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황도로(5)
“너 하는 거 보고 결정하자?”
“하!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니야? 부하들을 살려주겠다고 네 입으로 확언할 때까지 난 한마디도 안 할 거야.”
리어폴드의 완고한 말에 이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뭐?”
“어차피 네 입에서 듣고 싶은 말들은 나한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허세가 아닌 진심이었다.
리어폴드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수배 상황이나 기사단의 내부 사정 정도.
그것도 거짓이 섞여 있을 걸 경계한다면 전부 신뢰할 수 없다.
이안 입장에서는 모두 죽여서 함구하는 게 가장 깔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부하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다니, 기사다운 자예요.]
이네스가 리어폴드의 행동에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감정에 감화된 이안도 마냥 매정하게 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안은 리어폴드를 협박했다.
“어차피 난 너흴 싹 다 죽이는 게 편해. 그러지 않기 위해 너희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너랑 달리 나는 불필요한 살인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
시선이 마주친 레오폴드는 이안의 말을 한참 곱씹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듣고 싶은 게 뭐야.”
“첫째. 누구를 수배하는 거지?”
“플로라 피에람. 피에람 가문의 여식.”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이안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다시 물었다.
“왜 찾는 건데?”
“원래 그녀 정도의 마법사에는 항상 감시의 눈길이 붙어 있어. 혹여나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굉장히 골치 아파질 수 있거든.”
“근데?”
“소재를 놓쳤어. 영지에서 사라졌더군.”
역시나 황제는 플로라가 사라진 것을 눈치챘다.
이안의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도시를 뒤지고 다니는 거야?”
“어제 갑자기 내려온 지침이야. 황궁 주위의 모든 도시에서 검문을 하는 모양이고.”
“혹시 황도에 가서 문제를 일으킬까 걱정하는 거네?”
“그래. 사람이 몰리는 건국제에서 마법 하나만 터트려도…… 볼만하지 않겠어?”
리어폴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이안은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리어폴드가 물었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알려줘. 혹시 너희가 플로라 피에람을 데리고 있냐? 왠지 그럴 것 같은데.”
“아니. 우리랑은 관계없는 사람이야.”
“그으래?”
리어폴드는 흥미를 보였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여기서 더 많은 걸 알아 버린다면, 오히려 목숨이 위험해진다는 걸 본인도 잘 알았다.
“다음 질문이야. 이곳에 있는 강철기사단의 전력이 어느 정도야.”
“평소에 비해 조금 밖에 없어. 건국제를 준비하기 위해 기사 대부분이 황도로 소집되었고, 얼마 전에는 귀한 손님이 왔다갔거든. 손님을 모시기 위해 또 병력을 빼야 했지.”
“귀한 손님?”
이안이 되물었지만, 레오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 설령 나를 포함해 내 부하들을 모두 죽인다고 해도 말이야.”
“그래? 아주 귀하신 분인가 봐?”
레오폴드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져왔다.
‘뭐.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고.’
이안은 곧바로 주제를 되돌렸다.
“어쨌든 기사들이 별로 없다는 거네? 심지어 여기에 잡혀 있는 너희들까지 빼면 더 줄어들 거고.”
“그래.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가 돌아가지 않으면 더 빨리 알아챌 거다.”
“도시에서 빠져나가는 건 별로 어려울 게 없다 이거구만.”
주요 전력이 황도에 집중되어 있다면 이곳, 리브네를 빠져나가기는 생각보다 수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자. 황제가 전쟁 준비를 얼마나 해놨냐.”
“폐하라 불러라. 그리고 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군.”
황제가 귀족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하라 명한 순간.
전쟁이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귀족과 몇몇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안 같은 실력의 검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게, 리어폴드에게는 그리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다. 왜. 전쟁이 탐탁지 않나?”
“그럼 너는 좋냐?”
“당연한 거 아닌가? 너와 나 같은 칼잡이가 활약할 수 있는 게 전쟁 말고 또 어디 있다는 거지?”
진심.
리어폴드는 진심으로 전쟁을 원하고 있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싸움을 피하는 기사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다만 이안은 더는 리어폴드와 대화할 가치를 못 느꼇다.
“좋아. 대충 알 건 다 알았네.”
“그렇다면 약속대로 내 부하들을…… 끅!”
이안은 검집으로 리어폴드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리어폴드가 그대로 기절해 바닥에 엎어졌다. 입에서는 게거품이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기사들이 발작했다.
“비겁한 새끼! 약속을 저버릴 셈이냐!”
“리어폴드 경의 목숨은 살려줘라! 대신 우리를 죽이라고!”
“아주 눈물겨운 전우애네. 한숨 자면서 머리들 식혀라.”
이안은 검집을 가볍게 휘둘렀다.
파바박!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사들이 동시에 바닥에 쓰러졌다.
짝짝짝!
깔끔한 솜씨에 스텔이 멍한 얼굴로 손뼉을 쳤다.
피식 웃은 이안이 말했다.
“자. 손발 묶자.”
“……응.”
이안과 스텔은 기사들의 손과 발을 꼼꼼히 묶었다.
깨어나자마자 곧장 이쪽을 쫓아온다면, 그것도 곤란한 일이니까.
작업을 마무리한 이안은 카펫을 걷어낸 뒤, 플로라가 숨은 은신처의 문을 잡아당겼다.
화악!
문을 열자마자 불길이 치솟았다.
급하게 뒤로 물러난 이안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얌마. 위험하잖아.”
“어, 어차피 너는 이 정도에는 아무렇지도 않잖아.”
“옷이 다 타 버린다고.”
긴장한 얼굴의 플로라가 고개만 빼꼼 내민 뒤, 안전한 걸 확인하고는 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바닥에 묶여 있던 기사들을 보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꺅! 이, 이게 뭐야! 기사들이잖아! 다 죽인 거야?”
“죽였으면 묶어놨겠냐? 그냥 기절만 시킨거야.”
쭈그리고 앉은 플로라가 기사들을 툭툭 찔러보았다.
“언제 이렇게 때려눕힌 거야.”
“꽤 요란하게 싸웠는데. 안에서는 안 들렸나 봐?”
“어…… 차음이 엄청 잘되나 봐.”
“그거 좋네.”
이안은 기사들의 몸을 들어 올려, 그대로 플로라가 올라온 계단으로 밀었다.
기사들의 몸이 계단을 구르며 저 아래로 떨어졌다.
“아무리 고함을 질러대도 들키지는 않겠지.”
“여기에 가두게?”
“어. 그냥 내보냈다가는 곧바로 추격해올 거 아니야.”
“그러다 결국에는 발견이 안 돼서 굶어 죽기라도 하면…….”
“굶어 죽을 때까지 못 빠져나오면, 그거야말로 기사 실격이지.”
다른 이들은 몰라도 리어폴드는 저 단단한 밧줄을 물어뜯어서라도 탈출할 사내다.
이안은 옷깃을 추스르며 말했다.
“자. 남 걱정할 때가 아니야. 당장 도시에서 떠나야 해.”
늦든 빠르든 추격이 붙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스텔과 플로라가 짐을 꾸렸다.
이안은 짐을 최소한의 식량만을 챙기며 생각했다.
‘어차피 황도까지는 금방이야. 너무 바리바리 싸 들고 갈 필요는 없겠지.’
순식간에 짐 정리를 마친 셋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로브를 푹 눌러쓴 플로라가 이안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교단에 들릴 거야?”
“아니. 아무래도 이곳 예배당에 첩자가 있는 것 같아. 그냥 떠나야 해.”
“처, 첩자.”
“그리고 플로라. 너한테 비공식적으로 수배령이 내려졌데. 강철 기사단이 찾아온 것도 혹시 네가 있는지 잡으러 온 거야.”
“으응.”
제국의 수배령은 흉악한 범법자들에게나 내려지는 처사다.
평생 인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상황에 처하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각오했던 일이다.
로드릭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면 플로라는 이보다 더한 것도 감수할 수 있었다.
플로라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이안.”
“응?”
“어서 가자. 황도로.”
***
캉! 카캉!
황궁의 별관에 자리한 수련장.
이곳은 오로지 황족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한동안 먼지를 날리던 이곳에,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습니다. 저하! 훌륭한 찌르기입니다!”
“합!”
긴 머리카락을 한데로 묶어 내린 남자와 아름다운 황금빛 머리를 어깨까지 내린 여인.
지켜보던 시녀들은 감탄을 흘렸다.
“어쩜…… 레아 저하께서는 언제봐도 너무 아름다워요. 동화 속 요정 같지 않아요?”
“게다가 검술도 뛰어나시지. 저 기사단장님이랑 호각으로 대련하고 계시잖아?”
“아름답고 강하시다니…… 역시 황족은 다르네요.”
그 사이.
길게 이어지던 대련이 끝이 났다.
검을 떼고 한걸음 뒤로 물러난 기사단장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
“하하! 저하! 대단하십니다! 젊은 나이에 벌써 이만한 성취라니요.”
“……경께서 봐주시지 않았습니까.”
“아뇨 아뇨. 거의 전력을 다했습니다.”
기사단장의 너스레에 레아 클로딘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감정이 한순간 지나갔다.
“경. 제대로 상대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저는 텅 빈 승리보다는, 설령 처참하게 깨지더라도 배울 수 있는 패배가 좋습니다.”
“저하…….”
“아니면 제대로 된 임무를 주세요. 리브네 수호 같은 명목뿐인 임무 말고요.”
진지한 어조에 난처한 듯, 볼을 긁적거린 기사단장이 레아를 달랬다.
“그러다 저하께서 다치시면 어찌합니까. 아름다운 몸에 흉터라도 지면, 제가 폐하를 볼 낯이 없습니다.”
“오라버…… 폐하께서는 그런 걸로 꾸짖으실 분이 아닙니다.”
“제 마음의 문제입니다.”
기사단장은 레아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저하. 저하께서는 젊으십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시지 마시고, 천천히 정진해 나가십시오.”
“…….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레아는 말을 삼켰다.
그걸 보고 수긍했다고 여긴 기사단장이 고개를 끄덕인 뒤, 정중히 예를 표했다.
“저는 그럼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저하도 이만 쉬시지요. 얼마 전에 리브네에 갔다 오지 않으셨습니까?”
“수고했어요. 저는 조금 더 수련하겠습니다.”
기사단장은 절도 있게 고개를 돌린 뒤, 걸어나갔다.
레아는 그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젊다고?’
기사단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레아는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여유 시간이 많지 않았음을.
그렇기에 레아는 초조하다.
더 강해지고 싶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녀의 신분 때문에 도통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았다.
아쉬움을 느끼던 그녀는 문득, 한 청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럴 때 이안이 있더라면…….’
차이 나는 실력에도 악착같이 달려들던 그 집념. 황녀라는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던 그 호탕함.
레아는 그때 느꼈던 그 긴장감과 심장이 박동하는 기분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코르디스에서 그가 떠난 지도 오래됐네.’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되어 있는 이안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는 걸까.
레아는 지금쯤 이안이 겪고 있을 모험을 상상하며,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분명 실력도 많이 늘었겠지. 어쩌면 나보다 훨씬 강해졌을지도.’
이안과 만나거나 연락할 수단은 없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레아는 언젠가 이안을 만나게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짊어진 것과 레아의 사명은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으므로.
‘뭐. 이른 시일 내에 보기는 힘들겠지만. 방으로 돌아가 명상이나 좀 해야겠어.’
레아는 아쉬움과 함께 상념을 털어냈다.
목검을 내려놓은 레아는 시녀들이 건네주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레아가 옆에 있던 시녀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피에람의 가주가 별관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었죠?”
“그렇습니다 저하.”
“안내해주세요. 대화나 한번 나눠보고 싶네요.”
레아는 가주를 만나 플로라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혹여나 플로라를 통해 이안의 소식을 들을 수 있지 않을가, 레아는 내심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