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지하미로(10)
이안은 호크가 핏자국을 추적하게 시켰다. 호크는 빛과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정신력을 많이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핫하! 언데드를 불러내는 사악한 적을 상대로 스콰이어와 함께 싸우다니! 이만한 모험이 없겠군!”
에스테반은 레이야드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주인의 뜻을 알아챈 레이야드가 이내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이안조차 겨우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레이야드는 빨랐다.
이안은 달리면서 외쳤다.
“브라운 사제! 괜찮아요?”
“괘, 괘, 괘, 괞…… 우읍.”
레이야드의 뒷에 짐짝처럼 실린 브라운은 안색이 파리했다.
피를 너무 흘려서 그런지, 아니면 미친 듯이 흔들리는 레이야드의 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 잠깐! 너무 빠르잖아!”
저 뒤에 뒤처진 더글라스가 그리 외쳤지만, 둘은 깔끔히 무시했다.
“아. 호크가 찾아냈어요.”
“오오!”
“지금 바로 감각을 공유할게요.”
달리는 와중이라 길게 집중상태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안은 호크에게서 단편적인 장면들만을 받아들였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쓰고 언데드를 되살리고 있어요. 역시 사령술사네요.”
“필시 대단히 사악하고, 대단히 위험한 놈이겠군! 그런 녀석을 내버려 뒀다가는 훗날 큰 흉이 닥칠 것이다!”
“아. 지금 급하게 도망치려 하고 있어요.”
“바로 추격하겠다!”
에스테반이 고삐를 쥐었다.
강한 상대와 맞서 싸워야 함에도 두려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한결같은 모습에 이안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더글라스가 저 뒤에 뒤처졌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안은 호크의 위치를 가늠했다.
‘뭐야. 사령술사 주제에 움직이는 속도가 꽤 빠르잖아.’
일반적으로 마법사 계열은 기사들에 비해 신체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령술사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뭐. 직접 보면 알겠지.’
아무리 빨라 봤자 이안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사령술사는 그대로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갈 속셈이었겠지만, 그 전에 결국 따라잡히고 말았다.
복도를 가득 메운 언데드들이 그걸 증명했다.
“그어어어.”
“그으으.”
좀비화된 괴수들과 용병들.
이지 없이 오로지 본능과 욕망. 그리고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이 괴물들은 이쪽을 발견하자마자 맹목적으로 달려들었다.
절대 자신들의 주인에게 보내지 않겠다는 집념이 느껴질 정도.
하지만 레이야드가 맹렬히 돌진해 앞발을 들자, 녀석들은 맥없이 날아가 버렸다.
언데드들이 약한 게 아니다.
레이야드가 비상식적으로 강한 것이다.
“잘했다 레이야드! 이대로 가자!”
연이은 발길질과 칼질에 언데드의 벽이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이윽고 상대도 포기한 듯. 언데드들이 급하게 퇴각했다.
‘잔챙이로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군.’
이안과 에스테반은 곧바로 방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에도 언데드와 괴수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괴수 무리의 한가운데.
원형으로 생긴 빈 공간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한 명 있었다.
왜소한 몸이었다.
하지만 그 몸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기운이 풍겨 오고 있었다.
에스테반과 이안도 일단 걸음을 멈출 정도.
적 역시 사악함이 감도는 보라색 눈동자로 이쪽을 탐색했다.
에스테반은 그 시선을 불쾌하게 여겼다. 그가 소리쳤다.
“이 더러운 사령술사야! 네 이름을 밝혀라!”
의외로 상대방은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비올라 해긴스. 그리고 실례네. 처음보는 사람한테 다짜고짜 더럽다니.”
스스로를 비올라라 밝힌 사령술사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창백한 피부에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에스테반이 검을 위로 들며 외쳤다.
“나는 에스테반 화이트가드다! 네 사악한 음모를 저지할 위대한 기사지!”
“에스테반? 아…….”
상대도 에스테반에 대해 아는 눈치인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뭐지? 생각보다 에스테반이 진짜 유명한 건가?’
이안 역시 놀라던 그때.
더글라스가 뒤늦게 합류했다.
“허억허억! 나를 버리고 가다니!”
이안과 에스테반을 보며 뒤로 물러섰던 괴수들은, 정작 더글라스에게는 맹렬히 달려들었었다.
상대적으로 만만하게 여긴 것!
언데드 괴수들을 뚫고 오느라 더글라스는 꼴이 엉망이었다.
하지만 그런 더글라스의 합류에 비올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러면 곤란한데…….”
짧게 중얼거린 비올라가 이쪽을 향해 말했다.
“기회를 줄게. 그냥 돌아가.”
“뭐?”
비올라가 다시 말했다.
“돌아가. 나도 힘 빼고 싶지 않아. 위에 놈들까지 다 살려 보내 줄 테니까.”
더글라스가 반응했다.
“위에 놈들?”
“몰랐어? 너희 동료들이 지금 위층에서 배회하고 있어. 너희를 찾으려는 건지 뭔지…… 눈물 나는 전우애네.”
“쯧…… 이 멍청이들.”
더글라스가 작게 혀를 찼다.
부하들이 자신의 지시를 어긴 게 괘씸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그런 더글라스를 대신해 이안이 물었다.
“상당히 오만하게 말하네. 지금은 누가 봐도 네가 불리한 거 같은데.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슬쩍 떠보는 말에 비올라가 코웃음을 쳤다.
“오만이라…… 내가 누구를 섬기고 있는지 알면 그딴 망발은 지껄이지 못할 텐데 말이야.”
“흐음. 그래?”
이안은 눈매를 좁혔다. 누구를 섬긴다는 건지 개인적으로 흥미가 생기긴 했다.
하지만 얘기를 나눌수록 비올라가 시간을 끈다는 느낌이 진하게 들었다.
‘계속 어울려주다가는 상대 페이스에 말려드는 거겠지. 듣고 싶은 게 있으면 일단 반쯤 죽여놓고 들으면 되겠지.’
이안은 더글라스와 에스테반에게 그런 자신의 뜻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에스테반은 검을 들고 저 앞에 돌진하고 있었다.
“대화는 불필요하다! 내 검을 받아라―!”
“하. 사령술사의 둥지에서 싸운다는 게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마.”
비올라가 허리를 숙여 양손을 땅에 짚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며 바닥을 타고 흘렀다.
펑!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가 요란하게 터졌다.
마치 수류탄의 폭발처럼, 에스테반과 레이야드를 덮치는 살점과 뼛조각들.
“어림없다!”
에스테반은 회피가 아닌 돌파를 택했다.
안장에 걸어 놓은 쇠 방패를 집어 든 에스테반은 그 방패를 양손으로 크게 휘둘렀다.
투둥퉁!
뼛조각과 살점들이 방패를 두드렸다.
충격을 받은 방패가 진동했지만, 에스테반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쯧.”
혀를 찬 사령술사가 다시 한번 땅을 짚었다.
펑! 퍼펑!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던 시체가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켰다.
대량의 뼛조각과 살점과 더불어, 피가 증발하여 생긴 안개까지 에스테반을 덮쳤다.
“좋아.”
유효타를 확신하는 비올라.
하지만 이내 피 안개를 뚫고 에스테반이 튀어나오자, 그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다!”
레이야드와 에스테반은 계속해 돌진했다.
그때쯤, 이안도 뒤에서 따라붙었다.
‘시체폭발인가? 이 정도 폭발력이라면…….’
이안은 터져 나가는 시체 사이를 당당히 달렸다.
이내 주위 시체가 동시에 터졌지만…… 이안에게는 별 상처를 주지 못했다.
‘이 정도인가.’
애초에 사령술사는 언데드를 부리거나 정신 계열 마법을 장점으로 삼는 이들이다.
화력은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비장의 수가 먹히지 않자 이를 악문 비올라 외쳤다.
“모여라!”
명령이 내려지자마자 대치하고 있던 괴수들이 일제히 모여들었다.
이안과 에스테반을 향해서가 아닌, 비올라를 향해.
시체들이 한 군데로 꾸역꾸역 모여들어 거대하고 징그러운 뱀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비올라는 그 시체 뱀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안도 익히 아는 기술이었다.
“시체 뱀. 사령술사 중에서도 급이 꽤 높은 놈들만 쓰는 건데…….”
어째서 비올라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도망칠 수 있었는지 이제 이해되었다.
분명 저 뱀은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몹시나 민첩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비올라의 기술에도 에스테반은 당황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시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뱀이라니! 오늘도 내 모험에 한 페이지가 추가되겠구나!”
“샤아아”
시체 뱀은 처음부터 간 보는 것 없이 곧바로 육탄돌격을 감행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간을 볼 시간이 없었다는 게 맞았다.
에스테반은 이미 시체 뱀의 지척에 당도해 있었기에.
에스테반은 레이야드의 등을 박차 날아올랐다.
거대한 시체 뱀이 에스테반을 향해 아가리를 쩍 벌렸다.
이안은 당연히 에스테반이 피할 줄 알았다.
하지만 시체 뱀은 그대로 에스테반을 삼켜 버렸다.
독성이 가득한 자신의 뱃속 안으로.
“이런 씨!”
뒤늦게 달려간 이안이 땅을 박찼고. 검에 검광을 피워내 수직으로 내려그었다.
철퍽!
시체 뱀의 대가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징그러운 뱀의 급소는 머리가 아니다.
떨어진 머리는 다시 몸통에 달라붙기 위해 꾸물거리고 있었다.
도리어 절단면에서 풍겨오는 유독성 가스가 이안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아 맞다. 시체 뱀은 화력으로 다 태워 버리거나 속에 숨어 있는 사령술사를 처리해야 했지.’
뒤늦게 공략법이 생각났다.
화력? 현 상황에서는 어렵다. ‘피에람의 긍지’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사령술사를 직접 처리해야 하는데, 두꺼운 시체 벽을 뚫고 술자를 공격할 방법은…….
“아.”
그때.
시체 뱀의 한 가운데가 불룩 불거지더니 에스테반이 튀어나왔다.
“내가 사령술사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외치는 에스테반의 손에는 비올라의 잘린 머리가 들려 있었다.
일부러 시체뱀에게 먹힌 에스테반이 몸 한구석에 숨어 있던 비올라를 찾아낸 것.
하지만 이안이 급하게 외쳤다.
“경! 제대로 마무리하세요!”
“뭐?”
목이 잘렸는데도 비올라의 머리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눈에서는 피눈물을 흘린 채.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내지른 비올라가 남은 기운을 모조리 방출했다.
이내 시체 뱀의 몸에 기운이 흘러 들어갔고…….
콰쾅!
거대한 폭발이 주위를 메웠다.
***
이안이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으으. 괜찮으세요?”
“괘, 괜찮다. 이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폭발에 가장 가까이서 휘말린 건 에스테반이었다.
그의 몸에는 군데군데 상처가 남거나, 뼈가 부러져 있었다.
폭발의 규모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편.
에스테반의 몸이 대체 얼마나 튼튼한지. 그가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안은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비올라의 다 찢어진 로브를 발견했다.
바닥에는 비올라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확실히 죽었겠군.’
깔끔한 승리.
사실, 당연한 결과였다. 검광을 쓸 수 있는 검사 둘을 상대로 사령술사가 이길 수 있을 리 없으니.
당연한 거다. 당연한 건데. 무언가 찝찝했다.
‘계속 느껴졌던 불안감의 정체는 이거였던 걸까?’
분명 사령술사는 그럭저럭 강한 적이었다.
하지만 이안이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이안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괴수들마저 사라진 미로는 몹시도 고요하고, 적적했다.
바로 얼마 전에는 요란한 싸움을 계속 벌였던 걸 생각하면 적응이 안 될 정도.
문제는 이안이 계속 느끼던 이 불안감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올라가 말하던 그 주인이라는 것도 마음에 걸리고.
‘……아래층까지 내려가 봐?’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쯤. 앞서가던 에스테반이 물었다.
“이안 왜 그러는가? 뭔가 남아 있나?”
이안은 대답 대신, 에스테반의 뒤에 축 늘어진 브라운을 쳐다봤다.
브라운의 이제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서 빨리 치료받지 못하면 생명이 위험할 지경.
게다가 에스테반도 내색은 안 했지만,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다.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서 올라가죠.”
“음! 위대한 승리를 거머쥐었으니, 당연히 술 한잔을 해야겠지!”
“아뇨. 저는 딱히 술은…….”
“좋아. 당연히 승낙할 줄 알았어. 내가 아는 스콰이어 이안은 이런데서 뺄 작자가 아니지.”
“아니 저는…….”
“더글라스 자네도 동참하게. 전투에서 아무것도 않았지만!”
“나도 다른 언데드들을 상대하고 있었…… 후우. 알았다.”
의외로 더글라스까지 승낙하자, 에스테반은 꽤 기뻤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거기다 대고 안 간다고 할 수도 없는 법.
한숨을 푹 내쉰 이안은 마지막으로 뒤를 잠깐 돌아보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머지않아 3층을 배회하던 조사대와 마주칠 수 있었다.
***
사령술사가 죽고.
격렬한 전투의 흔적과 괴수의 시체들. 고요만이 가득한 이곳에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사내는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색 로브를 발견했다.
찢어지고 피가 묻은 로브.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짐작해낸 것.
“쯧. 며칠만 지키고 있으라 했더니.”
설마 비올라가 그가 자리를 비운 이 단기간에 죽을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그녀는 부하들 중에서도 굉장히 실력이 뛰어난 편이었으니.
‘누가 죽인 거지? 설마 수비대장 그 머저리는 아닐 것이고.’
사내는 주위를 보며 천천히 흔적을 살피며 어떤 일이 있었을까를 상상했다.
‘뛰어난 검사가 최소 셋. 하나는 수비대장인 것 같고. 이건…… 말 발굽 자국? 뭐?’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처구니없어,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이건 말발굽이 맞았다.
‘지하미로에 말을 타고 오다니…… 병신인가?’
하지만 병신이라도 분명 실력 있는 병신일 것이다.
조사를 끝낸 사내는 인상을 팍 썼다.
‘미리 와보길 잘했어.’
예상외의 강적들이 등장. 처음에는 썩 달갑지 않았지만…….
‘오히려 잘 됐을 수도 있겠군.’
사내는 죽은 비올라의 로브를 조심히 들어 올렸다.
눈물 한 방울이 사내의 왼뺨을 타고 흘렀다.
“걱정 마라 비올라. 복수는 반드시 해줄 테니.”
사내의 목소리가 텅만 미로 안에서 여러 번 메아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