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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53화 (154/222)

153. 마지막 평화

지하.

황제는 붉은 안광을 빛내는 흑기사를 향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흑기사의 투구에서 힘겨운 숨소리가 울렸다.

“후우, 후우. 혼. 강한 영혼이 필요하다.”

흑기사의 거체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황제는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눈만 움직여 흑기사의 상태를 보았다.

‘위험하군.’

황제는 안다. 흑기사를 이 상태로 그대로 놔둔다면 폭주하고 말 것이다.

흑기사가 황궁에서 난동을 부린다면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할까.

굶주린 맹수는 포악해지는 법이다.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먹이를 줘야 한다.

황제가 공손히 말했다.

“원하시는 걸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후우. 후우.”

대답 대신 흑기사의 숨소리만이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

“제국이여 영원하라!”

“황제 폐하 만세! 제국 만세!”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대낮부터 풍겨오는 술 냄새. 광대의 웃음. 음유시인이 연주하는 악기의 선율. 사람들이 왁자하게 지껄이는 소리.

온 황도가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구나.’

리브네를 떠나 황도에 잠입하기까지는 1주일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황도 내부에 들어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축제를 맞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워낙 황도가 큰 만큼 빈틈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단의 도움을 받아 숨어지내는 이안 일행은 계획을 실행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건국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플로라의 성화에 셋은 밖으로 나왔다.

“으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네가 나오자고 보채서 나온 거잖아.”

“사람이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지!”

“혹시라도 미아가 될 수 있으니, 손잡아.”

“내가 애야?”

뾰족하게 쏘아붙이는 플로라와 달리, 스텔은 이안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체구가 작은 만큼, 휩쓸려 나가기 쉬우니 이편이 이안에게는 안심이었다.

그 모습을 불만스럽게 쳐다보던 플로라는 휙 고개를 돌려 앞서나갔다.

“어디가.”

“그 지긋지긋한 지하실에서 모처럼 나왔잖아. 좀 둘러봐야지.”

플로라는 푹 눌러썼던 로브를 뒤로 젖혔다.

오늘을 위해 노랗게 염색한 머리와 얼굴에 덮은 우스꽝스러운 동물 가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런 플로라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건국제 때는 가면을 씀으로써 신분도 지위도 모두 잊고, 함께 어울리는 게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이안도 수수한 흰색 가면을 얼굴에 눌러 쓴 뒤, 플로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하긴. 답답할 만하지.’

교단 내에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 후로.

이안과 아비게일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보안에 특히 신경 썼다.

그 때문에 셋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며칠간 갇혀 있다시피 했다.

사실, 오늘도 플로라가 떼를 쓰지 않았다면 지하실에 틀어박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플로라의 그 변덕스러움이 감사했다.

수많은 사람이 흥겹게 뿜어내는 힘이 전해져와 마음속 우중충함을 날려주었다.

“좋네. 황도도. 나중에는 이런 곳에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황도를 처음 봤을 때는 감탄이 나오지는 않았다.

이미 여러 발전한 도시들을 봐왔고, 그것들에 비해 황도는 조금 더 클 뿐.

특출나게 화려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황도는 매력적인 도시였다.

흔한 이정표, 바닥에 깔린 벽돌, 길에 심긴 가로수 하나까지 허투루 놓여 있는 법이 없었다.

세세한 것이 모여 완벽한 하나가 되는 이 절묘함.

과연 제국의 심장이자 긍지라고 할 만한 도시였다.

이안의 말에 플로라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흥. 피에람 쪽이 백배는 더 좋은데. 오래 살 거라면 당연히 피에람이지. 기후도 더 따뜻하고, 경치도 좋고.”

“그래그래. 피에람 최고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일단 좀 둘러보자.”

대로를 따라 노점상이 쭉 늘어서 있었고, 광장에서는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어디부터 둘러볼까 고민하던 플로라는 문득, 한 점포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안도 고개를 돌렸다.

탁상 위에서 엎어진 컵 세 개가 빠르게 뒤섞이고 있었다.

돈을 건 손님은 컵을 골랐고, 그 아래가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절규했다.

“이, 이건 사기야!”

“허허. 다시 도전하시겠습니까?”

“좋아! 이길 때까지 간다!”

사내의 외침에 구경꾼들이 왁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이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런 것도 했었지.’

분명 페어윈드에서도 비슷한 도박을 했었다.

그때가 딱 플로라를 두 번째 마주쳤을 때였다.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플로라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걸까?

플로라는 아련한 얼굴로 야바위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구경하고 있자니, 앞서서 돈을 걸었던 사내가 구슬을 맞추는 데에 성공했다.

“아자!”

“허허. 축하드립니다.”

끝끝내 돈을 따가는 사내에게 구경꾼들이 갈채를 보냈다.

그제야 민망해진 듯, 머리를 긁적인 사내는 자리를 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바람잡이였던 건가?’

아무래도 좋다.

이안은 앞으로 걸어가 야바위꾼에게 금화 하나를 내밀었다.

가면 아래 야바위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먹이를 발견한 사냥꾼의 눈.

야바위꾼이 목청 높여 외쳤다.

“다음 도전자군요! 그것도 금화 한 개! 통이 크신 분이네요!”

“오오오!”

구경꾼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야바위꾼은 혹여나 이안의 마음이 바뀔까, 서둘러 구슬을 컵에 넣었다.

놀란 플로라가 이안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

“그냥. 옛날이 생각이 나서. 그때랑 비교해서 얼마나 변했는지도 보고 싶고.”

잠시 멈칫한 플로라가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집중하세요!”

애가 탔는지 야바위꾼이 이안을 보챘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바위꾼이 곧바로 컵을 섞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움직이던 손이 이내 엄청난 속도로 교차했다.

감탄스러운 솜씨.

‘옛날에는 이네스 님의 도움을 받았었죠.’

[지금은 어떤가요?]

‘다 보이네요. 너무나 선명하게.’

야바위꾼의 손은 빠르다.

웬만한 사람은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의 눈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렸다.

새삼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실감이 났다.

“하아, 하아, 다 됐습니다!”

손을 멈춘 야바위꾼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팔에는 땀이 잔뜩 맺혔다.

전력을 다한 것이리라.

이안은 왼쪽 컵에 턱짓하며 말했다.

“저거요.”

“……확신하십니까?”

“예.”

야바위꾼의 손이 벌벌 떨렸다.

그도 알았다. 이안이 선택한 컵이 맞다는 걸.

이안은 야바위꾼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 사기를 치겠지?’

이런 일을 하는 놈들이 대개 비슷하다. 이안은 페어윈드에서 도박꾼을 때려눕혔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야바위꾼은 아무런 속임수도 없이 컵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서 구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졌습니다. 귀신같은 눈썰미를 지닌 분이시군요.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너무나 깔끔한 인정.

그 어조에서는 개운함까지 느껴졌다.

[온몸을 부딪혀 싸운 승부사에게 승패란 중요하지 않은 법이죠.]

주인은 주머니를 꺼내 이안에게 주기 위한 동전을 셌다.

금액이 금액이니, 아마도 이번 축제에서 번 돈은 죄다 토해낼 것이다.

이런 인파에서는 나중에 무력을 써 다시 빼앗기도 불가능할 터.

‘승부사라…….’

이안은 사내의 손에서 아까 건네주었던 금화만 쏙 빼갔다.

“이거면 됐어요.”

“예?”

“애초에 돈 벌려고 한 건 아니라서요. 솜씨 좋던데요? 더 열심히 해보세요.”

교단을 등에 업은 지금, 금화 한두 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 이런 큰돈을…….”

이안의 호의에 감격했는지, 야바위꾼의 손이 떨렸다.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땀을 쥐는 승부를 보여준 것에 대한 감사와 이안의 호탕함에 갈채를 보냈다.

다시 돌아온 이안에게 플로라가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썰미 하나는 대단하네.”

“아니. 옛날보다 훨씬 나아진 거야. 그때는 내 눈으로 본 게 아니거든.”

“뭐?”

플로라의 반문을 무시한 이안이 이번에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바로 앞 광장에서 재밌어 보이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기왕이면 축제를 제대로 즐겨야지.’

플로라가 왜 나오자고 떼를 썼는지 그 의도를 알 것도 같았다.

아마 로드릭을 구출하면, 그때부터 황제와 제대로 맞서야 한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플로라는 그 마지막을 즐겁게 보내고 싶었던 거다.

이안은 기꺼이 그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역시 시합에서 상대를 꺾고 이기는 것만큼 재밌는 건 없지.’

광장에는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자자! 제국 최고의 검사는 누구인가! 모두 도전해보세요! 1등 상품으로는 라파엘 공방에서 어떤 무기든 고를 수 있습니다!”

매년 건국제 때마다 열리는 역사 깊은 행사로, 시민들이 던지는 사과를 얼마나 많이, 깔끔히 베어내느냐를 겨루는 시합이었다.

이안은 1등 상품에는 관심 없었다. 원하는 건 오로지 승리의 즐거움뿐.

‘가뿐히 이겨줄까.’

이안의 실력이라면 적수는 없을 것이다.

목을 뚜둑― 하고 꺾은 이안이 참가 신청을 했다.

‘나 말고는…… 10명 정도 참여하나?’

참가자들은 의외로 다들 실력이 있어 보였다. 상품에 눈이 멀어 참여한 어중이떠중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행사에서 꼴찌를 하는 참가자는 관객들한테 사과로 얻어맞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제가 어렸을 때는 너무 많이 얻어맞아 팔다리가 부러진 사람도 있을 정도였죠. 그리운 추억이네요.]

‘……그리워할 만한 구석이 있나요 그거?’

어쨌든, 생각보다 더 진지한 분위기의 행사라고 한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았다.

상대가 더 강해야 꺾는 맛이 있는 법이니.

[뭐. 이안이라면 문제없겠죠. 기사단장 정도라도 몰래 참가하는 거 아니라면.]

이네스의 응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은 성검을 쥐고 사회자가 안내해준 곳으로 섰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이안에게 이죽거렸다.

“뭐냐 그 허름한 검은. 꼴찌 할 일은 없겠구만.”

“친구. 험한 꼴 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게.”

이안은 그런 반응들을 가뿐히 무시했다.

어차피 시합이 시작되면 순식간에 휩쓸려 나갈 이들이었다.

사회자가 외쳤다.

“네! 모든 준비가 끝났네요! 참가자들은 부디 명예롭게 대결해주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서로에 대한 적절한 견제는 허용되니, 유의해주세요! 그럼 모두 준비!”

관객들이 바구니에서 사과를 집어 들었다.

스텔과 플로라도 사과를 집었다.

스텔이 빈손을 이안을 향해 흔들었다.

아마 그녀 나름의 힘내라는 표현일 거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이안은 제대로 자세를 잡고, 사회자의 말에 집중했다.

“그럼 준비하시고…… 시작!”

그 순간.

시민들이 일제히 사과를 던졌다.

숫자가 숫자인 지라, 아무리 사과라도 제법 위협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다소의 견제가 허용된다는 건…… 그냥 치고받고 싸우라는 거지!’

퍽!

“끄악!”

“끄억!”

이안은 몸통박치기로 참가자 둘을 날려 버렸다.

그 뒤, 박치기를 날려 한 명을 기절시킨 뒤, 검을 내려치는 상대의 가슴을 걷어차 쓰러트렸다.

이 모든 동작이 일어난 건 단 한 순간.

곧바로 다음 희생양을 찾으려는 이안이 움직임을 멈췄다.

이안을 제외하고 제대로 서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었다.

정사각형 모양 가면을 쓴 검사가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랑 비슷한 속도로 검사들을 쓰러트렸다고?’

범상치 않은 실력이었다.

이런 실력을 가진 사람이 이안 말고도 참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놀란 건 상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잠시 굳어 있던 검사가 중얼거렸다.

“너…….”

그러고는 이쪽을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너! 입단해라! 거절은 용납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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