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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42화 (143/222)

142. 증오의 끝에는

이네스를 잃은 결사대는 황도로 돌아와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대륙의 모두가 영웅의 귀환과 위업을 칭송했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이네스를 기억하는 이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사대는 어두운 얼굴로 황제가 마련해준 저택에 칩거했다.

수많은 유력자와 권력가들이 그들을 보기 위해 연신 문을 두드렸지만, 영웅들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리츠 클로딘이 다른 결사대를 모두 불러모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게 결사대의 마지막 만남이라는 걸.

“…….”

짙은 침묵이 내리깔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영웅들의 얼굴에는 죄책감과 공허함만이 감돌았다.

로잘리아는 이 분위기가 싫었다.

그녀 역시 마음이 타 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동료들이 좋았다.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용기를 내 입을 열었다.

“우, 우리 이제 어떻게 할까요? 악마를 사냥하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같이 여행이라도…….”

시선이 한순간 로잘리아에게 모여들었다.

증오가 가득한 시선이었다.

로잘리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위기에서도, 그녀가 어떤 실수를 저질러도 동료들이 이런 식으로 쳐다본 적은 없었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때 이네스에게 화염 마법만 날리지 않았어도.”

얼굴이 빨개진 로잘리아가 외쳤다.

“뭐, 뭔가요. 제 탓이라니.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옳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반론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 로잘리아는 깨달았다.

결사대가 다시는 함께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이네스에 대한 배신은 스스로를 혐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증오하게 만들었다는 걸.

다시 침묵이 내려앉고 정적이 이어지기를 한참.

에릭 그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세상을 좀 떠돌아 봐야겠습니다. 그래도 한때나마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황제가 되실 걸 미리 축하드립니다. 프리츠…… 아니. 프리츠 그레이스 클로딘 폐하.”

동료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인 에릭 그린이 떠나가 버렸다.

로잘리아는 마지막으로 그린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다음은 아타바였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어머니 나무와 함께하고 싶다.”

딱딱하게 말한 아타바가 떠났다.

로잘리아는 아타바가 요리해준 떫은 풀죽을 마지막으로 먹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또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었다.

로잘리아는 마지막으로 프리츠를 보았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이틀 전, 황녀와 약혼한 프리츠는 얼마 안 가 황제로 즉위할 터였다.

하지만 로잘리아는 여행의 초기부터 프리츠에게 연심을 품고 있었다.

악마를 토벌하면 전하고자 했던 마음.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네스를 배신한 그녀가 과연 행복해질 자격이 있을까?

아마 프리츠도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을 거다. 어쩌면 더 심하게.

그렇기에 마음을 전할 수 없었다.

긴 시간이 흐르고, 프리츠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웠어요 로잘리아.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언제나처럼 짓는 자상한 미소.

하지만 이게 작별의 말이라는 걸 로잘리아는 너무나 잘 알았다.

프리츠가 떠나갔다.

하지만 로잘리아는 붙잡지 못했다.

혼자.

홀로 남겨진 로잘리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이네스…….”

***

이안은 장벽을 밟고 다시 땅에 내려서며 생각했다.

‘비늘은 너무 단단해서 벨 수가 없을 거야. 만일 베어낸다 해도 별 타격도 없을 거고. 이마의 가운데에 난 역린을 노려야 해.’

하지만 쉽지 않았다.

거대한 덩치의 드래곤의 주위로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꽃이 끊임없이 회전했다.

불꽃은 이안이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게다가 이따금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리고 토해내는 숨결은 아무리 이안이라도 섬뜩함을 느끼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드래곤의 재생력은 굉장히 뛰어났다.

왼쪽 날개에 뚫린 구멍에서 흐르던 피가 멎으며 조금씩 아물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쯧. 나한테만 집중하니까 방어를 뚫어내기가 힘든데.’

누군가 시선을 끌어줄 사람이 있었으면 훨씬 상황이 나았을 텐데.

차라리 교단에서 사람을 불러오거나, 저택의 가솔들을 남겨두는 게 나았을 거라는 후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화염 덩어리가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터졌다.

팡!

“크릉?”

화염은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용암 속에 몸을 담가도 멀쩡할 정도로 드래곤의 열 내성은 강했다.

게다가 드래곤은 뛰어난 마법사이기도 하다.

화염 마법은 상성이 매우 안 좋았다.

하지만 플로라가 날린 불꽃은, 적어도 드래곤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의 뜨거움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안을 향한 집중이 분산될 정도로.

길이 보였다.

이안이 외쳤다.

“플로라! 온 힘을 압축해서 날려! 악마를 상대할 때처럼.”

“말처럼 쉬운 줄 알아!”

앙칼지게 쏘아붙이면서도 플로라는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이안은 플로라의 손 위에 생겨난 불꽃을 보며 생각했다.

‘저건…… 오히려 내가 시선을 끌어야겠어.’

거리를 벌리고 상황을 가늠하던 이안이 드래곤에게 더 다가갔다.

플로라를 향해 곧장 숨결을 뱉으려던 드래곤의 시선이 다시 이안에게 돌아갔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드래곤의 세로 눈과 마주친 순간,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조심해요. 드래곤 피어에요.]

“알아요―!”

이안은 포효를 내뱉으며 공포를 떨쳐냈다.

눈앞에서 불덩어리들이 날아오지만 가슴은 차분했다.

‘좋아. 내 역할은 시선 끌기. 역할에만 집중하자.’

스텔을 동료로 들이고 깨달은 한 가지.

꼭 모든 걸 이안 혼자서 해낼 필요는 없다.

이안은 플로라를 믿고, 드래곤의 공격을 피해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 사이, 마법을 완성한 플로라가 불덩이를 날렸다.

화륵!

“킁!”

드래곤의 머리 위에서 화염이 폭발했다.

아까보다는 더 강했지만, 드래곤은 콧방귀를 뀌며 화염을 흩어내 버렸다.

‘부족해.’

입술을 깨문 플로라가 다시 한번 마법을 준비했다.

이안이 언제까지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른다.

‘이 한 방에 끝내야 해.’

지금. 플로라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평생을 피에람에 대한 긍지만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피에람의 어두운 그림자를 마주한 순간, 그 긍지는 산산이 조각났다.

그녀의 우상은 추악한 사람이었으며, 아버지는 선한 인간이 아니었고, 피에람은 그녀의 생각만큼 명예로운 가문이 아니었다.

하지만 플로라에게는 좌절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저 괴수를 막아내지 못하면 온 영지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막아내야 했다.

그녀는 피에람이니까.

‘그냥 터트려서는 안 돼.’

온 힘을 쏟아부으면 분명 커다란 폭발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저 단단한 비늘에 상처를 내는 것조차 힘들다.

잘못하다가는 이안 역시 말려들 것이고.

‘중요한 건 압축이야.’

근래.

자그마한 불꽃까지 모두 제어하려고 지독히도 수련하지 않았는가.

그걸 좀 더 큰 규모로, 한 번에 해낼 뿐이다.

물론 생각보다도 더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하지만 플로라는 가능성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피에람이니까.

플로라가 손을 위를 향해 펼쳤다.

불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하다.

태우는 건 그간 믿어왔던 모든 것. 그리고 지금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다한 생각들과 감정들.

수백 개의 불꽃이 산발적으로 허공에 생겨났다.

그중 하나가 플로라의 손 위로 날아들었다.

이내 그 불꽃은 크게 회전하더니, 주위의 불꽃을 끌어당기며 마치 솜사탕처럼 그 크기를 불려 나갔다.

불꽃이 다른 모든 불꽃을 흡수했다.

플로라는 또 수백 개의 불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다시 흡수하고, 생성하고의 반복.

어느새 손 위의 불꽃은 거대하게 몸집을 불려 나갔다.

더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불꽃이 커졌을 때, 플로라는 비로소 불꽃을 만들어내는 걸 멈췄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부분이다.

플로라는 불꽃을 압축해 그 크기를 조금씩 줄여나갔다.

마치 거대한 손으로 꾹 누르듯이 불꽃을 그러모았다.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다.

불꽃은 압축될수록 드세졌고, 더 제어하기 어려워졌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뜨거워지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불꽃의 제어를 잃고 폭주 상태에 빠져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두렵다는 마음보다는 반드시 해내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다.

파스스스.

이윽고, 거대했던 불덩어리가 구슬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제는 위태로울 정도로 땀을 흘려 온몸이 흠뻑 젖은 플로라가 팔을 들어 올렸다.

마치 무거운 물건이라도 들고 있는 듯, 팔이 바들바들 떨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후우.”

플로라는 작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외쳤다.

“알아서 피해!”

플로라가 팔을 뻗었다.

이안은 뒤를 보았다.

자그마한 화염 구슬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은 느꼈다.

잘못해서 ‘저것’에 말려드는 순간, 뼈조차 남기지 못할 거라는 걸.

여태껏 이안이 봐왔던 그 어떤 것보다 저 자그마한 화염 구슬이 위험하게 느껴졌다.

이안은 온 힘을 다해 드래곤에게서 멀어졌다.

느리게 날아간 화염 구슬이 드래곤의 눈앞에서 멈췄다.

“…….”

이안은 구슬이 터지는 광경을 눈에 담았다.

처음에는 섬광이었다.

섬광이 뻗어 나감과 동시에 주위 모든 소음을 빨아들였다.

그다음에는 폭발이다.

색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너무나 밝은색 폭발이 드래곤의 주위에 터져 나갔다.

폭음이 퍼진 건 그로부터 두 박자 뒤였다.

꽈과광―!

거대한 폭발과 함께 엄청난 풍압이 주위에 퍼져나갔다.

“크아아아!”

드래곤이 비명을 질렀다.

플로라의 불꽃 앞에서는 드래곤조차 버텨낼 수 없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원형으로 퍼져나가던 불꽃이 일순, 제자리에 멈추더니 이내 다시 원래 크기로 압축되었다.

퍼져나가던 잔해 역시 다시 안쪽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불꽃은 점점 작아지며 드래곤을 다시 한번 태웠다.

크기가 작아지는 반면 위력은 오히려 증가했다.

공기가 순식간에 덥혀지고, 주위의 땅은 뜨거운 열기에 녹아 흐물거렸다.

마치 하늘의 태양을 따다가 지상에 던져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드래곤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해, 바닥에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버텨낸다.

온몸의 비늘이 다 타 버려 피가 뚝뚝 흘러내리지만, 전설 속의 괴수는 이 정도로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안이 달려나갔다.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드래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이안은 곧장 드래곤의 몸통으로 올라, 역린이라 불리는 급소로 향했다.

앞으로 칼을 한번 내지르면 끝.

그 사실을 알기에 드래곤의 거체에서 로잘리아의 모습을 한 불꽃이 튀어나왔다.

“안 돼!”

로잘리아는 필사적으로 힘을 쥐어짜네 드래곤을 조종했다.

드래곤이 고통스러워하며 이안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뱉어냈다.

최후의 불꽃이 이안을 향해 뿜어져 온다.

하지만 이안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브로치에 가져다 댔을 뿐.

화악!

화염의 장막이 이안을 감쌌다.

피에람의 선조가 불어 넣은 불꽃이 로잘리아와 드래곤의 불꽃을 막아냈다.

흐리멍덩한 드래곤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뜨였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눈앞에 공포로 일그러진 로잘리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럴 수 없어! 나한테는 해야 하는 일이……!”

이안은 잠시 멈칫한 뒤, 이네스를 돌아보았다.

이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끝내주세요. 이안. 그리고 저는 로잘리아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전해주세요. 지금도 친구라 생각한다고도요.]

푹!

이안은 성검을 그대로 내뻗어 로잘리아와 함께, 드래곤의 역린을 내찔렀다.

로잘리아는 성검이 박힌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몸을 이루는 불꽃이 흩어지고 있었다.

수백 년이나 묵은 부정한 감정들도.

“아…… 아…….”

망연자실해 있는 로잘리아에게 이안은 이네스의 말을 전했다.

“이네스 님이 전해달래요. 당신을 원망하지 않는다고. 여전히 친구라고 생각한다고.”

로잘리아가 멈칫했다.

그 표정이 이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어두운 감정이 격렬하게 휘몰아쳤다.

“차라리! 차라리 원망해! 증오하라고! 그렇다면 평생을 속죄하면서 살았을 거야! 그랬을 거라고!”

점점 흩어지는 로잘리아가 이안의 옷자락을 붙잡고 외쳤다.

“이네스! 너, 너의 모습은.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너를 보고 있으면 스스로 한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네가! 네 고결함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나를 이렇게 추하게 만든 거라고!”

빛이 밝으면 그만큼 그림자도 짙어진다.

이네스라는 빛은 너무 찬란했다.

로잘리아라는 추악한 어둠을 만들어낼 정도로.

스스로를 혐오하고 또 혐오하던 로잘리아는 결국, 이네스를 증오하게 되었다.

“이네스! 너를 뛰어넘어, 내 마음속에서 너를 완전히 지워내고 싶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로잘리아의 몸이 완전히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그녀가 뱉은 절규는 한참 동안 이안과 이네스의 귓가에 맴돌았다.

한때 영웅이었던 자의 마무리라 믿기에는 너무나 추악하고, 비참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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