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마지막 평화(2)
“너! 입단해라! 거절은 용납 못 한다!”
길게 기른 머리를 한데로 묶은 사내가 그렇게 외쳤다.
황당해진 이안이 중얼거렸다.
“뭐?”
“긴말은 필요 없다! 기절시켜서라도 데려가겠어!”
갑자기 사내가 검을 들고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카가강!
이안은 성검을 들어 사내의 검을 가볍게 흘리려 했다.
하지만…….
‘뭐야 이거.’
강하다.
사내의 검에는 예상보다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충격을 전부 흘려내는 게 버거울 정도로.
정신 없이 공세를 이어가던 사내가 돌연, 검을 크게 휘둘렀다.
후웅!
강한 풍압이 주위로 소용돌이쳐 날아오던 사과들을 모조리 튕겨 보냈다.
평범한 경지의 인간은 할 수 없는 기예.
이 정도 수준이라면 분명…….
‘초인이다.’
초인을 갑자기 마주치다니.
이 난데없는 조우에 이안은 정신을 집중했다.
‘익숙한 검술이야. 얼마 전에도 봤었어. 저건…… 리어폴드랑 같은 검술이야. 성취가 아득히 높아서 문제지.’
그렇다면 상대가 누군지도 짐작이 갈 것 같았다.
[강철 기사단의 기사단장. 이번 대의 검성이라는 칭호를 가진 사내겠네요.]
‘그런 괴물이 대체 이런 행사에는 왜 참여한 건데요!’
[글쎄요…… 이안과 비슷한 이유 아닐까요?]
그리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사가 엉망이 되었으니 사회자가 막아줄 거라는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자는 열심히 뭐라 외쳐대며, 흥분해서 둘 간의 싸움을 중계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이 때아닌 눈 호강에 환호하고 있었다.
전통이고 뭐고, 즐겁기만 하면 상관없는 눈치였다.
‘이런 씨!’
이를 악문 이안은 상대의 검에 집중했다.
어중간한 마음으로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우선 막아내는 거에 집중하자.’
상대는 무자비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이안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덕분에 틈이 생겼고, 이안은 그 틈을 이용해 기사단장의 검을 막아냈다.
예상보다 싸움이 길어지자 기사단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기대 이상의 실력이군! 나이도 어린 건가? 우리 기사단에도 이런 젊은 천재들이 둘이나 있었지!”
“윽! 기사단이고 뭐고 관심 없다니까요?”
“기개가 있군! 더 탐이나! 포기할 수 없어! 너는 꼭 데려간다!”
그렇게 외치는 기사단장의 목소리에는 광기마저 느껴졌다.
척추가 쭈뼛 서는 느낌.
이안은 검을 휘두르며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계속 싸우는 건 위험하다.
이목이 쏠릴수록 정체가 탄로 날 확률이 점점 커진다.
그렇다고 빠져나오기 위해 이 주변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가는 곧바로 수배령이 내려질 거다.
‘잠깐. 생각해보니 강철 기사단이면 황궁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발상의 전환.
아직 황제와 그 측근들은 이안의 정체를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
수배가 내려진 건 오직 플로라뿐.
이 상황을 잘만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쉽게 황궁에 잠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다른 방안이 없기도 하고…….
이안이 뒤로 물러서면서 급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얘기 정도는 들어볼 테니 칼 좀 그만 휘둘러요!”
“오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이군. 잘 생각했다. 따라오도록!”
깔끔하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기사단장이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당연히 따라올 거라고 믿는 듯한 모습.
잠깐 도망갈까도 생각했지만 이안은 그만두었다.
초인과 추격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아아! 갑자기 두 검사가 싸움을 멈추고 함께 걸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비켜.”
“예?”
열심히 외쳐대는 사회자를 옆으로 치운 기사단장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안은 그 뒤를 따르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플로라와 스텔이 보였다.
‘아. 얘길 해야지.’
이안은 손안에 호크를 소환했다.
“핍.”
“쉿. 스텔한테 있다가 내 의사를 전달해. 알겠지?”
“핍!”
날개를 척 들어 경례하는 듯한 모습을 취한 호크가 은밀히 날아 스텔에게 향했다.
스텔은 날아오는 호크를 손안에 받았다.
“…….”
“핍핍!”
호크가 스텔의 손바닥 위에서 몸짓을 하며 울어댔다.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핍!”
“저, 정령이 뭐라고 한 건가요?”
플로라가 당황하며 물었다.
스텔은 잠시 생각을 곱씹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머릿속으로 단어를 고른 스텔이 말했다.
“정확하지는 않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좀 말해봐요!”
“……미안.”
“아, 아니. 그렇게 사과를 해 버리면…… 어쨌든. 빨리 알려주세요.”
“계획대로 하래.”
“계획이요?”
“응.”
플로라는 황궁에 마법을 날려 시선을 끌고, 그사이 이안이 잠입해 로드릭을 구출하는 계획.
정답이라는 듯, 호크가 고개를 여러번 끄덕였다.
“핍핍!”
“스텔 씨의 말이 맞나 봐요…… 그럼 우리끼리…… 우리끼리?”
플로라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스텔과 단둘이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걸.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
황궁은 두 개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성과 내성.
강철 기사단을 비롯한 조직들은 전부 외성과 내성 사이의 공간에 들어차 있었다.
기사단장을 뒤따라간 이안은 너무나 쉽게 외성을 통과할 수 있었고, 이내 기사단의 본부에 도착했다.
강철 기사단의 본부는 새로 지어진 화려한 건물이었다.
마치 현 실세임을 뽐내기라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부터 네가 자고 생활하며 일 할 곳이다! 어때! 멋있지?”
“아직 기사단에 들어간다고 확정된 건 아닙니다.”
“하하! 곧 마음을 고쳐먹게 될 거야.”
기사단장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대리석을 깔아 만든 바닥이 번쩍거렸다.
이따금 지나가는 기사들이 기사단장을 알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하지만 그 숫자는 별로 없었다.
이안이 그 점에 관해 물으니, 기사단장이 명쾌하게 답했다.
“우리에게 1년 중 가장 바쁠 때가 바로 건국제다. 워낙 신경 쓸 곳이 많거든.”
“……그런 상황에서 기사단장이 한가하게 축제 행사에 참여해 놀아도 되는 겁니까?”
기사단장이 펄쩍 뛰었다.
“놀다니! 뛰어난 인재를 영입하는 건 모든 조직의 가장 우선시하는 상황이라고! 특히 강철 기사단은 지금 인력난이고.”
“……그 인재를 축제에서 찾으시는 겁니까?”
“사과 베기 행사는 매년 괜찮은 검사들이 참가하거든. 그래서 일부러 미끼도 일부러 큰 걸로 걸고. 실제로 너를 낚았잖아?”
이안은 말문이 막혔다.
축제 행사를 인재 수급의 기회를 사용하는 건 몹시 황당했지만, 실제로 이안이 이렇게 붙잡혀 오지 않았던가.
이안이 아닌 다른 검사였다면 첫합에 머리를 두드려 맞고 기절해서 끌려왔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끌려온다면…….’
[그대로 강제 입단이겠죠.]
실로 악랄한 채용 방법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기사단장이 걸음을 멈춘 곳은 웬 취조실처럼 생긴 방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기사단장은 이안이 들어온 걸 확인하고, 그대로 문을 잠가 버렸다.
“……꼭 문을 잠가야 하나요?”
“하하. 습관 같은 거야.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말한 기사단장은 그제야 가면을 벗었다.
기사단장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흉터가 있지만, 그래도 호쾌한 미남이라는 느낌의 중년이었다.
기사단장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가면, 안 벗나?”
“꼭 벗어야 합니까?”
“뭐. 딱히 상관은 없지만, 앞으로 함께 일할 사이면 그래도 얼굴은 알고 있는 게 낫지 않나?”
이미 이안이 기사단에 들어온 게 확정인듯한 말투.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흠…… 뭐. 이해한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우선 인적사항에 대해 말해보도록.”
이안은 적당히 답했다.
고아 출신이라는 것.
가끔 의뢰를 받으며 대륙을 떠돈다는 것.
내세울 만한 신분은 없다는 것.
기사단장은 이안의 이야기를 주의하여 들었다.
그 안에 모순이라도 있지 않은지 간파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래. 고아에 내세울 만한 것도 없고, 적을 둔 곳도 없다라. 그런데 그런 실력을 갖췄다고?”
“뭐. 어쩌다 보니요?”
“흠. 선뜻 믿기는 어렵군.”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사실인걸. 직접 조사해보셔도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해볼 걸세.”
이안에게는 별문제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당장의 상황만 모면하면 될 뿐이고, 찾고자 해도 이안의 흔적을 잡아내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안은 의도적으로 말을 빙빙 돌리며 대화를 길게 끌었다.
일부러 시간을 끌기 위해.
한참을 대화하던 기사단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끙. 어째 이야기가 잘 진행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글쎄요.”
이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사단장은 시간을 슬쩍 확인하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이제 곧 중요한 행사가 있으니, 일어나 봐야겠어.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도록.”
그 행사가 무엇인지, 이안도 잘 알고 있었다.
중앙 광장에서 있을 황제의 연설.
애초에 황궁의 방비가 가장 허술할 그 시기를 노려 계획을 세웠었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서기 전, 기사단장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나한테 궁금한 게 있나?”
“음. 딱히…….”
딱히 없다고 답하려던 이안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아까 저랑 검을 부딪힐 때, 저랑 비슷한 재능들이 있다고 했는데. 그건 누구인가요?”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당장 이안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리어폴드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왜인지 기사단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둘 다 없다. 한 명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한 명은 대륙을 떠돌아다니고 있지.”
“어…….”
“기다리고 있도록. 갔다 오면 다 말해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기사단장이 문을 박차고 나섰다.
홀로 남겨진 이안은 굳게 닫힌 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
황도의 중앙 광장에는 인파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감으로 웅성거렸다.
황제가 즉위하고 처음으로 하는 건국제 연설이었기 때문이다.
황태자시절부터 인기가 있었던 황제인 만큼, 사람들의 기대감도 높았다.
“황제께서 어떤 연설을 하실까?”
“글쎄.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셨으니, 의례적인 말만 하시지 않을까?”
“모르지. 난 왠지 남부 왕국 놈들에 대한 얘기를 할 것 같아. 그놈들. 감히 폐하의 권고를 무시하고 주제넘게 전쟁질이나 벌이고 있잖아?”
“그나저나 언제 오시지? 이제 예정된 시각인데…….”
“혹시 늦으시나?”
예정된 시각이 되었는데, 황제는 등장하지 않았다.
혹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인가?
몇몇 시민들이 실망을 토해내려던 그때.
광장을 비추던 마법 등이 일제히 꺼졌다.
주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민들이 당황하려 할 때, 다시 불이 켜졌다.
그리고 중앙 광장에 마련된 단상 위에는 어느새 황제가 서 있었다.
그 극적인 효과에 시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폐하다!”
“와아아아! 황제 폐하께서 오셨다!”
황제는 뜨거운 백성들의 반응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위의 반응이 더더욱 소란스러워졌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황제가 입을 열었다.
“조용.”
크게 외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의 목소리는 낮게 울려 광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황제의 한마디에 거짓말같이 소란이 잦아들었다.
그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본 황제가 말했다.
“대륙이 어지럽다. 왕국들은 내 권고에도 불구하고, 헛된 전쟁에 무고한 젊은이들의 목숨을 밀어 넣고 있다. 이는 왕국들이 나를 무시할 만큼 내가 못 미덥기 때문이겠지.”
“아닙니다!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빌어먹을 왕국놈들!”
곧바로 터져 나오는 분개한 목소리들.
하지만 황제가 손을 들어 올리자 다시 소란이 잦아들었다.
황제는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은 그간 너무나 많은 관용을 보여왔다. 관용과 용서. 제국에서는 훌륭한 미덕으로 여겨지는 것들이지. 하지만 왕국들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더군.”
황제는 잠시 말을 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 평민, 성직자, 농민 할 거 없이 모두 황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발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얼굴.
황제는 이런 순간이 아주 좋았다.
그렇기에 예정보다 아주 살짝 더 뜸을 들이고, 본론을 내뱉었다.
“그렇기에 나는 결심했다. 더는 저 무도한 자들에게 관용을 보이지 않기로. 설령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대륙의 질서를 바로잡기로!”
황제가 단상을 양손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탕!
“전쟁! 전쟁으로써 평화를 되찾겠다! 그리고 그 첫 목표는…… 텔 왕국이 될 것이다.”
“…….”
잠깐의 침묵.
그리고 이어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
“본때를 보여주자!”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그 뜨거운 반응을 음미하던 황제가 뒤에서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 있던 대현자, 오테르에게 말했다.
“오테르 경. 마법을 준비해주시오. 곧바로 왕국 놈들한테 뜨거운 맛을 보여주어야겠소.”
“하지만 폐하!”
“해주시오. 경.”
오테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황제를 보다,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후우. 알겠습니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한숨을 푹 내쉰 오테르는 마법을 준비했다.
그의 주특기인 공간 마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