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56화 (157/222)

156. 구출(2)

단둘만 남게 된 플로라와 스텔. 아니, 호크까지 합쳐 셋만 남은 그들은 오폐수가 흐르는 하수도를 따라 걷고 있었다.

“으으! 뭔가요 이 냄새는!”

“…….”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지……!”

플로라는 손에 든 지도를 들고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구역질 나는 공간에서는 한순간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황궁으로 침입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윽! 튀었잖아.”

중앙에 흐르던 오폐수는 이따금 위로 튀어 플로라의 발을 적셨다.

그럴 때마다 플로라는 기겁해 뒤로 물러나곤 했다.

“정말. 왜 하필 이런 곳을 지나가야 하는 건지…….”

플로라의 입에서 계속해서 불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플로라가 정말로 못 참을 정도로 짜증이 나서 불평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사람이 둘 이상 함께 있으면 반드시 무슨 말이라도 나눠야 하는. 어색한 침묵을 싫어하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적당히 아무 말이나 뱉어본 것.

하지만 스텔은 묵묵부답이었다.

스텔은 꼭 필요할 때 아니면 말을 안 하는 종류의 사람이었으니.

그 점이 야속했던 플로라 뒤를 휙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스텔의 옷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깨끗하다는 걸.

“그, 그거 어떻게 한 건가요!”

“……?”

스텔의 고개를 갸웃했다.

플로라는 스텔의 옷을 가리키며 다시 외쳤다.

“엄청 깨끗하잖아요! 어떻게 오수가 안 튄 거죠?”

“……신성을 몸에 둘러서 튕겨냈어.”

“그런!”

대단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플로라가 신경 쓴 건 다른 부분이었다.

“그런 게 가능하면서, 왜 말 안 했던 건가요!”

“……안 물어봤으니까?”

“그런! 그런!”

플로라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야속하던 스텔이 좀 더 미워 보였다.

그런 반응에 의아해하던 스텔이 물었다.

“……해줄까?”

“부. 탁. 드. 리. 겠. 습. 니. 다.”

“응.”

스텔이 가볍게 손짓하자, 하얀 빛무리가 플로라를 감쌌다.

그 순순한 태도에 플로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도 알았다.

스텔에게 나쁜 뜻이 있어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앞으로 함께 하려면 익숙해져야겠지.’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어도, 실력 하나는 출중하지 않나?

플로라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여기서는 어른스럽고 지혜로운 내가 참…… 어?’

지도를 든 플로라가 갑자기 멈춰 섰다.

스텔과 호크가 그런 플로라에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플로라는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어, 어라? 갈림길이 왜 두 개가 아닌 세 개지?”

“핍…….”

“…….”

호크의 한심하다는 눈빛과 스텔의 무감정한 눈빛이 플로라의 뒤통수에 꽂혔다.

플로라의 귀와 목덜미가 빨갛게 익었다.

스텔이 그런 플로라의 뒤에서 지도를 훑어보며 말했다.

“지도. 뒤집혔어.”

“그럴 리가!”

플로라가 황급히 지도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고는 스텔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사, 사,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왜 그런 식으로 쳐다보나요!”

“피입…….”

호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플로라의 얼굴이 더더욱 빨개졌다.

“…….”

내려앉는 침묵.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스텔이 고개를 돌리며 짧게 말했다.

“되돌아가자.”

“네…….”

플로라는 고개를 축 숙이고 스텔의 뒤를 따라갔다.

벌써부터 이안이 그리워졌다.

***

이안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마음 같아서는 뛰어가고 싶었지만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 둘도 지금쯤 황궁으로 가는 중이겠지?’

문득, 스텔과 플로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만 둬도 괜찮으려나?’

솔직히 말해 못 미더웠다.

늘 멍한 스텔도 그렇지만, 허당기가 있는 스텔도 영 불안했다.

호크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동료잖아요. 좀 더 믿어보는 게 어떨까요?]

‘믿고 있어요. 그래도 만약의 상항에 대한 대책은 생각해둬야지 않을까요? 믿고 있지만요.’

[…….전혀 안 믿고 있는 것 같은데요.]

플로라와 스텔의 역할은 시선 끌기다.

플로라가 황궁에 일격을 날리면,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이 전부 그쪽으로 쏠릴 것이다.

그 틈을 노려 로드릭을 구출하는 게 이안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만약 둘이 제때에 맞추지 못한다면…… 무력으로 뚫는 수밖에 없겠어.’

여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다.

병력이 조금 많더라도 이안 혼자서 쓸어 버리는 수밖에.

그리고 이안은 그럴 자신이 있었다.

‘기사단장 같은 초인만 아니면 내가 다 이겨.’

오만이 아닌 정확한 계산에서 오는 자신감.

객관적으로 봐도 이안을 상대할 만한 실력자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설령 있다고 해도, 지금쯤은 황제의 옆에 붙어 있을 거고.

‘기사단장. 오테르. 테이오스. 전부 황제 옆에 있겠지.’

아직 그 셋을 상대할 만한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갑옷을 입은 이안이 황궁을 힘차게 걷던 그때.

돌연, 이안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저건…….’

월안이 마법의 전조를 감지해냈다.

무언가 거대한 마법이 시전되려 하고 있었다.

이안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내 하늘에 푸른색 오로라가 펼쳐졌다.

여름. 그것도 황도에서는 상식적으로 보여서는 안 될 기현상이었다.

[대단한 마법이에요. 엄청난 힘이 느껴져요.]

‘마법을 사용한 뒤에 푸른색 오로라가 떠오르는 건 분명…….’

이안의 머릿속에 딱한 명.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대현자 오테르?’

저 오로라처럼 보이는 현상은 오테르가 마법으로 공간을 일그러트릴 때 발생한다.

그렇다면 오테르는 공간을 일그러트려, 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그것도 이런 대규모로.

이안은 오테르가 게임에서 사용하던 마법들을 되짚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마법이 금방 떠올랐다.

‘설마…… 공간이동? 공간이동으로 할 만한 건…… 이런.’

어느새 하늘을 수 놓던 오로라가 사라졌다.

이안은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진짜로 시간이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얘들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시작 안 하고.”

***

“드, 드디어 제대로 길을 찾아왔네요! 이제 앞으로 쭉 걷기만 하면 돼요!”

플로라와 스텔은 여전히 하수도를 헤매고 있었다.

스텔이 중얼거렸다.

“시간. 빠듯해.”

“윽! 죄송하게 됐어요!”

괜스레 찔린 플로라가 걸음을 서둘렀다.

셋은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플로라는 바닥에 새겨진 빨간 원 표식을 발견했다.

교단이 미리 남겨놓은 표식이었다.

“여기네요! 이 위를 뚫으면 된다고 했어요.”

“응.”

“물러서세요.”

플로라는 지붕을 향해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생겨난 자그마한 불덩이가 그녀의 손가락에 맞춰 천장을 훑었다.

치지지지직.

불에 닿은 천장에 원 모양으로 붉은 선이 그어졌다.

플로라는 그 선을 따라 불덩이를 몇 번이고 회전시켰다.

그렇게 수십 번 정도를 반복했을 때, 마침내 천장에 원 모양 구멍이 뚫렸다.

“핍!”

“…….”

스텔과 호크 모두 놀랐다.

이렇게 두꺼운 벽을 조용히 녹여 버리다니,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의아할 정도였다.

그런 시선에 자존심이 회복됐는지, 플로라가 턱을 치켜들었다.

“흥.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대단해”

“핍!”

“윽.”

예상외로 순순한 칭찬에 플로라가 볼을 붉혔다.

“그, 그건 됐고요! 어서 올라가죠!”

“응.”

플로라는 가볍게 불꽃을 다뤄 몸을 띄워 올렸다.

그 뒤를 이어 신성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스텔이 올랐다.

올라온 곳은 웬 창고 안이었다.

플로라는 주위를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여기는 외성과 내성 사이의 건물일 거예요. 이 바로 앞에 화원이 있으니, 숨기 좋을 거예요.”

“응.”

눈치를 살피던 둘은 방을 나서서 살금살금 걸었다.

전부 축제를 즐기러 나간 것인지, 복도의 조명이 모두 꺼져 있었다.

둘은 혹시라도 들킬까, 호크마저 품에 안고 달빛에 의지해 복도를 걸었다.

나가는 문은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초조한 마음의 플로라는 걸음을 서둘러 바깥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때.

출입구의 문고리가 돌아갔다.

누군가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최악의 타이밍.

플로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 들키기에는 너무 이르다.

하지만 숨을 만한 사각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떡하지? 마법을 날릴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숨어?’

갑작스러운 상황에 패닉에 빠지는 플로라.

그런 플로라의 머리 위에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무슨…….”

“쉬잇.”

스텔이 검지를 세워 코앞에 가져다 댔다.

플로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흐음?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데?”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만취한 귀족이었다.

귀족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플로라와 스텔이 서 있는 곳과는 그리 멀지 않았다.

고약한 술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귀족은 끝내 코앞에 있는 스텔과 플로라를 알아채지 못했다.

“기분 탓이었나?”

귀족이 사라지고, 플로라는 쿵쿵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

“어, 어떻게? 이것도 기적?”

“배웠어.”

성도에서 마리라는 여인은 신성을 이용해 기척을 지우고 은신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마리. 이안에게 자꾸 달라붙어서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기적은 굉장히 유용했다.

그래서 훔쳐서 사용했다.

그저 그뿐.

“다시 가자.”

“그, 그래요.”

스텔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플로라도 그게 스텔의 웃는 얼굴이라는 걸 알아채고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머, 멋있다.’

그저 맹하고 답답한 줄 알았던 스텔이 처음으로 멋져 보였다.

‘아니. 그보다 왠지 나를 어린애 다루듯 하는 것 같은 느낌은…… 기분 탓인가?’

왠지 느껴지는 찝찝함을 떨쳐낸 플로라는 스텔의 뒤를 따랐다.

그때.

하늘을 날던 호크가 울어댔다.

“핍!핍!”

고개를 끄덕인 스텔이 말했다.

“이안이 서두르래. 아마도.”

“이, 이미 약속된 시간은 넘겼으니까요. 그렇다면…….”

원하던 목적지까지 가기에는 아무래도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잠깐 고민한 플로라가 스텔에게 말했다.

“저는 이제부터 위로 날아오를 거예요. 황궁에서는 허가 없이 떠오른 물체들에 자동으로 마법이 발사되게 하는 장치가 있거든요?. 그러니 스텔 씨가 저를 지켜주세요.”

원래라면 하지 않았을 도박이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없었다.

스텔은 플로라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스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킬게.”

“좋아요.”

씩 웃은 플로라가 발밑에 불꽃을 터트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내성과 외성의 포문에서 형형색색의 투사체들이 플로라를 향해 뻗어왔다.

하지만 플로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높이 올라갔다.

스텔은 그런 플로라를 보며 기도를 올렸다.

강한 신성이 솟아오르며 플로라의 몸을 부드럽게 감쌌다.

콰광!

마법이 부딪혀 폭발을 일으켰지만 스텔의 장벽은 깨지지 않았다.

플로라는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고, 성벽에서는 공격 마법이 계속 날아왔다.

스텔은 정신을 집중해 플로라를 보호했다.

어느새 플로라의 몸이 성벽 위보다 높이 날아올랐다.

황궁을 비롯해 황도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축제 기간인 황도는 특히나 더 매력적이었다.

눈앞에서 마법이 터지건 말건 플로라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아름다움에 취했다.

“아름다워…….”

하지만 이내 그런 마음은 지워 버렸다.

플로라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불꽃이 그녀의 손 위에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드래곤과 싸울 때 터득했던 방식 그대로 불꽃을 키웠다가, 구슬 크기로 압축했다.

플로라가 양손으로 충분히 줄어든 화염 구슬을 손으로 쥐었다.

남아 있는 조금의 힘도 구슬 안에 전부 담았다.

그리고 마침내 구슬이 스스로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거세졌을 때, 플로라는 구슬을 가볍게 툭 밀었다.

구슬이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화아아악!

제국의 상징이자 긍지.

수백 년간 그 누구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던 황궁에…… 처음으로 흉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콰아앙!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이안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시작됐다.”

이안이 땅을 박찼다.

이제부터 시간 싸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