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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82화 (183/222)

182. 지하미로(9)

“……말?”

더글라스가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미로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기사라니.

이질적인 광경이긴 하다.

지하 미로에 말을 타고 들어오는 머저리는 없으니까.

오죽 황당했으면 괴수들도 당황해 에스테반을 멀뚱히 쳐다볼 정도였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슬쩍 눈치를 살핀 에스테반이 다시 외쳤다.

“내가 왔다아아아―!”

“에스테반 경. 들었으니 굳이 다시 외치지 않아도 돼요.”

“음?”

천장을 보며 고함을 지르던 에스테반이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 스콰이어 이안!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놀라기는 제가 더 놀랐을 것 같지만…… 뭐. 아무튼요.”

“이 또한 신께서 의도하신 일이겠지! 그래 이안. 그동안 잘 지냈나?”

에스테반의 느슨한 분위기에 듣다 못 한 더글라스가 끼어들었다.

“이봐들! 해후를 나누는 건 좋지만 그럴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눈이 있다면 주위를 좀 봐.”

“음? 스콰이어 이안. 이 머저리는 누구지?”

“머, 머저리?”

폭언에 당황하는 더글라스.

하지만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아직 그들은 괴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잠깐 당황하던 괴수들은 으르렁거리며 그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단 이놈들부터 처리하죠.”

“아. 그렇군! 동굴 트롤이 둘이라…… 이 정도는 한 끼 식사 밖에 안 되지. 가자! 레이야드!”

에스테반은 어떻게 싸울지 상의도 하지 않고 앞서 달려나갔다.

그는 머릿속에 오로지 맹공밖에 없는 사내였으니까.

에스테반과 그의 애마. 레이야드는 한 몸이 되어 빠르게 나아갔다.

동굴 트롤들은 그런 에스테반을 향해 돌을 주워 던졌다.

쐐액!

위협적인 궤적으로 쇄도하는 돌멩이들.

하지만 영리한 레이야드는 폴짝폴짝 뛰며 그것들을 모조리 피해냈다.

그 위에서 기예에 가까운 자세로 고삐를 쥔 에스테반이 즐거운 듯이 외쳤다.

“하하! 이 정도로는 나를 맞출 수 없어!”

위협적인 공격은 피하고 거슬리는 괴수들은 들이받아 버린다.

그렇게 동굴트롤의 근처까지 도달한 에스테반은 달리는 말 안장 위에 두 다리로 꼿꼿이 섰다.

위태로운 모습.

하지만 에스테반의 자세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마지막으로 본 이후로 몇 년이 흘렀으니까요.]

에스테반은 그대로 위로 뛰어오른 뒤, 몸을 회전시키며 그 힘을 이용해 검을 크게 휘둘렀다.

검 끝에 피어나는 푸른색 빛무리.

이전에 봤던 것처럼 혼란스럽고 거친 느낌의 검광이었다.

검을 깔끔히 휘두른 에스테반은 그대로 공중에서 한 바퀴를 더 구른뒤, 달려온 레이야드의 등에 깔끔히 안착했다.

동굴 트롤의 목이 떨어진 건 그로부터 한 호흡 뒤였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실력에 더글라스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혹시 요즘은 검광 정도는 다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에스테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레이야드를 타고 곧장 다른 트롤에게 향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이안이 트롤의 목을 벤 참이었다.

에스테반이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맙소사! 스콰이어 이안! 너는 늘 날 놀라게 하는군!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나!”

“그렇게 됐습니다. 그보다 혹시 이 친구를 좀 뒤에 태울 수 있겠습니까?”

이안은 등에 매달려 반쯤 기절해 있는 브라운을 가리켰다.

에스테반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사제님께서 다치신 모양이군. 레이야드는 기꺼이 등을 빌려줄 거다. 그치 레이야드?”

―푸르릉.

무언가를 더 태우고 싶지 않은 듯. 레이야드가 불만족스럽게 투레질했지만 에스테반은 깔끔히 무시했다.

이안은 얼른 브라운을 건네주었다.

등에 짊어진 짐이 없어지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후우. 좋아. 에스테반 경이 온 것만으로도 상황이 엄청 나아졌네요.”

“음! 이안 너도 훌륭했다!”

서로간에 덕담을 주고받는 이안과 에스테반.

그런 둘을 향해 더글라스가 눈매를 좁혔다.

“이봐. 트롤을 처리한 건 좋은데 그래서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 건데.”

더글라스는 주위를 가리켰다.

위협적인 동굴 트롤을 사냥했지만, 여전히 괴수는 많이 남아 있었다.

물론, 이 세 사람이라면 능히 상대하고도 남았다.

허세가 아니라, 이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검광을 쓸 수 있는 검사가 둘에, 도시의 수비대장 하나. 이 정도면 어찌어찌 다 처리할 수 있어. 다만…….’

문제는 이 지하 미로에는 괴수들을 계속 뱉어내는 입구가 있다.

만약 싸움이 길게 끌리면, 곤란해질 가능성이 컸다.

‘어서 계단을 찾든 해야 하는데…….’

그때.

정찰을 보내놓았던 호크가 되돌아왔다.

“핍!”

“오오! 이 화려한 새는 자네가 키우는 것인가!”

호들갑 떠는 에스테반을 무시하며 이안은 정신을 집중했다.

호크의 기억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계단을 찾긴 찾았구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라서 문제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괴수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끌고 아래로 내려가는 괴수들.

그리고 계단을 올라오는 건 되살아난 언데드 괴수였다.

‘기껏 다 죽여놨더니, 되살리고 있구나.’

이게 언데드의 짜증 나는 점이었다.

죽여도 죽여도 다시 되살리는 것.

결국, 본체인 사령술사를 죽이지 않으면 적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생각이 바뀌었어.’

처음에는 계단을 찾으면 미련 없이 탈출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겪어보니, 네크로맨서의 실력이 심상치 않았다.

만약 그냥 이대로 놔둔다면 지하 미로 전체가 놈의 둥지가 되어 버린다.

‘그러면 곤란해. 도시의 전력이 약해질 거야. 흑기사를 생각하면 다른 변수들은 없애놔야 해. 그러려면…… 지금 해야겠지.’

놈은 계속 강해질 것이며 이는 지금이 가장 약할 타이밍이라는 뜻.

‘게다가 우리를 저지하기 위해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 쪽에 괴수들을 배치해놓았을 거야. 그렇다면…….’

그 반대쪽은 텅 비었다는 얘기.

이안이 외쳤다.

“에스테반! 저를 따라와요!”

“음?”

“아래층에 놈들의 우두머리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놈을 처리하러 갈 거예요!”

“음!”

에스테반은 고민 없이 말 머리를 돌렸다.

그만큼 이안의 말을 신뢰한다는 얘기.

더글라스가 당황해 외쳤다.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대로 놈들의 우두머리를 내버려 뒀다가는 도시의 미로가 완전히 점령당할 거야. 너도 그건 곤란하잖아?”

더글라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아이벤의 수비 대장.

다른 누구보다 도시의 안위를 신경 쓰는 자였다.

더글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너희 둘과 내가 힘을 합친다면 사령술사고 뭐고, 문제없을 것 같군.”

“스콰이어 이안! 저놈은 뭔데 아까부터 저렇게 잘난 듯이 말하는 건가? 실력도 별 볼 일 없는 놈이.”

“벼, 별 볼 일 없다고……?”

당황하는 더글라스를 뒤에 남겨두고 이안은 달렸다.

그런 이안을 레이야드를 탄 에스테반이 옆에서 따라붙었다.

이안은 달리며 말했다.

“그래도 이 도시의 수비대장이라네요. 나름 쓸만해요.”

“저런 게 수비대장이라…… 아이벤도 많이 쇠락했군.”

“다 들린다!”

더글라스가 그렇게 외치며 뒤늦게 달렸다.

이안의 예상대로, 뒤쪽에는 괴수들의 숫자가 많지 않았다.

“크릉?”

갑작스럽게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고 도망치는 그들을 보며 괴수들은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굳어버렸다.

이건 그들이 받은 명령에도 있지 않은 상황.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괴수들은 뒤늦게 이안을 쫓으려 했지만, 그 숫자가 너무 많아 서로가 좁은 복도에서 엉켜버렸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호크를 불렀다.

“호크. 안내해!”

“핍!”

호크가 계단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했다.

에스테반이 감탄을 터트렸다.

“아! 유능한 친구를 두었군! 아주 밝아 보여서 좋아! 하하하!”

“……그거 설마 농담이라고 한 건가요?”

“흠. 아무래도 네가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군. 내가 방금 말한 밝다는 의미는…….”

“잠깐잠깐잠깐!”

농담을 이해 못 하는 어리석은 이안을 위해 에스테반이 친절히 설명해 주려 하자, 더글라스가 외쳤다.

“그래서 이 작자는 대체 누구야! 누군데 감히 나한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구는 거지!”

이안이 답했다.

“에스테반 경입니다. 에스테반 화이트가드 경. 한때 강철 기사단에 속해 있었던 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위대한 모험들로 전 대륙에 명성을 떨치는 기사 중의 기사지.”

자화자찬하는 그 모습에 잠시 인상을 찌푸리던 더글라스가 곧 무언가 떠오른 듯, 입으로 중얼거렸다.

“잠깐. 그 화이트가드? 그렇다면 화이트가드의 천재이자 미치광이 장남이…….”

더글라스가 표정을 굳히며 에스테반에게 말했다.

“이거. 유명인을 만났군.”

“아암! 내가 유명하긴 하지.”

“근데 당신은 대체 왜. 아니, 어떻게 이곳에 있는 것이오. 분명 며칠 사이에 미로를 들어간 사람은 없었을 터인데.”

그때. 이안의 머릿속에 얼마 전 기억이 떠올랐다.

‘말을 타고 미로로 돌진하던 미치광이 기사.’

설마설마했는데, 그게 에스테반이 맞았다니.

더글라스의 의문에 에스테반이 간단히 답했다.

“미로에 문제가 생겼다더군. 모험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서 곧바로 들어왔다.”

에스테반이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에 그리 많은 이유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갔을 뿐.

황당한 얼굴의 더글라스가 입을 다물고, 그다음으로는 이안이 물었다.

“아니. 근데 미로에 들어온 건 한참 전이잖아요. 대체 어떻게 버티신 거예요.”

“길을 좀 헤맸다! 중간에 배가 고파 다시 되돌아가려 했는데 돌아가는 길도 모르겠더군. 이놈의 미로는 왜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는지! 마치 매일 구조가 변하기라도 한 것 같지 않나! 하하!”

에스테반은 미로의 구조가 매일 바뀐다는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었다.

그저 무턱대고 들어왔고, 길을 헤매다, 우연히 조사대의 소리를 듣고 3층으로 따라 내려온 것.

짧게 설명을 마친 에스테반이 이안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안! 혹시 먹을 게 있다면 나눠주지 않겠나? 며칠간 굶었더니 배에서 천둥이 치는군.”

“아, 예. 건량이라도 괜찮다면…….”

“기왕이면 레이야드 몫까지 주게. 이 친구, 이래 봬도 아무거나 잘 먹거든.”

에스테반은 이안에게서 육포와 비스킷을 거의 한두 번 씹고는 삼켜버렸다.

남은 음식은 레이야드의 몫이었다.

레이야드는 에스테반이 주는 육포를 잘도 씹어댔다.

‘말은 초식동물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더는 상식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에스테반을 상대로는.

그때쯤 그들은 계단에 도착했다.

계단에서는 언데드화된 괴수들이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호크의 빛이 괴로운지, 주춤거리다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언데드들은 일행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주위를 가볍게 정리한 이안과 더글라스는 빠르게 계단을 미끄러졌고, 레이야드는 땅을 폴짝 박차 바닥에 착지했다.

바보 같은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던 더글라스가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놈을 어떻게 찾을 셈이야.”

“상대가 어디 있을지는 뻔하잖아?”

이안은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괴수들이 죽은 동료의 시체를 옮길 때 생긴 흔적.

달리 말하면 이 흔적을 쫓아가다 보면 괴수들을 되살린 원흉을 맞닥뜨릴 수 있다는 거다.

이안의 설명을 들은 에스테반이 감탄했다.

“역시! 이안 너는 천재가 맞군.”

“천재까지야. 자. 호크. 너는 이 흔적을 따라 쫓아가. 최대 속도로. 알겠지?”

“핍!”

호크의 역할은 적이 도주하는 위치를 파악하는 것.

목표는 이제껏 철저히 부하들만 보내며 공격해왔다.

자기가 위험할 상황은 절대 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목표물들이 도망을 포기하고 도리어 이쪽으로 달려든다?

당황했을 게 분명하다.

이안은 씩 웃으며 생각했다.

‘이제 우리가 사냥하는 쪽이야.’

사냥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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