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구출
대현자 오테르. 그의 주특기는 공간 마법이다.
머릿속에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불이나 물, 흙 따위의 원소와 달리 공간이란 추상적인 개념.
그렇기에 대륙에서 공간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 오테르 하나뿐이었고, 그가 정확히 어떤 마법을 다루는지 아는 이들이 적었다.
“신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비통한 얼굴로 기도를 읊은 오테르가 정신을 집중했다.
오늘을 위해 수개월 간 의식을 준비해놨다.
동물의 피로 그린 마법진을 타고 푸른빛이 솟아올랐다.
마법진은 황궁의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오테르는 마지막까지 갈등하다, 이내 마법을 발동시켰다.
파아아아앗!
푸른 섬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모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주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텔 왕국의 왕과 귀족들은 흥겨운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취해 있는 왕에게 곁에 있던 귀족이 속삭였다.
“허허. 전쟁에서 승리할 일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승리만 한다면 제국의 애송이 황제 놈도 뭐라 못할 것입니다.”
왕이 포도주를 쭉 들이켜고는 외쳤다.
“좋구나! 좋아! 모든 게 순조로워! 하하! 전쟁 배상금을 얼마나 받을지나 생각해보자고!”
텔 왕국은 위태로운 벼랑 위에 서 있었다.
날이 추워짐으로써 식량이 줄고, 사람들이 굶주리니 전염병마저 돌고 있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역량이 왕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알론 연합에 전쟁을 건 것이고.
하지만 손쉽게 이길 것이라 생각했던 전쟁은 대칸과 초원의 전사들이 참전하면서 장기화되었다.
귀족들과 장군들은 자신들의 실패를 들키지 않기 위해, 왕에게 거짓 보고를 올렸다.
덕분에 왕은 간신들에 둘러싸여 금방이라도 찾아올 승리에 취해 흥청대는 나날을 보냈다.
테라스로 나간 왕은 밤하늘의 달을 향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좋구나. 달도 밝고. 마치 신께서 왕국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맞습니다. 전하께서 통치하시는 한, 왕국은 영원불멸한 영광과 명예를 누릴 것이옵니다. 그리고…… 어?”
열심히 아부하던 귀족의 얼굴이 놀라움이 물들었다.
밤하늘이 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오로라? 분명 북쪽 지방에서만 관측되는…….”
“실로 아름답구나!”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신께서도 전하를 인정하신다는 확고한 증거이겠지요.”
“허허허.”
이 갑작스러운 사건에 모두가 즐거워했다.
하지만 단 한 명.
한때 장군의 자리까지 맡았던 늙은 귀족만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검은 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음?”
“떨어지고 있다니요. 아무래도 취하신 것 같소 허허허!”
“아니, 저기 분명히…….”
그 순간이었다.
쿵!
굉음과 함께 궁전의 정원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저릿저릿한 기운.
기운에 노출된 왕과 귀족들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범을 마주친 토끼처럼.
곧 흙먼지가 걷혔다.
정원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는 밤하늘보다도 더 어두운 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가 붉은 안광을 빛내며 서 있었다.
그가 손에 든 무식하게 큰 대검을 알아본 몇몇 이들이 중얼거렸다.
“흐, 흑기사?”
“말도 안 돼. 그건 교단에서 애들 겁주려고 지어낸 이야기잖아.”
“하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흑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그 붉은 안광과 마주친 귀족들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손에 든 술잔을 놓친 왕도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저런 게 들어올 동안 기사들은 뭘 한 거야! 뭣들 하느냐! 당장 저걸 죽여!”
안 그래도 이미 궁전의 모든 병력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동안 흑기사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병사들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궁전의 경비를 맡은 기사단장은 병사들을 격려했다.
“모두 겁먹지 마라! 상대는 하나다! 훈련받은 대로만 싸운다면 어려울 것 없다!”
하지만 기사단장 역시 알고 있었다.
눈앞의 저 존재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젠장. 하필 주요 병력이 전선에 나가 있을 때 이런 일이…… 대체 성벽은 어떻게 넘어 온 거야.’
마침내 진형이 완성되었다.
기사, 병사, 마법사들이 흑기사를 둘러쌌다.
“…….”
전투 전에 숨 막힐듯한 적막이 흘렀다.
옆 사람이 침 삼키는 소리, 심장 뛰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제 기사단장이 명을 내리면 전투가 시작될 거다.
하지만 기사단장은 선뜻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도 그의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 한다는 걸.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던 그때.
흑기사가 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와라. 전부 먹어주겠다.”
“모두 공……!”
소름끼치도록 낮게 울리는 목소리.
그제야 기사단장은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한 호흡 늦었다.
흑기사가 대검을 한 바퀴 휘둘렀다.
칠흑빛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콰과과곽!
“끄아아악!”
“컥!”
일반 병사들은 검광을 조금도 버텨내지 못했다.
일격에 전열이 허물어졌다.
심지어 몇몇 기사와 마법사조차도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그만큼 흑기사의 검광은 강력했다.
‘대체 무슨 위력이 이렇단 말인가!’
검광을 막아낸 기사단장은 손이 저릿한 감각을 느끼며 공포에 젖었다.
분명 그 역시 검광을 피워낼 수 있는 초인. 하지만 초인끼리도 격차는 있는 법이다.
“먹겠다.”
흑기사의 갑옷이 세로로 갈라지더니 사람 팔처럼 생긴 것들이 뻗어 나와 시체를 끌어당겼다.
기사단장은 깨달았다.
흑기사가 말한 ‘먹는다’의 의미를.
이를 악문 기사단장이 달려나가며 외쳤다.
“모두 돌격!”
노란색 검광이 기사단장의 검에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도 애써 두려움을 이겨내며 함께 달렸다.
기사단장은 생각했다.
‘내가 막아야 한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내야 한다!’
간절한 마음이 역량을 끌어올렸다. 기사단장의 검광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빛나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해낼 수 있다.
그런 희망이 기사단장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달려드는 기사단장을 보며 흑기사가 대검을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칠흑의 검광이 대검을 두껍게 감쌌다.
흑기사가 물었다.
“강한 기사. 이름을 대라.”
“나는 백사자 기사단의 기사단장, 라크 지우렐로다!”
“라크 지우렐로. 기억하겠다.”
흑기사가 든 대검이 그 무게와 크기에는 어울리지 않은 속도로 내리쳐졌다.
기사단장은 고함을 지르며 검을 들어 올렸다.
검과 검이. 검광과 검광이 격돌했다.
콰아아아!
검은색과 노란색 빛이 어우러졌다.
노란색이 순식간에 검은색에 잡아먹혔다.
선명했던 노란 검광이 흐릿해졌다. 검광이 이내 사라져 버렸다.
“컥!”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기사단장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흑기사는 기사단장의 몸도 ‘먹었다’.
그날.
텔 왕국의 궁전은 초토화되었으며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전멸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왕은 궁전을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그리고 흑기사에 대한 소문이 대륙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
방안에 홀로 남겨진 이안은 생각했다.
‘황제의 연설 때문에 지금쯤 황궁의 경비는 허술해져 있겠지. 기사단장도 없을 거고.’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절호의 시기였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할까.’
기사단장은 이안을 방 안에 홀로 내버려 두고 갔다.
하지만 그가 부주의한 건 아니었다.
[잘 보면 굉장히 튼튼하게 지어진 방이에요. 빠져나갈 창문이나 틈도 없고요.]
‘문도 꼼꼼히 잠가놨어요. 안쪽에서는 못 열게요.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란 거겠죠.’
이런 식으로 가둬두면서까지 인재를 모으려 하다니.
기사단장이 이상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기사단의 인력 부족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안은 시험 삼아 문을 두들겨 보았다.
예상외로 밖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래도 보초까지 세워둔 모양이다.
이안이 물었다.
“저기요. 문이 잠긴 것 같은데요?”
“단장님께서 돌아오시기 전까지는 내보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해해주십시오.”
“용변이 급한데요?”
“미리 요강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깨끗이 사용해주십시오.”
‘아. 진짜네.’
어쩐지 방구석에 부자연스러운 항아리가 하나 있다 했더니, 알고 보니 요강이란다.
새삼 황당해진 이안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니.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가둬두는 건데요.”
“단장님께서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인재라고 했습니다. 다소의 무례는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흠…….”
아무래도 좋은 말로 해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피에람의 긍지로 바닥을 녹여? 아니면 태양의 활로 건물 전체를 날려 버릴까? 아니. 벌써 이목을 끄는 건 좋지 못해. 가급적 은밀히 빠져나가고 싶은데…….’
이안은 굳게 잠긴 문을 다시 살폈다.
쇠로 만들어져 튼튼하고 무거운 문이었다.
쉽게 부수기는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경첩이 문만큼 단단할까?’
이안은 가볍게 몸을 풀며 말했다.
“밖에 계신 분.”
“예.”
“위험하니까 물러서세요.”
“예?”
쿵!
이안은 쇠문을 향해 힘껏 부딪혔다.
어깨에 전해지는 짜르르한 충격.
쇠문이 덜컹거렸다.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 무, 무슨 짓을 하시는 겁니까!”
“아이씨 엄청 아프네. 마지막 경고에요. 물러서세요. 다치기 싫으면.”
쿵!
이안이 다시 한번 쇠문과 부딪혔다.
아까보다 흔들림이 거세졌다.
헛된 시도가 아니라는 증거였다.
그리고 이안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쿵! 쿵! 쿵!
이안이 연달아 쇠문에 부딪혔다.
당황하던 기사는 이안을 말리려다, 나중에는 쇠문의 반대편에서 힘껏 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문에 어깨를 들이박았다.
그렇게 십수 번을 부딪쳤을 쯤. 마침내 쇠문이 버티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넘어갔다.
쾅!
“악!”
반대편에서 버티고 있던 기사가 문에 깔려 버둥거렸다.
이안은 쇠문을 치워 기사를 구해주었다.
“아, 가,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갑옷 보기 좋네요.”
“예?”
“잠시 좀 빌려 갈게요.”
퉁!
이안은 기사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기사가 게거품을 물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안은 기절한 기사를 안으로 끌고 들어가, 갑옷을 벗겨 자기가 입었다.
처음 입어보는 갑옷.
이안은 낯선 느낌에 팔을 붕붕 휘둘러보았다.
‘좋네요. 생각보다 불편하지는 않아요. 몸이 둔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별로 입고 싶지는 않지만.’
[강철 기사단의 갑옷이라면 최상급의 품질일 테니까요.]
갑옷을 입은 이안은 다시 쇠문을 대충 세워둔 뒤, 당당하게 복도를 걸었다.
기사들이 이따금 복도에서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이안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람 자체가 적기도 했고.
‘곧 황제가 연설할 시간이네요. 빨리 별관으로 가서 로드릭을 구출해야겠어요.’
이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는지, 처음 보는 복도에 들어섰다.
복도의 양옆에는 검이 한 자루씩 전시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먼저 떠나간 전우들을 추억하며]
검 아래에는 전사한 기사단원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묘지처럼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이안은 빠르게 걸으면 검들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유독 화려하게 장식된 검 앞에서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모두를 구해낸 영웅]
[릴리 리안]
검 앞에는 하얀 꽃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피에람의 폐허에 심겨 있던 것과 똑같은 종류의 꽃이었다.
‘릴리 리안?’
게임에서도, 이곳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잠시 그 이름을 곱씹던 이안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시간 여유가 별로 없었다.
어서 로드릭을 구출하러 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