장벽을 뚫지 못하고 이내 사그라들었다.

‘로잘리아의 힘까지 받은 플로라가 이 정도 일이 없어. 아직 로잘리아가 완전히 주도권을 쥔게 아니라는 소리겠지.’

희소식이다.

이안은 스텔에게 시선을 보냈다.

시선을 읽은 스텔이 이안에게 축복을 걸어주었다.

이안의 몸이 빛에 휩싸인다.

발걸음이 가볍다.

가볍게 몸을 푼 이안은 성검을 굳게 쥐었다.

불꽃이 장벽에 막혀 화가 난 로잘리아는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 하고 있었다.

이안은 땅을 박찼다.

로잘리아가 폭발과 함께 강렬한 불꽃을 뿜어냈다.

피할 틈은 없다.

이안은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불꽃의 모든 부분이 균일하게 뜨거운 건 아니다.

이안은 덮쳐오는 불꽃의 가장 덜 뜨거운 부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화악!

순식간에 화염이 흩어졌다.

로잘리아가 눈을 부릅떴다.

검으로 화염을 걷어내다니. 믿을 수 없는 광경이다.

그제야 로잘리아는 이안이 지닌 검에 시선을 보냈다.

언뜻, 투박해 보이지만 신체가 짜르르 떨릴 정도로 꺼림칙한 기분을 풍기는 검.

로잘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성검? 하지만 분명 악마의 공격에…….”

이안은 대답 없이 곧장 로잘리아를 향해 내달렸다.

미간을 좁힌 로잘리아가 다시 한번 불꽃을 흩뿌렸다.

어둡고 더러운 감정들을 불태운, 검은 불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검을 한번 휘젓자, 불꽃은 맥없이 흩어졌다.

당연한 결과였다.

평소에는 그저 단단할 뿐인 성검은 악마를 상대로는 최강의 무기로 변모한다.

악마에 가까운 존재인 로잘리아가 뿜어내는 불꽃 정도는 손쉽게 갈라 버릴 수 있다.

둘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로잘리아가 발작하듯이 외쳤다.

“안 돼! 기껏 얻은 그릇을 잃을 수는 없어!”

그녀의 입에서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제법 강력한 불꽃이지만 그녀도 안다.

이미 검사의 사거리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이미 끝난 거라는 걸.

저 불꽃을 뚫고 성검이 그녀의 얼굴에 꽂혀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불꽃은 갈라지지 않았다.

대신 뻗어온 건 이안의 손.

짝―!

경쾌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렸다.

로잘리아가 욱신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멍하니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안의 피부는 화상으로 붉게 물들어있었다.

“무슨 짓을…….”

“내가 플로라를 죽일 것 같아?”

여기서 플로라를 찔렀다가는 곧바로 로잘리아가 폭주해 버린다.

육체를 잃게 될 운명에 처한 로잘리아의 발악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매섭다.

‘그리고 역시 플로라가 없으면, 파티의 화력이 떨어지니까요.’

[플로라를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될 텐데…….]

짝―!

이안이 다시 한번 로잘리아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굳이 따귀를 선택한 이유는 별거 없었다.

가장 큰 모욕을 줘, 정신을 뒤흔들기에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안이 로잘리아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며 말했다.

“야. 플로라 듣고 있잖아. 빨리 정신 차려. 자기 몸을 남한테 내주는 머저리가 어딨냐?”

로잘리아의 검은 눈동자가 한순간 붉은색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검은색으로 변했다.

악에 받친 로잘리아가 불꽃을 소환했다.

“이런 무례한! 감히 내 몸에! 고귀한 피에 대륙을 구한 영웅의 몸에 손을 대다……!”

짝―!

이번에는 반대편 뺨이었다.

로잘리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녀가 소환하던 불꽃이 이안을 덮치려 했지만, 불꽃의 위세는 아까보다도 더 약했다.

로잘리아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안은 화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로잘리아의 뺨을 때렸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통이라는 감각과 굴욕감.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어우러져 로잘리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안은 쉼 없이 팔을 휘둘렀다.

“정신 차려 플로라. 빨리. 네 예쁜 뺨이 다 퉁퉁 붓기 전에 이 악마를 쫓아내라고.”

“예쁜…….”

로잘리아가 욱씬거리는 뺨을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사악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분명 로잘리아가 아닌, 플로라의 목소리였다.

로잘리아는 다급함을 느꼈다.

플로라가 자꾸만 자기를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가슴 속에 있는 주황색과 검은색 불꽃이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부지런히 다투었다.

지금은 아직 검은 불꽃이 우세하다.

하지만 주황색 불꽃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불꽃이 더 타오르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하다.

밝고 뜨거운 감정들이 주황색 불꽃으로 흘러들어, 어둡고 추잡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로잘리아를 밀어내고 있었다.

로잘리아는 이안을 증오 어린 눈길로 쳐다보며 마음속의 플로라에게 외쳤다.

“이 단순한 년! 고작 이런 거로 또 마음이 돌아서! 네가 혼자였을 때, 누가 옆에 있어 줬는지를 잊고……!”

분노한 로잘리아가 이안의 목을 쥐었다.

“플로라를 죽이지 않겠다고? 감히 내 앞에 그런 여유를 부려? 너도 날 무시하는 거야?”

“윽!”

목을 쥔 손에 불꽃이 서렸다.

살갗이 타는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지켜보고 있던 스텔이 급하게 기적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말라는 듯이.

그 모습에 잠시 갈등한 스텔이 이내 기적을 취소했다.

이안을 믿으니까.

‘씁. 더럽게 뜨겁네.’

이안은 불길이 서서히 거세지는 걸 느끼면서도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대신, 로잘리아와 두 눈을 마주쳤다.

눈은 곧 영혼의 통로.

분명 플로라도 로잘리아의 눈을 통해 이 광경을 보고 있을 거다.

[괜찮겠어요. 이안?]

‘플로라가 그래도 저를 생각해 준다면, 제가 죽기 전에는 튀어나오겠죠. 뭐. 안 튀어나와도 죽기 전에 제가 빠져나올 거지만.’

치이익.

점점 불꽃이 거세졌다.

목부터 시작한 불꽃이 이안의 몸을 서서히 덮어나갔다.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지만 이안은 마주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증오가 격렬하게 휘몰아치던 로잘리아의 눈동자에 어느새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건 로잘리아의 감정이 아니었다.

점점 증오 외의 감정이 섞여들면서 이안의 목을 쥔 손아귀의 힘이 차츰 약해졌다.

이안은 마른기침을 하며 씩 웃었다.

“꾸물거리지 말고 빨리 튀어나와 멍청아. 영광스러운 피에람의 일원이 이 정도밖에 안 돼?”

로잘리아가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누가 누구보고 멍청이라는 거야. 살갗이 다 탈 때까지 가만히 있고. 그냥 도망치거나, 칼로 찔렀으면 된 거였잖아. 왜 그렇게 미련하게…….”

익숙한 목소리.

플로라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안의 화상 자국을 어루만졌다.

위험한 도박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게…….

“왜긴, 네가 필요하니까지.”

그만큼 플로라는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안의 말에 플로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검게 물들었던 눈동자도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원래의 플로라로 돌아온 것이다.

“미안…….”

고개를 숙인 플로라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안은 장난스럽게 움츠러든 어깨를 두드렸다.

“다 컸네. 사과할 줄도 알고.”

“윽! 애 취급하지 마!”

플로라가 씩씩댔다.

그제야 이전의 플로라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아 안심되었다.

하지만 이안은 성검을 검집에 집어넣지 않았다.

도리어 자세를 바로잡았다.

플로라가 의아하게 이안을 쳐다봤다.

“왜 그래?”

“왜긴. 이제 진짜 싸움을 벌여야 하니 준비하는 거지.”

게임에서 로잘리아와 대면한 플로라는 타락해 적이 되거나, 내면의 어둠을 이겨내 아군이 된다.

하지만 플로라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로잘리아와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조금 전처럼 제대로 힘을 못 낸 손쉬운 전투가 아닌…… 진짜 어려운 전투가.

스스스.

플로라의 몸에서 거무스름한 기운이 빠져나오더니 로잘리아의 형상을 이루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로잘리아의 모습에서 더는 기품이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추하고, 역겨울 뿐인 악마.

로잘리아가 이쪽을 살벌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감히 나를 쫓아내다니. 은혜도 모르는 년.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부숴 버리겠어.”

로잘리아가 지하실의 가장자리에 흐르던 용암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이 용암 사이에 흩어졌다.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뭐, 뭐야. 포기한 건가?”

“그럴 리가 있나.”

“뭐?”

“자기보다 더 오래된 존재를 깨우려는 거야.”

쿠구구구궁.

잠잠하던 땅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 떨림이 더 격하다.

용암이 점점 위로 차오른다.

공간을 왜곡하던 마법이 부하를 견디지 못하고 차츰 무너지고 있었다.

“자. 빨리 가자. 다 무너지기 전에.”

“뭐?”

이안은 기절한 로드릭을 어깨에 올리고, 플로라와 스텔의 팔을 잡고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이제 대충 알겠네. 왜 굳이 가문 아래에 화산에 통하도록 공간을 왜곡시켜놨는지.”

“……알아듣게 설명해.”

“직접 보면 알아.”

이안은 속도를 올렸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려 하고 있었다.

황급히 바깥으로 달려나온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용인들은 가주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좋아. 방해될 일도 없고.’

이안은 너른 안뜰에 나와 저택을 쳐다보았다.

의연한 척했지만, 사실 가슴이 긴장으로 쿵쿵 뛰었다.

이제 상대해야 할 적은…….

“무, 무너진다.”

플로라가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저택의 중간 부분이 격하게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게 아래에서 몸부림이라도 치는 것마냥.

꽈릉!

이내 저택이 완전히 무너지며 주위에 자욱하게 먼지가 퍼져나갔다.

이안은 먼지가 불어닥치든 말든 눈을 감지 않고 저택 쪽을 계속 바라보았다.

잔해가 꿈틀거리며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무언가 지하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점점 잔해와 흙이 걷히고.

위를 짓누르는 무게가 충분히 가벼워졌을 때.

마침내 잔햇더미를 해치며 거대한 두 쌍의 날개가 펼쳐졌다.

“아…….”

플로라는 멍한 얼굴로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그 존재를 바라보았다.

도마뱀을 닮은 거대한 몸.

불꽃을 빼닮은 새빨간 비늘.

우아하면서도 숨 막힐 듯 풍겨오는 포악한 분위기.

난생처음으로 보는 그 생물의 이름을 플로라는 너무나 잘 알았다.

“드래곤…….”

신화나 전설 속에서나 존재할 괴수가 현실로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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