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대수림(4)
이안은 빠르게 숲속을 달렸다.
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싸우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지금 숲에서 이런 싸움을 벌일만한 이들은 명확했다.
‘찾았다!’
마침내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에 도착했다.
이안은 전황을 살폈다.
‘숲의 종족 전사가 스물. 그리고 상대는…….’
일전에 보았던 나무 괴수 둘이 그 흉측한 몸을 이끌고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적의 숫자가 열.
그들의 생김새는 언뜻 보면 숲의 종족과 비슷했다.
하지만 그 피부는 검게 변색하였으며, 눈동자는 나무 괴수와 마찬가지로 노랗게 빛났다.
오염된 숲의 종족. 다른 이름으로는 변절자들.
대수림 에피소드에서 플레이어의 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저들이 바로 숲에 들어온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범인이었다.
같이 전황을 살피던 이네스가 말했다.
[상황이 좋지 않아요.]
나무 괴수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불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하지만 숲의 종족중에는 플로라 정도의 강력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이들은 없다.
때문에 나무 괴수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놈을 둘러싸, 죽을 때까지 공격해야 하지만…… 문제는 괴수들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변절자들이 그걸 내버려 두지 않는다는 것.
그 때문에 전사들은 적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바로 도우러 가야겠어요.’
마침 나무 괴수 하나가 날아오는 공격을 무시하며, 그 거체를 숲의 종족들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 하고 있었다.
전사들이 황급히 양옆으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진열이 붕괴하였다.
그 와중에 피하지 않은 이가 있었다.
홀로 남은 그는 어떤 두려운 기색도 없이 괴수를 향해 외쳐댔다.
“와라! 너 따위는 한주먹거리도 안 된다!”
주름이 자글자글해, 그 표정조차 읽기 힘든 노인이었다.
주위에 물러난 전사들이 그제야 자신들의 실책을 깨닫고 외쳤다.
“안 돼!”
“피하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괴수는 지척에 도달해 있었고, 애초에 피할 생각이 없던 노인은 도끼를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마치 괴수를 반으로 쪼개버리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아아!”
전사들이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이제 저 괴물의 돌진에 노인의 몸은 짓뭉개질 것이다.
몇몇 이들은 곧 펼쳐질 끔찍한 광경에 눈마저 질끈 감았다.
용맹한 전사들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하나같이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어어?”
쩌적!
노인을 덮치리라 예상하던 괴수의 몸이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순간 그들은 노인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나무 괴수를 베었다고 생각했다.
놀란 건 변절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남은 괴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변절자들은 침묵했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침묵을 깬 건 노인이었다.
노인은 갑작스럽게 앞에 나타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엥? 넌 누구지?”
“이안이라합니다.”
“이안?”
그제야 전사들과 변절자들은 노인 말고도 한 명이 더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믿을 수 없지만. 나무 괴수를 단번에 벤 것도 저 사내라는 것도.
먼저 반응한 건 변절자들 쪽이었다.
그들은 검게 물든 나무로 만든 장궁을 들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이전에 해골에 박혀 있었던 것과 똑같이 굵은 화살들이었다.
쐐액!
화살의 속도는 빨랐다.
그 안에 상당한 힘이 실려있다는 건 굳이 부딪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화살촉에 서려 있는 거무스름한 기운.
숲의 종족이 다루는 자연의 힘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저것에 맞았다가는 위험하다.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그냥 피하…….’
이안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노인은 이안을 빤히 쳐다보며 코를 후비고 있었다.
피할 생각이 아예 없는 듯했다.
순간 그냥 버리고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숲의 종족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남겨버리겠지.’
그리고 다 늙은 노인을 내버려 두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이안은 성검을 들고,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새 화살은 지척에 다다라있었다.
이안은 검을 뻗었다.
탁.
성검은 정확히 화살촉의 옆면을 때렸다.
화살의 방향이 꺾였다.
이안은 곧장 다음 화살로 시선을 옮겼다.
조금 전에 느껴졌던 손맛으로, 화살에 담긴 힘을 기억했다.
그리고 찰나 동안 그 궤도를 계산했다.
생각을 마친 이안은 다음 화살의 화살대 부분을 내리쳤다.
파삭!
화살이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화살은 날아가던 힘을 잃지 못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두 개로 갈라져 회전하던 화살은 양옆으로 뻗어 나가 이내 다른 화살과 부딪혔다.
단 한 번의 칼질로 남은 화살의 절반을 쳐낸 것이다.
이쯤 오면 나머지는 쉽다.
이안은 검을 다시 휘둘러 남은 화살마저 마저 쳐냈다.
전사들은 이 기예에 가까운 놀라운 움직임에 감탄했다.
“검으로 저걸 쳐내다니…….”
“범상치 않은 실력이다.”
이안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건 변절자들도 알아보았다.
분한 얼굴로 다음 화살을 준비하는 동료들에게, 리더로 보이는 변절자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나무 괴수와 함께 미련 없이 후퇴해버렸다.
이안은 그 뒤를 굳이 쫓지 않았다.
이미 앞서서 나무 괴수를 베는 데 이미 검광을 사용해버렸기 때문이다.
구태여 귀찮은 싸움을 이어나갈 이유는 없었다.
적들이 모두 물러나자,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야. 도망치다니. 겁쟁이들이다.”
“…….”
중얼거리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이안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너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안이라고 아까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잉?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노인이 맹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제야 이안은 노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다른 전사들이 황급히 달려와 그런 노인을 말렸다.
“족장. 위험하면 피해라.”
“위험? 근데 너.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휴.”
어벙한 태도의 노인을 보며 전사들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곧 노인을 어딘가로 끌고 갔다.
남겨진 전사 중 하나가 이안에게 예를 표했다.
“족장을 구해줘서 고맙다. 은인께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이안이 멀어져가는 노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사람이 족장입니까?”
“그렇다. 보다시피…… 정신이 온정이 못한 상태다.”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숲의 종족도 치매에 걸리는 줄은 몰랐네요.’
[저들도 사람이니까요.]
그제야 이안은 노인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아이 같은 행동에 가려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잘 단련된 신체가 눈에 들어왔다.
늙어 버린 지금도 이 정도라면, 젊었을 때는 분명 대단한 전사였을 거다.
내심 속으로 감탄하는 이안에게 감사를 표한 전사가 물었다.
“한데, 은인은 어쩌다 숲에 들어온 거지……? 범상치 않은 전사인 것 같은데.”
“일단 설명하자면 긴데, 혹시 마을에 초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숲의 종족의 마을에는 오직 초대받은 인간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전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물론이다. 은인이 우리를 도왔는데, 우리도 응당 대접해야 마땅하다.”
“좋네요. 아, 그리고 동료가 있는데 함께 데려와도 되겠습니까?”
동료라는 말에 전사가 조금 당황했다.
“어, 혹시 동료가 몇 명인가?”
“저까지 네 명입니다.”
“아! 그 정도면 괜찮다. 예전에 너무 많은 손님을 받아들여서, 조금 좋지 않은 일들이 있었다.”
이해할 만한 일이다.
숲의 종족이 그토록 폐쇄적으로 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들이 있었을 테니.
안심한 전사가 이안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네 동료들. 어딨지?”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아.”
“왜 그러지?”
“……급하게 달려오느라 기억이 안 납니다.”
대수림은 참으로 길을 잃기 쉬운 곳이었다.
***
이안이 일행이 있던 곳을 찾은 건 그로부터 조금 후였다.
다음 불침번 순서였던 플로라가 이안이 사라진 걸 발견하고, 다른 일행을 깨웠던 것.
일행은 위험을 감수하고 이안의 이름을 크게 외쳤고, 덕분에 이안은 그들과 다시 합류할 수 있었다.
일행은 이안이 숲의 종족과 함께 오자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안의 얘기를 듣고, 조금 놀라워하면서도 빠르게 수긍했다.
이제 이안이 무얼 하든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그 뒤, 일행은 전사의 안내를 받아 마을로 향했다.
숲의 종족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신비로운 결계로 지켜지고 있는 곳이었다.
사람이나 괴수는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드는 결계.
그 결계 속에서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했다.
그 자연의 소리라는 게 정확히 뭔지 이안은 알 수 없었다.
그냥 숲의 종족만이 할 수 있는 재주 정도라고 생각할 뿐.
그렇게 숲길을 이리저리 걸은 끝에 일행은 마을에 도달할 수 있었다.
플로라는 한껏 들뜬 얼굴로 서둘러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고는 감탄을 터트렸다.
“와아아아…… 아?”
플로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도 그럴 게, 눈앞에 드러난 마을의 풍경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대수림 한복판에 나 있는 커다란 공터에 돌과 흙으로 지어진 집들이 큰 원을 그리며 지어져 있었다.
그들의 딱딱한 성격을 반영했는지, 집들의 모양이 각이 져 있다거나 목재를 최소한으로 썼다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
플로라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숲의 종족은 이야기책 속에서처럼 커다란 나무에 구멍을 뚫어서 모여 산다거나,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잔다거나 할 줄 알았는데…….”
플로라의 말을 듣던 전사가 정색했다.
“그거. 선입견이다. 우리도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모습이 조금 다를 뿐, 같은 인간이다. 대체 우리를 뭐라고 생각하나.”
“우우. 차별주의자.”
이안의 장난스러운 야유에 플로라가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충격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내, 내가 차별주의자였다니.”
고개를 홱 돌린 전사는 일행을 마을 중앙으로 인도했다.
마을의 분위기는 바깥의 로네트 보다 훨씬 어두웠다.
숲의 종족들은 시든 나무처럼 중앙에 모여 앉아 축 늘어져 있었다.
전사들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보며 잠시 흥미를 보였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일행을 안내한 전사는 그런 모습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선 족장한테 인사해야 한다.”
“아까 그 노인 말입니까?”
“아니. 지금은 족장의 아들이 족장 일을 대신하고 있다.”
“하긴…….”
치매 걸린 노인을 계속 일 시킬 순 없는 법이니.
전사가 안내한 곳은 다른 집들과는 별 특별할 것 없는 집이었다.
그 모습에서 숲의 종족은 계급 간에 차이 없이, 평등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말에 경어가 없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들어가겠다.”
전사는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며 말했다.
“은인을 데려왔다.”
집안에는 아까 보았던 노인과 그 아들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숲의 종족 특유의 큰 키에 빼빼 마른 체구.
기묘할 정도로 긴 팔과 다리.
나무 넝쿨을 연상시키는 풍성하고 억센 초록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고, 단단한 피부에는 신비로운 문신이 가득하다.
아직 앳된 얼굴의 족장 대행은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반갑다. 얘기는 들었다. 우마딜로라 한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음?”
왜인지 살가운 이안의 태도에 우마딜로가 의아해했다.
그는 꿈에도 모를 거다.
이미 이안의 마음속에서, 그는 이안의 다섯 번째 동료가 되어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