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방어전(9)
“아…….”
정말 조금의 차이였다.
검광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안이 검광을 조금만 더 효율적으로 사용했더라면. 흑기사의 저항이 조금만 덜 거셌더라면.
분명 이안은 흑기사의 목을 완전히 베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조금만’이 모이고 모인 차이는 너무나 컸다.
흑기사는 손바닥으로 이안의 가슴을 때렸다.
“컥!”
갈비뼈가 내려앉는 기분. 땅에 발을 딛지 못해 충격을 흘리지 못했다.
성검이 뽑혀나가며 이안의 몸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베인 상처에서는 흑색 기운이 계속해서 뿜어져 나왔다.
흑기사에게도 만만치 않은 타격을 입혔다는 증거다.
하지만 의미는 없다.
놈은 곧 다른 사람들을 먹어치울 거고, 상처를 회복할 것이다.
흑기사는 고개를 돌렸다.
에스테반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린 흑기사는 그대로 에스테반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에스테반은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에…… 스테반.”
이안은 힘겹게 일어나 다시 검을 잡았다.
흑기사는 에스테반을 막 삼킨 참이다.
에스테반을 완전히 소화시키기 전에 꺼낼 수 있다면, 어쩌면 에스테반을 살릴 수도 있다.
아니. 사실 그도 안다.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고.
에스테반을 살릴 수 있을지는 둘째치고, 당장 흑기사를 막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네스도 그리 외쳤다.
[이안! 지금은 후퇴해야 해요! 아직 흑기사가 부상을 입었을 때, 지금이 유일한 기회에요!]
‘하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은요?’
[…….]
도망치는 게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여기서 이안이 도망치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을 거다.
그 사실을 이네스가 모를 리 없었다.
고민하던 이네스가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안. 저는 이안이 도망쳐줬으면 좋겠어요.]
‘이네스 님 답지 않는 말이네요.’
[제 몸이었다면 오히려 끝까지 싸웠을 거예요.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겠죠. 하지만 이안이잖아요. 뻔히 죽을 걸 알고도 이러는 거야말로 이안 답지 않아요.]
평소에는 절대로 하지 않을 말. 이네스조차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증거였다.
간절한 어조에 이안의 마음도 흔들렸다.
그도 안다.
지금 계속 싸우는 건 비이성적이라는 걸.
다른 무엇보다 검광이 고갈 난 게 컸다.
‘하지만 에스테반이…… 후. 좋아요. 이대로 도망친다 쳐요. 어떻게 도망가는데요?’
[…… 그건.]
이네스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무리 흑기사가 많은 타격을 입었다 하나, 그건 이안도 마찬가지다.
이안이 도망친다면 흑기사는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올 것이다.
‘일단 제가 당장 쓸 수 있는 건 피에람의 긍지 정도예요.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싶지만, 저쪽도 여유가 없어 보이고요.’
이안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나쁜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계획해 둔 것이 없었다.
하지만 흑기사는 이안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여튼 징그러운 새끼.”
이안은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 짧은 틈을 쪼개고 쪼개 이안은 지혜를 쥐어짜 냈다.
흑기사가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놈이 바닥을 밟을 때마다 지면이 울렸다.
이안은 조용히 자세를 잡았다.
단 일격이라도 막아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더는 흑기사를 버텨낼 수는 없었다.
둘의 거리가 지척에 다다른 순간. 흑기사의 대검의 사거리에 들어온 이안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가슴의 브로치에 손을 댔다.
콰아아아아!
주위를 감싸는 화염 장막이 흑기사를 덮쳤다.
강대한 불꽃에 직격당한 흑기사가 주춤거리던 그때.
이안은 브로치를 놓은 뒤 그대로 앞으로 한 발짝 내밀었다.
불꽃이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다.
용의 가호로도 전부 흘리지 못할 만큼 뜨거운 불꽃이다.
이안의 피부가 타들어 갔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이안은 참았다.
“끄으으윽.”
살갗이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하지만 반대로 용의 가호가 불꽃을 흡수해 이안의 몸 안쪽과 마음을 치유해 주었다.
겉은 타고 속은 회복되는 기이한 경험.
‘더 회복돼. 더……!’
이안은 성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지만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일격을 휘두를 검광을 얻어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주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있다.
이안은 힘이 회복되는 걸 느끼며 피에람의 불길이 조금이라도 오래 지속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싸움을 거듭하며 흑기사는 이안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안을 상대로 시간을 주면 안 된다는 것. 설령 피해를 입더라도 무조건 기회가 왔을 때 끝내라는 것.
안광을 빛낸 흑기사가 땅을 박차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온몸이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장 치명적인 궤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검광을 어떻게든 피워 보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머리는 쪼개질 듯이 아팠고, 코에서는 핏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막아낼 거다.
어떻게 해서든.
이안은 이를 악물며 몸에 남은 조금의 힘이라도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런 이안의 머리 위로 흑기사의 대검이 떨어졌다.
놈의 대검에는 검은색 검광이 짙게 서려 있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
에스테반은 흑기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아주 끔찍한 공간이었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제 곧, 에스테반도 저 사이에서도 비명을 지르겠지.
‘이렇게 많이도 먹어치웠으니, 강한 것도 이해가 가는군.’
에스테반은 손에서 검을 놓았다. 검이 저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문득, 지난 몇 년간을 추억했다.
생각 없이 마음 가는 대로. 발 닿는 대로 행동하고 돌아다니는 나날들이었다.
에스테반은 처음으로 자유란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 기분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좋으면서도 좋지 않았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여러 사람을 도왔다. 감사도 받았다. 꽤 보람 있는 날들이었다.
에스테반은 그 전까지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쁘지는 않았다.
기쁘려고 하면 소녀가 떠올랐다. 죽기 전에도 자기를 쳐다보면서도 억지로 미소를 짓던 소녀의 얼굴을.
입 모양으로는 ‘도망쳐’라고 말했다. 확실하지는 않다. 그냥 에스테반은 그리 느꼈다.
그런 추억도. 괴로움도. 아련함도 오늘로써 끝이다.
에스테반은 저 깊은 구덩이 속으로 그저 빨려 들어갈 뿐이었다.
그런 에스테반에게 흐물거리는 무언가가 물고기 떼처럼 달라 붙어왔다.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들은 에스테반의 몸을 씹기 시작했다.
‘악귀? 악령?’
아마도 흑기사에게 빨려 들어온 사람들일거다.
이해는 되었다.
이런 지옥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자신 역시 저런 흉측한 꼴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에스테반은 눈을 감았다.
그는 할 만큼 했다. 발도 잘려나가고, 몸은 사실상 반토막이 났다.
그 누가 에스테반을 탓하겠는가.
그는 눈을 감고 편해지려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그를 물어뜯던 악령들이 갑자기 놀라 달아나 버렸다.
의아하게 생각한 에스테반이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리운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에스테반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하나 남은 손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에스테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째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위를 가리켰다.
마치 아직 할 게 남아 있지 않으냐고 말이라도 하듯.
머뭇거리던 에스테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너는 언제나 내게 깨달음을 주는구나. 릴리.”
그래. 아직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았다.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끝낼 수는 없다.
에스테반은 강한 의지를 발휘해 위로 올라갔다.
머지않아 입구가 보였다.
에스테반은 한쪽씩 남은 팔과 다리를 이용해 입구를 벌리려 했다.
잘되지 않았다.
놈의 아가리는 어찌나 꽉 다물려 있는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검 한 자루가 그를 향해 날아왔다.
에스테반은 요령 좋게 검을 받아냈다.
“이건…….”
그가 앞서서 떨어트렸던 검.
화이트가드의 가주가 장남을 위해 특별히 구한 명검이자, 그가 십수 년을 함께 해온 오른팔과 다름없는 물건이었다.
가혹한 싸움에서도 명검은 여전히 날이 제대로 서 있었다.
에스테반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누가 검을 던져주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보이는 건 어둠뿐. 하지만 에스테반은 누구의 짓인지 알 것 같았다.
에스테반은 검을 들었다.
검 위에 검광이 덧씌워졌다.
인생 마지막 검광.
검광에는 검사의 인생이 담긴다.
이제는 그 인생에 화려한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다.
에스테반은 그대로 흑기사의 배에 검을 박아 넣었다.
푹!
―꺄아아악!
―끄아아아악!
망자들이 비명을 지르고, 온 공간이 떨리기 시작했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에스테반은 그대로 검을 그었고, 마침내 아가리가 열렸다.
다시 드러난 바깥세상에서 보이는 건 이안의 얼굴.
“내가 돌아왔다―!”
호기롭게 외친 에스테반은 그대로 아가리 사이에 몸을 끼워 넣었다.
혹여나 흑기사가 아가리를 닫지 못하도록, 온몸이 짓뭉개지는 한이 있더라도 버틸 생각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흑기사가 굳었다.
에스테반이 다시 외쳤다.
“지금이다 이안―!”
이안도 반사적으로 바닥을 박찼다.
에스테반이 만들어준 마지막 기회.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안은 땅을 힘껏 밟아 뛰어올랐다. 성검과 하나가 되어 흑기사에게 쇄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고갈 난 검광은 제대로 형체를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넘어 생명의 위기를 느낄 정도로 통증이 심해졌다.
여기서 억지로 검광을 더 사용하려 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안!]
‘에스테반이 목숨까지 바쳐서 겨우 틈을 만들어줬는데, 이대로 끝낼 순 없어요!’
왈칵!
이안의 눈, 코, 입, 그리고 귀에서 핏줄기가 솟구쳤다.
그러나 이안은 충혈된 눈동자를 흑기사에게서 떼지 않으며 계속 마음을 가다듬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승리에 대한 집념을.
반드시 이곳에서 끝장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다듬고 또 가다듬었다.
처음 흑기사를 마주치고 검광을 터득한 날.
그때 느꼈던 그 간절함이 되살아났다.
이안의 검에 검광이 다시 피어올랐다.
“……!”
당황한 흑기사가 대검을 횡으로 크게 휘둘렀다.
하지만 계속해 검을 맞대던 이안이다.
상대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 건 흑기사만이 아니었다.
이안은 흑기사의 대응을 완벽히 예측했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고개만을 살짝 숙여 속도를 높였다.
흑기사의 대검이 아주 미세한 간격을 두고 이안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생과 사.
승과 패를 가르는 간격.
그대로 무게 중심을 낮춰 안쪽으로 파고든 이안은 바닥을 손바닥으로 쳐 급격하게 방향을 위쪽으로 틀었다.
브레이브하트의 검을 응용한 기술.
성검이 횡으로 베어 올려졌다.
흑기사는 재빨리 왼팔로 검을 막으려 했다.
이안도 한계다. 이번 일격만 막는다면. 치명상만 피한다면 흑기사의 승리다.
하지만 막혔다.
흑기사는 아래를 보았다.
에스테반이 하나 남은 손으로 흑기사의 팔을 막고 있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다가 입 모양만으로 말했다.
‘넌 끝이야.’
그리고 그 순간.
가슴부터 갈라나간 성검이 흑기사의 반쯤 잘린 목을 마저 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