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방어전(8)
그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강철 기사단은 긴 임무를 마치고 본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기사단은 흑기사를 마주쳤다.
임무로 많이 지쳐 있던 참이다.
운이라기에는 너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끄아아악!”
“꺽!”
일격.
단 일격에 함께하던 동료 넷이 당했다.
피와 살이 튀었다 흩뿌려졌다.
에스테반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았다.
충격에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향해 흑기사의 검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멍청아 정신 차려!”
소녀는 에스테반의 뒤통수를 휙 잡아챘다.
대검이 에스테반이 방금까지 서 있던 곳을 꿰뚫었다.
그제야 에스테반은 정신을 차렸다.
“고, 고마워.”
“헤! 나중에 한잔 사는 거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윙크를 날리는 소녀를 보며 에스테반도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게 소녀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흑기사는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강철 기사단은 필사적으로 놈을 막아섰지만, 두 번 이상 검을 버텨내는 이가 없었다.
저 흑색 검광에 닿으면 검이 모두 부러져 버린 탓이다.
“지금으로선 이길 수 없다! 당장 후퇴하라!”
상급자가 그리 외치며 흑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자기가 뱉은 명령과 정반대의 행동이었지만, 후퇴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흑기사를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저 도망치기만 하면 늑대에게 사냥당하는 양 떼 꼴을 못 면할 테니.
에스테반은 순간 피가 끓어올랐다. 스스로를 희생하는 상급자를 보며 함께하고 싶은 욕망이 솟았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이내 옆에 있는 소녀의 얼굴을 보고 마음을 고쳤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빨리 가자! 저런 괴물은 아직 우리가 상대할 때가 아니야!”
여기서 자기가 싸우러 달려들면 분명 그녀도 따라올 거다.
에스테반은 그녀가 살길 원했다.
왜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살길 원했다.
하지만 소녀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검광이 없으면 오래 못 버틸 거야. 검광은 검광으로만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검광을 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잖아?”
“너……!”
“흑기사라…… 이야기 책 속에서나 나올법한 적이잖아? 오늘부로 내 이름이 온 대륙을 울리겠군. 흑기사를 이긴 영웅으로 말이야.”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주황색 검광을 피워냈다. 활기차고 밝은색의 검광이었다.
에스테반이 급히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나도 도울게!”
“에스테반. 너는 아직 검광을 쓸 줄 모르잖아. 그렇게 평소에 더 열심히 하지 그랬어?”
“그래도…….”
“넌 이 누님이 하는 거나 잘 보고 있어.”
더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소녀는 땅을 박차 흑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쯤에는 이미 상급자의 몸이 흑기사의 대검에 반토막이 나고 있었다.
흑기사는 빠르게 접근하는 소녀를 보며 안광을 빛냈다.
그녀의 검광은 꽤 위험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쾅!
둘의 검과 검이 교차했다.
체격은 거의 두 배나 차이 나는 둘이지만, 놀랍게도 소녀는 한치도 뒤로 밀리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흑기사와 검을 부딪칠 때마다 뼈가 깎여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동료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몸이 상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애초에 그녀도 저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희생할 셈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기사들이 분통한 얼굴로 도망쳤다. 입으로는 소녀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는 자기 위로를 늘어놓았다.
동료의 희생은 슬프지만, 결국 자신의 목숨이 더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도저히 도망칠 수 없었다.
소녀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흑기사에게 달려들 수도 없었다.
그러기에 저 괴물은 너무나 두려운 적이었다.
“아아…….”
결국. 에스테반이 할 수 있는 건 제자리에 서서 안타까운 신음을 내는 것뿐이었다.
에스테반이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순간이었다.
그 사이.
흑기사와 소녀의 접전이 이어졌다. 놀랍게도 소녀는 흑기사를 점점 밀어붙이고 있었다.
생명과 인생을 모두 불태워 피워내는 검광은 그 어떤 불꽃보다도 찬란하게 불타올랐다.
천재적인 검사였던 그녀는 작은 체구를 이용해 흑기사를 효과적으로 공략했다.
그리고 보았다.
적에게 치명상을 날릴 수 있는 한 수를.
“…….”
그녀는 고민했다. 너무나 위험한 도박이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고민이다.
문득. 소녀는 에스테반을 봤다.
‘저 멍청이가…….’
아직 에스테반은 제자리에 서 있었다. 만약 흑기사에게 유의미한 타격이라도 주지 못한다면, 에스테반 마저 위험해질 터.
그 생각에 이르자마자 그녀는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적의 급소를 노리는 말 그대로 도박수.
부웅!
대검이 소녀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잘려나갔지만, 소녀는 환호했다.
‘피했다!’
이대로 저 괴물의 몸통에 검광을 때려 박을 수 있다면, 어쩌면 진짜로 이길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였다.
“어?”
흑기사의 가슴 부분이 갈라져 마치 짐승의 아가리처럼 변했다.
기회라고 생각했던 틈은 알고 보니 함정이었다.
콰직!
아가리가 닫혔다.
에스테반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 소녀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
그 당시. 에스테반은 검광을 사용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소녀는 늘 말하곤 했다.
“너는 너무 정해진 틀 속에 너를 가두려 해. 마음속의 그 틀만 깰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검광을 좍좍 뽑아낼 텐데.”
에스테반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안에 들어있던 모든 것들이 지워졌다.
그 대신 채워지는 건 다른 격렬하고 혼란한 감정들.
에스테반의 검에 검광이 덧씌워졌다.
그리고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으아아아!”
에스테반이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검을 휘둘렀다.
흑기사는 검을 비스듬히 세워 그 맹렬한 일격을 막아냈다.
뒤쪽에서 기회를 본 이안이 은밀하게 급소를 노렸다. 흑기사는 땅을 힘껏 밟아 순간적으로 몸을 돌렸다.
등을 노리던 이안은 흑기사의 배와 마주했다.
이내 흑기사의 배가 좌우로 열리더니 안에서 구역질 나는 악취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
―꺼, 꺼내줘어!
절로 정신이 멍해지는 아우성이었다. 주춤하는 이안을 향해 아가리에서 촉수 가닥이 튀어나왔다.
이안은 황급히 검을 휘둘러 촉수를 베어냈다. 다시 아가리가 닫히는 동시에 흑기사의 반격이 이어졌다.
‘씁. 함정에 몰아넣었을 때 처리했어야 했는데.’
싸움이 질질 끌리는 건 원치 않는다.
테이오스와 전투를 시작한 동료를 돕고 싶기도 하거니와 검광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도 처음에 부상을 좀 입혀놔서 다행이야.’
잘려나간 투구에서는 지금도 검은색 기운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안은 그 투구 아래에 드러난 미라처럼 피부가 쭈글쭈글한 노인의 머리가 신경 쓰였다.
새삼 흑기사의 정체에 대한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원래는 뛰어난 기사였다가 타락한 괴물일까요?’
[…… 그럴 지도요.]
지금으로선 의미 없는 잡상이기도 했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이기고 지냐다.
흑기사도. 에스테반과 이안도 박빙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그마한 차이가 승패를 가릴 것이다.
그리고 그 승패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흑기사에게 패한다면 이곳에 있는 모두는 죽는다. 성 바깥으로 도망친 시민들까지 전부.
“이노오오옴!”
잠시 뒤로 밀려났던 에스테반이 땅을 박찼다.
흑기사는 곧바로 대검을 들어 올렸다가, 수직으로 땅에 내리쳤다.
쿠구구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면이 흔들렸다.
이안조차 균형을 잡기 위해 애를 써야 할 정도의 흔들림이었다.
지면의 몇몇 부분은 솟아나거나 침강했고, 광장 한편에 서 있던 초대 영주의 석상이 형편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에스테반은 멈추지 않았다.
에스테반은 꼭 죽음을 모르는 이야기 속 광전사와 같았다.
그는 오로지 흑기사를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도망치거나 후퇴는 없었다.
둘이 또다시 격돌했다.
파란 검광과 흑색의 검광이 어지럽게 얽히며 주위를 묘한 색으로 물들였다.
흑기사의 안광이 더 거세게 타올랐다.
흑기사는 물었다.
“강한 기사군. 이름이 뭐지? 기억하겠다.”
검을 맞대고 있음에도 어조는 너무나 평온했다.
에스테반의 눈동자 속 분노가 더 짙어졌다.
“네놈에게 말할 이름 같은 건 없다!”
“다시 묻겠다. 이름을…….”
에스테반은 흑기사의 입을 막겠다는 듯. 더더욱 기세를 올렸다.
이안도 합세해 함께 검을 휘둘렀다.
셋은 찰나의 숨 돌릴 틈도 없이 쉼 없이 싸웠다.
계속된 싸움을 통해 서로를 더 잘 이해했고, 점점 더 검술도 향상되어 갔다.
에스테반도, 이안도, 그리고 흑기사도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점점 에스테반과 이안이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검술의 문제는 아니었다.
검광. 언제나 검광이 문제였다.
긴 시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먹어치운 흑기사는 끝도 없이 검광을 뿜어냈다.
에스테반은 마음속 광기를 불태웠고, 이안도 검광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압축해 사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검광이 언제 고갈될지 몰라요. 아껴야겠어요.’
그런 마음이 이안을 무의식적으로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투를 겪은 흑기사는 그 미세한 차이를 포착했다.
더욱 맹렬히 검을 휘둘러 점점 전투를 자기의 흐름으로 끌어들였다.
‘이렇게까지 준비했는데도 이 정도라니…….’
두렵다.
눈앞의 적은 참으로 공포스러운 적이었다.
검을 직접 맞댈수록 그 공포는 더욱 커져갔다.
순간이지만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전력을 다하면 도망에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다음에 만난 흑기사는 더 많은 인간을 먹어치워 강해져 있을 거다.
그리고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전부 죽을 거야.’
이안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동료들이 테이오스와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저 동료들은 이안의 승리를 믿고 있다.
저들을 위해서라도 이안은 이겨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지?’
이안이 그런 생각에 잠겼을 때.
“……!”
에스테반의 왼쪽 발이 하늘을 날았다.
이안의 공세가 뜸해진 틈을 타 흑기사가 땅을 내리쳤고, 하늘로 떠 오른 에스테반의 몸을 번개 같은 일격으로 베어낸 것이다.
그나마 에스테반이 몸을 틀지 않았다면 다리 전체가 잘렸을 거다.
“에스테반!”
이안은 곧바로 달려나갔다.
절단부에서 피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심각한 부상에도 에스테반은 조금의 신음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한쪽 발을 잃었다는 건 팔 하나가 통째로 잘리는 것보다 더 큰 손해다.
달리기는커녕 균형도 제대로 못 잡기 때문이다.
흑기사는 그대로 에스테반을 끝장내려 했다.
다리도 없는 에스테반은 피할 수 없을 거다.
에스테반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대검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가 바람처럼 달려와 흑기사의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
흑기사의 몸이 두 걸음 정도 밀려났다.
불의의 기습에 흑기사가 반사적으로 옆을 보았다.
거대한 말이 주인을 지키기 위해 어느새 이곳까지 달려와 있었다.
흑기사는 무감정한 동작으로 그대로 레이야드를 베어 버렸다.
레이야드는 일격에 숨이 끊어졌다. 하지만 사명을 마친 그 표정은 매우 뿌듯해 보였다.
에스테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레이야드 이 멍청한 놈. 이제 자유라고 떠나라 했더니…… 하지만 곧 함께하마!”
에스테반은 한쪽 발로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그대로 흑기사에게 쇄도했다.
“이안! 마지막이다!”
이기든. 지든.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격에 모든 걸 담는 수밖에.
흑기사가 대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피하긴커녕 오히려 더욱 파고들었다.
촤악!
대검이 에스테반의 몸을 사선으로 갈라버렸다.
하지만 에스테반은 멈추지 않았다. 살과 뼈가 갈라지고 내장이 쏟아져 내리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기어코 흑기사의 품에 파고든 에스테반은 녀석의 오금에 검을 꽂아 넣었다.
흑기사의 붉은 안광이 처음으로 당황으로 흔들렸다.
흑기사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죽기 전 생명을 불태우며 내는 인간의 초인적인 힘이. 몸이 잘려나가는 걸 신경 쓰지 않고 공격하는 에스테반의 광기에 가까운 의지.
그 모든 게 예상외였다.
“지금이다! 이안!”
놈의 오금을 베고 균형을 잃은 지금은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이안은 땅을 박차 흑기사의 목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이를 악물었다. 에스테반이 만들어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반드시 목을 베겠다는 일념으로 검광이 번들거렸다.
뒤늦게 흑기사가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안이 더 빠르다.
‘이대로 완전히 베어낸다!’
검광이 흑기사의 갑주를 부드럽게 갈랐다. 이대로 목을 완전히 베기 위해 이안은 더욱 힘을 주었다.
승리가 눈앞에…… 앞에…….
“…….”
이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성검은 흑기사의 목을 정확히 절반 정도 가른 지점에서 멈췄다.
검광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검광 없이는 흑기사의 몸을 베어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