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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94화 (195/222)

194. 방어전(10)

“카악!”

괴수 하나가 나는 듯이 달려와 플로라에게 아가리와 발톱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이내 우마딜로의 손도끼에 얻어맞고 저 멀리 나가 버렸다.

“고마워요!”

“음!”

플로라는 마법에 집중하며 감사를 표했다.

지금 그녀는 스텔과 짝을 이뤄 테이오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불꽃과 녹색 기운이 허공에 만나 몇 번이고 밀치고, 당기고, 어우러지기를 반복했다.

스텔은 플로라가 밀리지 않게 적절하게 보조하는 한편, 다른 아군을 세심히 지원했다.

전체적으로 난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법사, 성직자, 기사, 그리고 병사들은 괴수들 사이에 섞여 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병력의 질은 이쪽이 훨씬 높지만, 숫자는 상대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 혼란한 시국에서도 스텔은 꼭 필요한 지원을 절묘한 타이밍에 이어갔다.

벌써 그녀의 기적 덕분에 살아남은 아군이 두 자릿수를 넘어가는 중이다.

평소의 멍한 모습과 달리, 스텔은 지금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수련의 성과였다.

반면, 플로라는 제힘을 못 내고 있었다.

아군과 적이 뒤엉키면서 그녀의 특기인 광역 공격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상대하는 테이오스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그 나이에 벌써 이 정도의 실력이라니. 이거, 소문 이상이었군.”

테이오스는 여유를 부리며 플로라를 압박했다.

테이오스의 생명력을 다루는 종류의 마법을 사용했다.

그는 주위 괴수들의 생명을 뽑아다 끝도 없이 밀어붙였다.

플로라가 이를 악물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테이오스를 몰아붙이려 했지만, 저쪽의 방어가 너무 견고했다.

의미 없는 소모전이 계속 이어졌다.

보다 못한 우마딜로가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돕겠다!”

바닥을 뚫고 굵은 나무줄기가 돋아나 테이오스를 향해 뻗었다.

테이오스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손을 휘저었다. 나무줄기가 순식간에 썩어들어갔다.

하지만 우마딜로는 계속해서 땅을 두드렸다.

나무줄기가 연속해서 솟아올랐다.

테이오스는 귀찮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귀찮군 정말.”

테이오스는 괴수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렸다.

일단 귀찮은 우마딜로부터 치워 버릴 속셈이었다.

그때. 아래쪽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테이오스는 반사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플로라의 불꽃이 나무줄기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완전히 썩어 버린 줄 알았던 나무줄기가 다시 한번 성장하고, 테이오스의 몸을 휘감았다.

썩어 버린 탓에 압박감은 크지 않았다.

문제는 줄기를 타고 흐르는 불꽃.

이내 테이오스의 몸이 활활 타올랐다.

“해냈어요 우마딜로!”

“음!”

공기로 불꽃을 날리는 것보다, 매개체를 이용하는 게 더 빠르다는 점을 활용한 연계 공격.

함께 긴 시간을 들여 연습한 일격이 멋들어지게 성공했다.

불꽃에 휩싸인 테이오스는 괴로워하다, 급하게 손을 휘저었다.

얼마 안 가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테이오스도 멀쩡하지는 못했다.

화상을 입어 흉하게 녹아내린 얼굴.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보였다.

치명상은 아니라도 충분히 유효한 타격이었다.

아니. 플로라는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열 받게 하는군.”

테이오스는 괴수들에게서 생명력을 거뒀다.

녹색의 기운이 테이오스의 몸을 감싸자, 상처가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테이오스는 원래의 멀쩡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는 언짢은 얼굴로 말했다.

“조금 놀아보려 했더니, 기어오르는구나.”

테이오스는 괴수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불태워라.”

마법이 괴수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마치 늑대 무리가 하울링을 하듯. 괴수들이 일제히 괴성을 질렀다.

그러곤 다시 아군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달랐다.

괴수들의 힘이 더 강해졌고, 미친 듯이 싸웠다.

순식간에 아군에서도 피해자가 속출했다.

플로라는 테이오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챘다.

“생명을 불태워서 순간적으로 더 강한 힘을 내는 거예요! 생명이 다 타오르면 괴수들은 모두 쓰러질 거예요! 버티면 돼요!”

“하지만 버틸 수 있나?”

우마딜로는 도끼를 휘두르며 무심하게 물었다.

플로라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적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이대로는 상대적으로 후방에 있는 플로라한테까지 괴수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 터.

그 상황에서도 테이오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입술을 질끈 깨물던 플로라는 문득 테이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테이오스는 다음 마법을 준비하며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마치 너 따위가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냐고 말하는 듯이.

“에잇! 짜증 나!”

분을 못 이겨 바닥을 쿵쿵 밟은 플로라가 손을 들고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이내 화염 덩어리가 그녀의 손 위에서 빠르게 커졌다.

우마딜로와 스텔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진정해라. 일단 그 손부터 내려놔라. 위험하니까.”

“……위험해.”

“흥. 그간 수련의 성과를 보일 거예요.”

우마딜로와 스텔은 영 못 미덥다는 듯이 플로라를 쳐다봤다.

“괜찮겠나?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불안해.”

“하하! 분에 못 이겨 아군까지 전부 불태워버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천하의 마녀가 따로 없군.”

동료들의 미심쩍은 반응에 테이오스까지 속을 박박 긁자, 플로라는 더더욱 열이 올랐다.

“누가 마녀라는 거야! 보고 있어!”

손안에 불꽃이 더욱 커다래졌다.

불덩어리가 발하는 열기와 존재감에 싸움에 열중하던 아군들도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당황했다.

“저거 뭐야?”

“설마 떨어트리려는 건 아니겠지?”

“어어…… 이곳으로 굴러 온다!”

플로라는 커다란 공 모양의 불꽃을 아래로 떨어트려 앞쪽으로 밀쳤다.

괴수와 아군들이 싸움을 벌이던 격전지를 향해 화염 공이 빠르게 굴러갔다.

스텔이 서둘러 아군 하나하나에 보호벽을 세워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화염 공이 사람들을 덮쳤다.

“키에에엑!”

“캬아악!”

괴수들은 불타오르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어떤 뜨거움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플로라가 마법을 완벽히 제어해냈다는 증거.

우마딜로와 스텔이 놀란 얼굴로 플로라를 보았다.

“훌륭한 솜씨다. 수련이 빛을 발했군.”

“……대단해.”

“흥.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에요.”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플로라는 짐짓 허세를 불렀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스텔과 우마딜로는 그 모습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플로라가 해낸 일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를 잘 알았다.

웬만한 마법사는 엄두도 못 낼뿐더러, 설령 성공했어도 머리가 엉망이 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렸을 거다.

어쨌거나 공은 계속 굴러갔고, 테이오스의 앞까지 다다랐다.

그 경로에 있는 모든 괴수들은 깔끔히 지워진 참이었다.

테이오스는 미간을 좁혔다. 그 역시 플로라의 솜씨에 놀라 하던 참이었다.

“쯧. 더 성장하기 전에 오늘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군.”

테이오스는 뒤쪽에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괴수들에게서 생명력을 꺼내 손에 모은 뒤, 광선의 형태로 쏘아 보냈다.

솨아악!

화염공의 중앙에 광선이 적중하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화염공은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폭발과 함께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언제까지 그렇게 잘난척할 수 있을지 보자고.”

깔끔한 대처에 다시 팔을 걷어붙인 플로라가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던 그때였다.

―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온 도시를 울렸다.

괴수며 사람이며 할 거 없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얼굴로 귀를 막았다.

그들은 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영혼이 하늘을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우마딜로가 외쳤다.

“중앙광장 쪽이다!”

“그렇다면 저건…….”

가장 먼저 상황을 파악한 건 테이오스였다.

그는 낭패한 얼굴로 생각했다.

‘설마 흑기사가 패배한 건가? 그럴 리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흑기사는 강하다.

일대일로 맞붙으면 테이오스조차 이길 수 없는 괴물이 바로 흑기사다.

설마 그 흑기사가 당하다니…….

‘불찰이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른 일들을 모두 내팽개치고 온 참이었다.

한데, 그가 있음에도 흑기사라는 귀한 전력을 잃고 말았다.

명백히 그의 실수였다.

‘처음부터 나도 전력으로 싸워야 했는데…….’

후회하던 테이오스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당장 중요한 건 이곳에서 자리를 떠야 한다는 것.

흑기사를 상대하던 검사가 돌아오면 테이오스마저 위험해질 수 있다.

흑기사를 상대로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또 모르는 일이다.

하늘을 비행하던 박쥐처럼 생긴 괴수가 그의 어깨에 날아들었다.

테이오스는 박쥐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나중에 기억을 추출해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해야겠군.’

테이오스는 다른 괴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 뒤, 고개를 돌렸다.

괴수들이 다시 광분해 인간들을 향해 돌진했다.

지하 미로의 최심층에 있는 ‘지옥의 입구’를 조금 손 본 참이다.

미로에서는 계속해서 괴수가 튀어나올 터.

테이오스가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어줄 것이다.

“…….”

빠득.

발걸음을 돌리는 테이오스는 이를 갈았다.

흑기사를 잃었음은 물론, 자신의 정체를 이곳에 드러낸 데다가 심지어 능력까지 보였다.

황제에게 얼마나 큰 타격이 될까.

황제와 함께하기로 한 이후 이렇게 큰 실패는 저질러본 적이 없다.

그에 대한 황제의 신뢰도 무너질 것이다.

호전적이고 자존심 강한 테이오스는 차라리 이곳에서 끝까지 싸우다가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알려야 한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곳에 어떤 이들이 있는지를 황제에게 알려야만 한다.

그렇기에 이 굴욕을 참으며 도망쳐야만 했다.

테이오스는 플로라를 보았다.

그조차 놀라게 한 젊은 천재의 얼굴을.

“다음에는 반드시 제물로 삼아주마.”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테이오스는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흑기사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갑옷이 반으로 갈라지며 흑기사의 몸속에 갇혀 있던 영혼들이 용솟음쳤다.

어찌나 그 영혼이 많은지, 밤하늘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

이안은 새삼 흑기사의 대단함을 다시 느꼈다.

‘대체 이런 괴물이 어떻게…….’

멍하니 중얼거린 이안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흑기사의 몸 옆에 에스테반이 쓰러져 있었다.

이안은 부서질 듯 아픈 육신을 겨우 달래 그곳을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에스테반의 곁에 도착하자 이안은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히 아직 에스테반은 숨이 붙어 있었다.

에스테반이 이안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안! 쿨럭! 삶의 마지막에 보는 게 자네라니 다행이군.”

“마지막이라니요. 이 정도 상처쯤은…… 예. 이겨낼 수 있어요.”

이안은 말을 흐렸다.

그도 그럴 게, 에스테반의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는 한쪽씩 없었고, 흑기사의 아가리에 몸은 거의 으스러졌다.

게다가 피를 어찌나 흘렸는지 피부색은 너무나 창백했다.

솔직히 말해 아직 살아 있는 게 기적일 정도의 상태였다.

아무리 신성력이라도. 마법이라도. 그리고 연금술 시약이라도 이런 상처를 치료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안은 애써 희망찬 말을 했다.

“자. 어서 일어나요. 빨리 가서 치료받아야죠. 싸움도 끝났는데, 술 한잔해야 하지 않겠어요?”

에스테반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만하도록 이안. 나한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안은 포기하지 않았다.

“……농담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요. 에스테반. 에스테반의 이야기를 이렇게 끝낼 생각이에요?”

“나의 이야기라…… 하지만 제법 괜찮지 않나? 훌륭한 동료들과 목숨을 바쳐 싸웠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적을 이겼다. 미치광이 기사 이야기의 마무리로 이보다 더 어울리긴 힘든 법이지. 정말이지. 돌이켜보면 많은 일이 있었어.”

“나중에 다 얘기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치료부터 받고요.”

“아니. 나중은 없다. 지금 해야 하는 얘기다.”

에스테반이 하나 남은 손으로 이안의 손을 꼭 붙잡았다.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어. 바보 같은 난 그 마음조차 전하지 못하고, 그녀를 잃어버렸지. 이안.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지켜라. 너의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그렇지 않다면 나처럼 평생 후회 속에 살게 될 거다.”

“…….”

“그러고 보니 그녀와 너는 좀 닮은 것 같아. 어두운 머리색이며 불량한 눈빛 하며.”

이안은 입을 다물고 에스테반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에스테반의 마지막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가문에 전해주어라. 못난 탕아의 마지막이 그래도 제법 의미 있었다고.”

“누구보다 명예로운 끝이었다고 말해드리겠습니다.”

이안은 떨리는 목소리를 억지로 가다듬었다.

에스테반은 그런 이안의 손을 더욱 굳게 쥐었다.

도저히 죽어가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이제 이안 네가 대륙 제일의 기사다. 그러니 나 대신 뒤를 부탁하마.”

에스테반의 고개가 꺾였다.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에 잠시 얼굴을 파묻었던 이안이 힘겹게 일어났다.

아직 슬퍼할 때가 아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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