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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95화 (196/222)

195. 선언

테이오스는 빠르게 이동해 그대로 황궁에 갔다.

가봤자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황제는 테이오스를 본보기로 처형할 수도 있다.

아니. 그게 옳았다.

테이오스가 악마의 힘을 빌려 쓴다는 사실이 소문나면 황제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될 터.

하지만 테이오스는 도망치지 않았고, 황제에게 갔다.

대업을 위해 함께하는 동지와 같은 사이지만, 그는 진심으로 황제를 존경했다.

테이오스는 곧장 황제가 있는 알현실로 향했다.

이미 늦은 밤이었지만 황제는 거의 잠을 자지 않는다.

분명 알현실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황제는 오테르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은 심각한 것이, 이미 대충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테이오스가 인기척을 내자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테이오스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테이오스 공! 오랜만에 보는군!”

테이오스는 곧바로 바닥에 엎드려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실패했습니다. 흑기사는 죽었고, 제 능력도 들키고 말았습니다.”

오테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실패를 비웃어주었겠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그는 황제의 표정을 살폈다.

황제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시오.”

테이오스는 여전히 엎드린 채 답했다.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 마탑과 피에람의 마법사들, 그리고 아이벤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도시에는 흑기사를 잡기 위한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흑기사가 아이벤에 올 걸 미리 예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딘가에서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황제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없소. 흑기사에 관한 건 오직 우리 셋만이 알지 않소? 오테르 공이 정보를 흘렸겠소? 아니면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

“하지만…….”

“내가 너무 뻔하게 행동한 것 같소. 적에게 전부 간파당한 거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흑기사가 당할 줄은 몰랐는데.”

오테르도 심각한 얼굴로 동의했다.

“맞습니다. 흑기사는 그 정도에 당할 괴물이 아닙니다. 테이오스 공. 말해보시오. 무언가 더 있지 않소?”

오테르의 재촉에 테이오스가 털어놓았다.

“유독 강한 실력을 갖춘 이들이 있었습니다. 피에람의 여식. 숲의 종족. 은발머리를 한 성직자. 저는 이 셋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흑기사를 상대한 건 검광을 사용하던 두 검사입니다.”

“검광이라. 그게 누구요?”

“한 명은 에스테반이었습니다. 미치광이 에스테반.”

에스테반이라는 말에 황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군. 에스테반 경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군.”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검은 머리를 한 검사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코르디스에서 봤었던. 이름이 분명…….”

“이안. 기억하오. 악마의 강림 때 공을 세우고 전사한 줄 알았는데, 살아있었다니. 놀라운 일이군.”

“그놈의 실력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흑기사의 마무리를 한 것도 바로 그놈이었습니다.”

이어서 테이오스는 원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놈은 앞으로 폐하의 큰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전하! 코르디스에서 놈을 보았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놈을 처리했어야 합니다! 왜 말리셨습니까!”

“테이오스! 실패하고 돌아와 폐하를 탓하는 것이오!”

오테르의 호통에 테이오스가 움찔했다.

지금 그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테이오스가 비장하게 말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목을 내어야 한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대업은 폐하께서…….”

“고개 드시오. 테이오스 공.”

황제는 인자하게 말했다.

테이오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황제가 그의 손을 잡았다.

“테이오스 공. 우리가 함께한 지 얼마나 되었소?”

“……10년. 아니. 11년 정도 되었습니다.”

“맞소. 11년간 참 힘든 일이 많았소. 그때는 이렇다 할 기반도 없던 애송이였으니 말이오. 암살시도, 분쟁, 모함. 하루하루가 위기였소.”

실로 그러했다.

황제가 걸어온 길은 좋게 말해도 평탄한 길은 아니었다.

간발의 차이로 운 좋게 살아남은 적만 몇 번이던가.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테이오스 공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주었소. 궂은일, 더러운 일, 남들이 꺼리는 일을 불평 없이 완벽하게 해주었지. 만약 테이오스 공이 없었다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을 것이오. 그러니 일어나시오. 나에게는 아직 테이오스 공이 필요하오.”

황제는 테이오스의 손을 따뜻하게 붙잡아 일으켜주었다.

테이오스가 머뭇거렸다.

“하, 하지만.”

“나를 실패 한 번에 충신…… 아니. 친우를 내치는 박정한 인간으로 만들지 마시오. 실패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싶다면, 더 열심히 일하면 될 뿐이오.”

당황한 테이오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떨렸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굳힌 듯.

테이오스는 다시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조아렸다.

“저와 똑 닮은 시신을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도주하다가 폐하가 직접 저를 사살한 것으로 해주십시오. 저는 그림자 속에 숨어 폐하를 돕겠습니다.”

“공의 뜻이 그렇다면, 그것까지는 말리지 않겠소.”

“준비할 게 많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테이오스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인 뒤 알현실을 나섰다.

올 때와는 달리 그의 발걸음에는 다시 힘이 있었다.

침묵하고 있던 오테르가 침중한 얼굴로 말했다.

“큰일이군요. 흑기사를 잃다니…….”

“하하. 오테르 공은 흑기사를 부리는 데에 반대하는 입장 아니었소? 오히려 좋아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는 폐하도 표정이 오묘하시군요. 기쁘지도, 분하지도 않은 사람 같이요.”

긴 시간을 함께해온 둘이다.

서로의 표정 정도는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황제는 부인하지 않았다.

“맞소. 나도 딱히 흑기사를 좋아하지 않았소. 하지만 미워할 수도 없는 이요.”

“흑기사의 대체 무엇이길래 그렇습니까? 거듭 물어도 그 정체에 대해서는 알려주시지 않으셨잖습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오. 그저 미래를 위해. 그리고 속죄를 위해 지상을 떠나지 못한 황가의 망령이라는 점만 알뿐이오. 후대를 돕겠다는 그 명예로운 마음은 이제는 변질 돼 찾아볼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얘기를 들으니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더군.”

씁쓸하게 중얼거리던 황제는 이내 짝! 하고 손뼉을 친 뒤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상황이 좋지 않소. 우리, 당장 처리해야 할 일들에 대해 얘기하지 않겠소? 우선 기어코 추격대를 따돌린 내 여동생에 관한 이야기라거나.”

사건이 연달아 터지고 있다.

서서히 위기가 다가오고, 황제의 권위는 흔들리고 있다.

하지만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수 없이 넘어왔고 앞으로도 넘어야 할, 힘겨운 시련 중 하나일 뿐이니.

***

이안은 에스테반의 시신을 눕히고 그 눈을 감겨주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검 한 자루를 들어 올렸다.

에스테반이 죽기 전, 건네준 자신의 검.

이안은 그 검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그때쯤 흑기사의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오는 것도 멈췄다.

워낙 많은 사람을 잡아먹었기에, 다 빠질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이다.

이안은 흑기사에게 다가갔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가 발하는 안광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민하던 이안은 조심스럽게 흑기사의 머리를 집어 들어, 그 투구를 벗겼다.

에스테반을 죽인 강적.

적어도 그 얼굴 정도는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투구를 벗기자 흑기사의 얼굴 윤곽이 완전히 드러났다.

흑기사에 대한 이안의 첫인상은…… 노인.

그저 평범하게 나이 든 노인이었다.

자글자글한 주름에 고집스럽게 다물린 입. 하얗게 세 푸석푸석한 머리.

어딘가 기품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온 대륙을 공포에 떨게 한 괴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범하고 선한 인상이었다.

그 괴물은 말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검은색 피를 흩뿌리며.

[…….]

‘…….’

이안도. 이네스도 침묵했다.

막상 무얼 말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테반의 죽음에 대해 원망할까?

아니면 그간 저질러온 죄에 대해 화를 낼까?

패배에 대한 비웃음을 날릴까?

그 중 어느 것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던 그때, 침묵을 깬 건 흑기사였다.

“이안.”

이안은 화들짝 놀랐다.

이미 목이 잘렸는데 말을 하다니.

그보다 더한 일도 일어나는 이 세계에서는 사실 놀랄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갑작스러웠다.

“네가 이번 대의 영웅인가?”

“……그래.”

“알았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흑기사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이안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흑기사의 눈에 서린 안광이 점점 잦아들었다.

평범한 노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깊고. 차분하고. 왜인지 후회와 죄책감이 가득한 눈동자가.

흑기사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한마디 말을 뱉고 눈을 감았다.

“미안하다.”

무엇에 대한 미안함일까?

수많은 사람을 먹어치워 온 것이?

그가 행한 죄업이?

아니. 애초에 누구한테 미안하다고 말한 걸까.

이제는 알 수는 없다.

흑기사는 죽었으니까.

‘이럴 거면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그랬어.’

이안은 묘한 후회를 느끼며 흑기사의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내 흑기사의 머리가 가루가 되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이안은 문득, 이네스의 기색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닌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안은 묻지 않았다.

그편이 나을 편이라는 감이 들었다.

이윽고 흑기사의 몸이 완전히 흩어졌다.

흑기사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는 황금색 구슬 하나가 남아 있었다.

이안은 그 구슬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지?’

게임에서 흑기사를 잡아도 이런 아이템이 드롭 되는 일은 없었다.

당장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안은 그 구슬을 요술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

[이만 쉬어요 이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에요.]

‘아뇨. 다들 싸우고 있는데, 도와줘야죠.’

이안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걸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괴수와의 싸움은 이미 끝났다.

테이오스를 잃은 괴수들은 플로라의 강력한 화력에 일망타진당했다.

싸움을 마친 아군은 중앙 광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주위와 숨을 거둔 에스테반. 그리고 만신창이가 된 이안을 보며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그중에서 동료들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이안! 괜찮아! 뭐야!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건데!”

“……바로 치유할게.”

“뼈가 산산이 조각났다. 치유하기 전에 일단 뼈부터 다시 맞춰야 한다.”

플로라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어댔고, 우마딜로와 스텔은 이안을 바로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이안은 그런 그들을 제지했다.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어.”

“뭐?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당장 치료 받…….”

이안은 플로라를 밀치고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한 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도 큰 고통이었지만 이안은 혼자 힘으로 앞으로 나섰다.

살아남은 아군들이 그런 이안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지친 몰골들.

이안 만큼이나 격렬한 싸움을 치른 이들이다.

이들은 아직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불안을 없애줘야 할 의무가 이안에게 있었다.

이안은 그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흑기사는 죽었습니다! 수많은 희생 끝에 놈은 이 대륙에서 영원히 떠나 버렸습니다!”

이안의 그 선언에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했다.

몇몇은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안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다시 긴장했다.

이안은 지쳐서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말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아직 수많은 싸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 끝에 있는 건…… 대악마입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줄였다.

이안은 성검을 하늘 높이 들었다.

“이번 대의 영웅으로서 감히 선언하니.”

잠시 뜸을 들인 이안은 이번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요한 사위로 이안의 작지만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악마를 쓰러트릴 겁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낼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를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힘을 보태주십시오.”

조용한 목소리.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호소력 짙은 목소리.

이안은 비로소 자신이 선택받은 영웅임을 드러냈다.

알고 있던 이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처음 들은 이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대륙의 공포인 흑기사를 쓰러트린 이안을 그 누가 의심하겠는가.

만족스러운 반응에 이안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안……!”

플로라가 이안을 어깨를 잡았을 때, 이미 이안은 잠에 들어있었다.

고된 표정으로 잠든 이안을 그 누구도 감히 깨울 수 없었다.

너무나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영웅이 잠듦과 동시에 여명이 떠오르는 모습에 사람들은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침묵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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