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지하미로(8)
“아아…….”
“후우.”
함께 조난 당한 사제. 브라운이 탄식을 흘렸다.
더글라스 역시 암담한 상황에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안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래. 왠지 이럴 거 같더라.’
얼마 전부터 계속 느껴지던 불안감이 결국 현실이 되었다.
이들은 3층의 어딘가에 조난 당했다. 되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이 넓은 미로를 계속 헤매야 했다.
운이 좋길 바라야 할 것이다.
만약 시간 안에 계단을 찾지 못하면, 또 다시 미로의 구조가 변해버릴 테니.
우선 이안은 가방을 뒤졌다.
다행히 붕대가 조금 남아 있었다.
이안은 붕대를 꺼내 브라운에게 다가갔다.
‘좀 심하네.’
브라운의 다리에 난 상처는 제법 깊었다.
피가 꽤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안은 사제의 상처를 물로 한번 씻어낸 뒤, 붕대를 감아 지혈했다.
“아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걸로는 응급처치밖에 되지 못한다.
어서 빨리 신성력으로 치료해야 했다.
“언제쯤 다시 기적을 부릴 수 있으십니까?”
“그, 글쎄요. 평소 같으면 2시간 정도만 푹 쉬어도 신성이 돌아올 텐데…….”
문제는 지금은 안정을 취할 수 없는 환경인 데다가, 상처까지 입었다.
언제 신성이 돌아올지는 알 수 없었다.
“상처가 나을 때까지는 제가 업고 다니겠습니다.”
“그, 그렇게까지는! 부축해주신다면 걸을 수 있습니다! 아니, 걷게 해주세요!”
따지고 보면 그를 챙겨주기 위해 제시간에 계단에 도달하지 못한 셈이다.
차마 이안에게 이 이상 폐를 끼치기는 싫은지 브라운이 간절한 어조로 호소했다.
하지만 이안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부축하면 오히려 더 느려질 뿐입니다. 더 피해를 주기 싫으면 얌전히 업히세요.”
“예…….”
브라운이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더글라스는 교단의 사제가 이안에게 쩔쩔매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앞에서 듣기로 정령이랑 검광도 다룰 수 있고.”
브라운의 태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검광에 대한 부분은 쉬이 넘길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검광.
기사라면 누구나 소망하는 꿈같은 경지가 아닌가?
하지만 그런 경지에 닿았다고 하기에 이안은 너무나 젊었다.
심지어 검은 눈에 검은 머리.
더글라스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속임수를 쓴 걸까?’
아니. 이안의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도 보았다. 깔끔하게 잘린 동굴 트롤의 목을.
검광이 아니라면 결코 그런 단면은 나올 수 없었다.
‘명문 귀족가에서 숨겨둔 자식인가?’
더글라스는 자신의 추리가 퍽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이안의 외향을 생각하면, 체면을 중시하는 귀족가에서 숨겨두어도 이상하지 않다.
교단의 사제가 쩔쩔매는 것도 설명이 되고.
하지만 이안에게서는 귀족 특유의 예절이라거나 품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더글라스의 머릿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고 이안은 그 의문을 단칼에 베어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뭐?”
“지금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하냐고. 달리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지 않아?”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더글라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대놓고 지적을 받은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이놈의 말이 맞아.’
지금 중요한 건 이안의 신분이 아니다.
그의 실력이지.
지금은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좋다. 네가 누군지, 지금은 일단 신경 쓰지 않겠다.”
“오냐.”
“…….”
이안의 말투에 잠깐 멈칫한 더글라스가 이내 무언가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조사대와 다시 합류할 뾰족한 수가 있나?”
이안은 단호하게 답했다.
“없어 그런 거. 계단이 나올 때까지 계속 미로를 헤매는 수밖에.”
“……괴수의 숫자가 많아. 우리 둘이서 그 괴수를 모두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조사대와의 싸움에서 괴수들과 언데드들은 그 수가 상당히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반절 이상이 살아남아 이 미로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을 거다.
아마도 놈들을 통솔하는 존재가 있을 테니,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이안이 앞서 말했다시피, 뾰족한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해봐야지. 뭐, 별 수 있나?”
“……알았다.”
내심 이안이 무언가 생각이 있을까 기대했던 더글라스는 괜스레 실망했다.
그런 더글라스에게 이안이 물었다.
“조사대는 어떻게 행동할 거 같아.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 부관이 조사대장을 맡잖아. 우리를 찾으러 올 거 같아?”
“아…… 그러지는 않을 거다.”
더글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얘기를 해두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하지 말라고.”
“그러면 걔들은 이대로 지상으로 돌아가는 건가?”
“그렇…… 지는 않을 것 같다.”
뜸을 들이는 건 그 역시 확신하기 힘들기 때문.
“아마 어떻게든 우리에게 도움을 주려 할 거 같다. 계단 근처를 맴돌며 괴수들의 이목을 끌어주는 식으로.”
그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도움이긴 했다.
과연 조사대가 그런 의리를 지켜 줄까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왠지 기사들은 더글라스를 쉽게 버리지 않을 것 같았다.
‘재수 없긴 해도, 솔선해서 가장 위험한 후미를 맡는 사람이니 신망이 있겠지.’
그 이후로 이안과 더글라스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상의했다.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마주치는 모든 괴수를 처리하고 발 가는 대로 미로를 탐사하자는 얘기였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논의는 과연 지금 벌어지는 일이 무엇 때문이냐는 것.
“일단 지금 당장 생각할 수 있는 건 두 가지겠지. 사령술사가 미로로 숨어들었거나 지옥의 입구에 문제가 생겼거나. 어느 쪽이든 이상할 건 없어.”
이안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더글라스가 이어 말했다.
“하지만 난 차라리 후자이길 바라고 있다. 그 많은 용병들을 언데드로 되살리는 것도 모자라 아래층의 괴수들까지 끌고 올 실력의 사령술사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
“만약 사령술사든 돌연변이 괴수든 마주친다면 어떻게 할 거지?”
도주할 것이냐, 아니면 싸울 것이냐의 문제.
어느 쪽도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글라스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싸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안도 동의했다.
“좋아. 누군지는 몰라도 놈들의 우두머리를 베면, 그 이후 일은 의외로 쉬울 수도 있으니까.”
모든 논의가 끝나자, 셋은 잠시 침묵하며 벽에 등을 기대앉았다.
괴수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이렇게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브라운의 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이안은 몰라도 더글라스는 체력을 보충해야 했다.
어차피 길을 모르는 이상 서두른다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렇게 달콤한 휴식을 만끽하던 것도 잠시.
더글라스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역겨운 놈들. 잠시도 쉴 틈을 주질 않는군.”
멀리서 기척이 들려 온다.
그리고 그 기척은 이쪽을 향해 확실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단순히 주위를 배회하는 것이 아닌, 일행의 위치를 알아챘다는 증거.
이안은 브라운의 다리에 감긴 붕대를 흘끗 보았다. 깨끗하던 붕대는 벌써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피 냄새를 맡고 온 모양이군.”
“죄, 죄송합니다.”
“군말 말고 업혀요.”
이안은 브라운을 등에 업었다. 그래도 제법 청렴한 삶을 산 듯, 브라운의 체구는 몹시 가벼웠다.
‘다행이네요. 만약 브라운이 뒤로 이것저것 처먹고 뒤룩뒤룩 살이 쪘다면 저는 그대로 버리고 갔을 테니까요.’
이안은 브라운의 엉덩이를 왼손으로 받치며 말했다.
“팔은 멀쩡하죠? 목 꽉 잡아요. 각오하시고요. 앞으로 몇 시간이나 이러고 다녀야 할지 모르니까.”
“아, 알겠습니다.”
“온다!”
다시 투구를 눌러쓴 더글라스가 외쳤다.
쥐의 대가리가 달린 거미처럼 생긴 괴수 다섯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괴수들을 흩어놓고 나눠서 찾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이제 곧 득달같이 달려들겠구만.’
이안은 미끄러지듯 걸음을 옮겼다. 등 뒤의 브라운 때문에 평소의 속도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빨랐다.
이안이 찰나에 세 번 검을 내질렀다가 거둬들였다.
콰직!
제대로 대응조차 하지 못하고 목을 내주는 괴수들.
남은 괴수는 뒤에서 달려온 더글라스가 메이스를 휘둘러 으깨버렸다.
“오래 싸우다 보면 검보다 이게 낫더군.”
더글라스는 메이스를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이안이 감각을 집중해 주위의 소리를 듣고는 말했다.
“이제 곧 몰려올 거야. 포위당하지 않으려면 계속 한 방향으로 길을 뚫어야 해.”
“알았다.”
이안은 다시 달렸다. 목에 걸린 브라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글라스는 한 걸음 뒤에서 따라 달렸다.
이안이 선두를 뚫으면 더글라스가 후방을 맡는 식이다.
딱히 상의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더글라스도 무의식적으로 이안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걸 인정한 것.
이안은 다시 발걸음을 떼기 전. 무언가 생각 나는 게 있어 손안에 호크를 소환한 뒤 부탁했다.
“호크. 부탁할게.”
“핍!”
“오…… 뭘 하려는 거지?”
“정찰.”
호크라면 분명 정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감각 공유를 할 여유는 없겠지만 말이다.
모든 준비를 마친 이안은 다시 땅을 박찼다.
적들이 오고 있었다.
***
예상대로 쉽지 않은 싸움이 이어졌다.
단둘이서.
그것도 뒤에 짐 덩이를 하나 달고 싸우는 건 생각보다도 더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건, 이 길이 맞는지조차 모른다는 불안감.
‘씁. 대체 몇 시간이나 달린 거야.’
이안은 지독하게 몰려드는 괴수를 베며 한탄했다.
피가 너무 튀어 이제는 온몸이 새빨개질 정도였다.
그나마 성검이라 날이 상하지 않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게다가 계단도. 놈들의 우두머리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야! 괜찮아?”
“버, 버틸만하다!”
아이벤 제일의 실력자답게 더글라스는 잘 버텨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체력도 무한할 수는 없다.
이안 역시 마찬가지.
‘뒤에 매고 있는 사람 때문에 체력 소모가 너무 심해요.’
원래라면 이틀 밤낮을 내리 싸워도 그럭저럭 버틸만했을 거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만약 진짜로 안된다면…… 버리고 가는 수밖에요.’
[이안…….]
‘그러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죠.’
팍!
이안은 아가리를 들이미는 지옥견의 입에 주먹을 먹여준 뒤, 활로를 뚫었다.
완전히 포위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계속 달려야 했다.
하지만 이안은 달리면서 점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라? 왠지…….’
왠지 이번엔 너무 순순히 길을 터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이안의 움직임을 유도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복도를 지나쳐 도착한 방.
이안은 기분 탓이 아니었음을 알아챘다.
“함정이군.”
“그래. 결국, 속도가 늦어져서 포위에 성공한 거야.”
방으로 통하는 네 개의 복도를 가득 메운 괴수들.
심지어 방안에는 동굴 트롤 둘까지 있었다.
이안 일행을 끝장내기 위해 제대로 함정을 판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아챈 브라운이 버둥거렸다.
“이, 이제는 진짜 저를 버려주세요! 만약 저 때문에 이안 님이 다친다면, 죽어서도 신을 뵐 면이 없습니다!”
“조용히 좀 해요.”
“이안 님!”
‘어렵겠어.’
이번에는 정말로 쉽지 않을 거다.
입안이 썼다. 선택의 시간이 온 거다.
브라운을 버려야 할지, 말지.
‘이거. 정말 엿 같은 기분이네요.’
[이안.]
‘실력자가 한 명만 더 있었어도 훨 나았을 텐데요.’
의미 없는 아쉬움을 떨치며, 이안은 검을 굳게 쥐었다.
일단 브라운을 업고 되는 데까지 싸워보기로 했다.
설령 그게 그를 위험에 빠트린다 해도.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만…….
이네스에게 너무나 물들어버린 결과라고. 이안은 생각했다.
‘우선은 동굴 트롤부터다.’
검광은 최대한 아끼고 싶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동굴 트롤 둘을 모두 베려면 이곳에서 가진 걸 전부 쏟아부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고 땅을 박차려던 그때였다.
“아아아아아―!”
갑자기 울린 소리에 괴수들과 이안과 더글라스 모두 순간 멈칫했다.
엄청나게 커다란 소리였다.
그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이는 범상한 존재는 아닐 터.
여기서 강한 적이 늘어나는 건 큰일이었기에, 이안은 서둘러 정신을 집중했다.
‘무언가 가까워져 오고 있어. 아주 빠르게.’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모를 괴성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접근하는 상대가 아주아주 빠르다는 것.
‘여기서 상대가 늘어나면 곤란한데.’
이안은 긴장해 옆을 흘끗거렸다.
그리고 이윽고. 소리의 원흉이 이곳에 다다랐다.
팡! 파팡!
요란하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들을 포위하던 괴수들의 몸이 높이 치솟았다.
마치 전속력으로 달리는 트럭에 치인 것 같은 광경.
그렇게 해서 뚫린 길로 웬 우람한 말 한 마리가 달려 들어왔다.
말 위에 탄 기수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내가 왔다아아아아―!”
그리고 그 말 위에 타 있는 건 갈색 곱슬머리에 푸른 눈. 사각 턱. 콧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사내.
이안은 이 사내의 이름을 알고 있다.
“에스테반.”
‘정열의 에스테반.’
에스테반 화이트가드.
잠깐 이안이 종자 노릇을 했으며, 그에게 스승 역할을 해주었던 미치광이 기사.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사람이 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