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피에람(11)
과거.
아직 이 땅에 피에람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전인 먼 옛날.
유난히 커다란 샐러맨더가 있었다.
웬만한 괴수는 비교조차 못 할 만큼 커다란 샐러맨더는 이 땅의 크나큰 골칫거리였다.
샐러맨더가 돌아다닐수록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몇 개의 마을이 사라지고 도시 하나가 샐러맨더에게 불타 버렸다.
피해를 더 참지 못한 영주는 고민 끝에 대대적인 토벌을 선포했다.
영주는 사병과 용병을 끌어모아 토벌대를 꾸렸다.
하지만 샐러맨더는 강했다.
병사들이 달려들면 한입에 삼켜 버렸고, 기사와 마법사는 입에서 불을 뿜어 죽였다.
피해가 막심하게 커졌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영주는 위기감을 느꼈다.
기껏 괴수 하나 처리하지 못해 쩔쩔매는 그의 평가는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
백성들의 민심을 잃으면 아무리 귀족이라도 힘을 잃는 법.
이대로 가다가는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질 것 같았다.
영주가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그의 충신 중 하나가 계책을 올렸다.
“자고로 적의 이름을 드높이면, 그에 맞서는 아군의 이름도 드높이는 격이라 하였습니다. 우리가 상대하는 게 한낱 변종 샐러맨더가 아닌, 좀 더 위대한 존재라고 소문을 퍼뜨리시지요.”
그날부로 한 가지 소문이 퍼졌다.
오스트 화산 근처에서 난동을 부리는 게 사실 샐러맨더가 아닌, 어린 드래곤이었다는 걸.
사람들은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그도 그럴 게, 누구라도 저 거대한 덩치의 샐러맨더가 불꽃을 뱉어내는 걸 직접 목격한다면 드래곤을 연상했을 테니까.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영지에 퍼지면서, 영주는 한시름을 놓았다.
고작 샐러맨더 따위에게 고전하는 영주는 무능한 인간이지만, 자연재해와 같은 드래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주가 한 가지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사람들이 소문을 너무 굳게 믿었다는 것.
게다가 드래곤의 등장은 화제를 사기 너무 좋았다.
이야기를 사랑하는 음유시인들이 전 대륙을 돌며 포악한 드래곤에 이야기들을 각색하고 퍼트렸다.
이야기는 믿음이다. 믿음은 곧 힘이다.
소문이 모이고 모여 영주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샐러맨더의 다리 한 쌍이 변형되어 날개가 되었다.
샐러맨더 본인도 처음에는 자기 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멋진 날개로 적을 후려칠 수 있어, 더 쉬운 사냥이 가능해진 것에 기꺼워할 뿐.
그렇게 샐러맨더는 조금씩 변해갔다.
날개는 더 우아해지고, 비늘은 더 단단해졌다.
바뀐 건 외양뿐만이 아니었다.
샐러맨더는 점점 영리해졌다.
사로잡은 인간을 겁박해 언어도 배웠다.
왜인지 모르지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지성’이라는 걸 깨달은 건 조금 후였다.
샐러맨더는 한동안 순수히 기뻐했다.
높아진 지능과 강해진 신체 덕분에 이제 사냥에 실패할 걱정은 없었다.
그저 하늘을 날다 적당한 마을을 덮치면 되니.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드래곤은 몸 한구석이 텅 비어 있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꼈다.
배가 고픈 건가 싶어 사냥감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도 마음 한구석이 채워지지 않았다.
대체 이 느낌은 뭘까?
드래곤은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던 인간 남녀를 보게 되었다.
인간들은 드래곤을 보고 겁에 질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한쪽을 미끼로 내던지고 도망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들은 도망치기는커녕, 도리어 서로가 대신 잡아먹히겠다고 빌기 시작했다.
그때 드래곤은 처음으로 부러움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감며을 받은 드래곤은 희생을 자처하던 두 남녀를 놓아주었다.
그 뒤로 드래곤은 정처 없이 주위를 떠돌아다녔다.
단 하나라도 좋으니, 자기와 비등한 존재를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드래곤의 성에 차는 일은 없었다.
기나긴 방황 끝에 지친 드래곤은 오스트 화산의 용암에 몸을 담갔다.
이 따스한 온기만이 공허한 그의 마음을 덥혀주었다.
그때.
화산의 저 위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안녕! 네가 그렇게 불꽃을 잘 피운다며? 우리 한번 내기할까? 내가 이기면…… 음. 친구하는 거 어때?”
새빨간 눈에 새빨간 머리칼을 가진 소녀.
그녀는 피에람의 선조이자, 드래곤의 처음이자 마지막 친구였다.
이후.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저 피에람이 죽은 이후, 드래곤이 눈물을 흘리며 용암 속에 잠들었다는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
***
“크아아아―!”
하늘에 날아오른 드래곤이 고통스럽다는 듯이 울부짖었다.
거대한 두 날개가 펼쳐지자, 마치 드래곤이 하늘을 덮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드래곤의 포효에 플로라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너희 가문의 전설이잖아. 네가 나보다 놀라면 어떡해.”
“바보야! 드래곤은 상상 속의 괴수라고!”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후웅! 후웅!
드래곤이 한번 날갯짓을 할 때마다 지상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스텔과 플로라에게 이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시간을 오래 끌면 안 되고 한 방에 끝내야 해. 안 그러면 이 주위가 전부 불타 버릴 거야. 너희 영지, 전부.”
게임에서 로잘리아는 잠들어있던 드래곤을 깨워서 조종한다.
긴 시간 잠들어 약해졌다 하나 드래곤은 드래곤.
플레이어는 드래곤이라는 강력한 적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하지만 로잘리아와의 전투가 까다로운 건 다른 부분이다.
‘위기에 빠지면 도망쳐 버리지.’
도망치는 게 끝이 아니다.
로잘리아는 드래곤을 조종해 온 피에람을 떠돌며 대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렇게 되면 게임에서는 플레이어의 패배로 판정되고 게임 오버가 뜬다.
‘여기는 현실이니까 게임 오버가 뜨지는 않겠지만…….’
후에 있을 전쟁에서 아군의 세력이 주는 건 뼈 아픈 일이다.
이안은 태양의 활을 꺼내 들었다.
“일단 정신 차리기 전에 하늘에서 떨어트려야 해. 날개를 노릴 거야. 스텔. 기적을 준비해줘.”
“……응.”
“플로라. 너도.”
“으, 응.”
이안은 시위를 잡아당겼다.
달빛이 활 끝에 모여들어 화살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노리는 건 왼쪽 날개다.
한쪽 날개에만 유의미한 타격을 주어도, 저 거대한 생물은 더는 날아오르기 힘들 터.
이안의 활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며 스텔도 기적을 준비했고, 뒤이어 플로라가 마법을 준비했다.
빛의 화살이 점점 더 선명해지며 시위를 잡은 손에 느껴지는 압력이 거세졌다.
신체 능력이 올라간 덕에, 예전보다 화살이 더 선명해질 때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큰 게 날아가겠네.’
활을 잡은 이안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껏 쏘았던 그 어떤 화살보다 더 강력할 거라고.
이윽고 선명해진 화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활을 쥔 손에도 한계에 다다랐다.
이안은 스텔과 플로라에게 한번 눈짓한 뒤, 시위를 가볍게 놓았다.
쏴아아!
화살과 드래곤의 사이에 자그마한 실선이 생겨나더니, 이내 파멸의 광선이 그 궤적을 따라 쏘아졌다.
일순간 어두운 밤을 환히 밝힐 정도로 눈부신 빛이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해 비틀거리던 드래곤도 그 빛을 보았다.
급하게 회피를 하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광선이 그대로 드래곤의 날개에 직격했다.
콰아아!
과연 드래곤의 비늘은 단단했다.
광선에 얻어맞은 날개는 단번에 뚫리지 않았다.
이제껏 그 어떤 적도 이 빛을 이겨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드래곤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크아아아!”
드래곤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늦게 화염의 장막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뻗어 나오는 광선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날개의 비늘이 점점 깎여나가고 있었다.
본능적인 위기를 느낀 드래곤의 주위에 거대한 불덩어리들이 만들어졌다.
날개가 다 타 버리기 전에 이안을 죽이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 불덩어리들을 날리지 못했다.
파앗!
허공에서 생겨난 장벽들이 둥그런 구체 모양으로 불덩어리들을 감쌌다.
허공에 생겨난 수십 개의 불덩어리, 전부.
이 정도의 기적 활용이라니.
이안조차 놀랄 정도였다.
“이거 완전 사긴데. 잘했어 스텔.”
“응.”
대답은 무감정했지만, 스텔의 어깨가 조금 올라갔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 모습에 감탄하던 플로라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뒤늦게 마법을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드래곤의 날개가 뚫린 후였다.
“크아아!”
날개를 잃은 드래곤이 지상을 향해 낙하했다.
콰광!
대저택의 잔해 위로 드래곤의 거체가 부딪혔다.
굉음과 함께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흩어진 잔해와 돌조각들이 주위로 날아들다 스텔의 장벽에 막혀 튕겨 나갔다.
“주, 죽었나?”
중얼거리는 플로라를 향해 이안이 말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리고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뭐?”
잔해가 걷혔다.
저택의 잔해 위에 누워 있던 드래곤이 몇 번 꿈틀거리더니, 이내 네 발을 딛고 일어섰다.
날개를 사용하지 못하고, 눈에 이지 없이 흐리멍덩한 그 모습은 영락없이 샐러맨더 그 자체였다.
일반 샐러맨더보다 훨씬 크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크르르르.”
아직 정신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자신을 공격한 이안에 대한 적의만큼은 출중했다.
이안은 성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럽게 크네.’
이안을 본 드래곤이 그 거체를 움직여 마주 달려왔다.
아가리를 쩍 벌리며 빠르게 접근하는 거대한 도마뱀은 공포 그 자체다.
휘오오.
벌린 아가리에서 화염이 소용돌이치는 게 보였다.
일전에 상대했던 샐러맨더와 비슷한 느낌.
하지만 그 위력마저 비슷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안이 땅을 힘껏 밟아 하늘로 뛰어올랐다.
콰아아아!
이안의 발 바로 밑을 화염의 폭풍이 지나갔다.
샐러맨더처럼 단순히 체내 화학 반응만으로 만들어낸 불꽃이 아니다.
그곳엔 드래곤의 마법이 섞여 있었다.
이안은 스텔의 이름을 외치려 했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기적으로 만들어낸 방벽은 이안의 발아래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게다가 방벽은 이안이 밟을 수 있는 뜀틀의 역할도 해주었다.
방벽을 힘껏 밟고 뛰어오르며 이안은 생각했다.
‘이제 척하면 척이네.’
이안이 피하자 드래곤이 아가리의 방향을 이안의 움직임에 맞추어 움직였다.
용의 숨결이 밤하늘을 갈랐다.
압도적인 광경.
그리고 그걸 모조리 피해내는 이안의 감탄스러운 움직임.
플로라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그토록 꿈꿔오던 광경. 전설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이안.”
재능이 뛰어나다고는 생각했다.
코르디스에서도 실력이 빠르게 느는 이안을 보며, 플로라도 부단히 수련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서로의 격차가 말도 안 되게 벌어져 있다.
드래곤에게도 당당히 맞서는 이안과 스텔.
그에 비해 자기는 드래곤이 한번 포효하는 것만으로 다리가 풀려 주저앉지 않았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플로라가 자괴감에 점점 고개를 숙일 때, 갑자기 머리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흠칫 놀란 플로라가 고개를 드니 스텔이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플로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이 지었다.
감히 무례하게 내 머리에 손을.
무시하는 건가? 비웃는 건가?
아니, 나한테 화낼 자격이 있는가?
가문의 추태를 해결하기 위해 활약하고 있는 건 이안과 스텔인데…….
산발적인 생각들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스텔의 무기질적이고 무감정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하게 가라앉았다.
“……피에람.”
“네?”
스텔은 그 한마디만을 뱉었다.
플로라는 멍하니 되물었다.
그 뒤에 이을 스텔의 말을 기다렸지만, 스텔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어이가 없었지만, 플로라는 어쩐지 스텔이 무얼 말하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스텔은 말이 아닌 눈빛으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자기 혼자 넘겨짚는 것일 수도.
하지만 별로 상관은 없었다.
‘신기한 사람이네.’
마음속에 있던 스텔에 대한 막연한 적의와 경계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플로라는 다시 일어났다.
“맞아요. 명예로운 피에람이 꼴사나운 모습만 보여드렸어요. 한심하게도.”
플로라는 드래곤과 맞서는 이안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연거푸 토해지는 숨결에 이안은 도저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시 주의를 끌려면…… 따끔하게 태워 버리는 게 제일이었다.
“제가 진짜 불꽃이 무엇인지 보여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