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싸움이 끝나고
이안은 욱신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잠에서 깼다.
꿈조차 꾸지 않을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이안이 물었다.
‘제가 얼마나 잠들었죠?’
[사흘이요. 더 쉬세요. 이안. 아직 안정을 더 취해야 해요.]
‘사흘이라니…… 오래도 잠들었네요.’
조금 창피했다.
싸움을 마치고. 자신의 정체까지 밝힌 이상 그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한가롭게 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었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기 힘들었다.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거예요. 흑기사는 그만큼 강한 적이었으니까요.]
‘그래요. 강했죠. 이번에는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하룻밤의 싸움에 죽을 고비가 얼마나 많았는지 다 세지도 못할 정도였다.
에스테반의 분발과 영웅적인 희생이 없었다면 이안은 지금쯤 흑기사의 뱃속에서 소화되고 있었을 것이다.
‘에스테반…….’
이안은 에스테반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해졌다.
그에게 에스테반은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게임을 할 적부터 좋아하던 캐릭터였으며, 잠깐이나마 그의 스승 역할도 해주었다.
게다가 이안은 에스테반을 꼭 살리겠다고 다짐했었다.
게임에서 정해진 사건들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위해 계속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안은 결국 실패했다.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드니 지독한 허무함과 함께 기운이 빠졌다.
이안은 다시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이네스는 허리에 양손을 짚고 이안을 나무랐다.
[흑기사를 상대로도 포기하지 않던 이안이 이런 식으로 주저앉으면 어떻게 해요.]
‘……방금은 좀 쉬어도 된다며요.’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대로라면 계속 스스로를 책망하기만 할 거잖아요? 에스테반 경은 훌륭하게 자신의 인생을 마무리 지었어요. 그러니 그런 에스테반 경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안은 일어나야 해요.]
너무나 옳은 말에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 놓고 실의에 빠져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포기하든, 도망치든, 할 거면 진즉에 했어야 한다.
이안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흑기사와의 싸움을 복기했다.
흑기사는 이견이 없을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그런 괴물과 검을 맞대는 것으로 이안도 깨달은 바가 많다.
그 깨달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전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었다.
이안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날의 싸움이 눈앞에 생생히 펼쳐졌다.
이안은 식은땀을 흘렸다.
흑기사는 상상에서도 마주치기 두려운 적이었다.
‘흑기사도 이런데 하물며 대악마는…….’
이안은 시간을 들여 차분히 복기했다.
놈과의 싸움은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흑기사의 일격 하나하나에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가 굉장히 많았다.
마침내 복기를 마치고 이안이 한숨을 돌렸다.
“후우. 다시 생각해도 이긴 게 기적같네요. 조금만 엇나갔다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해요.”
[싸우던 그때의 감각을 잊지 마세요. 그런 적과 싸우는 건 쉬이 얻을 수 없는 값진 경험이니까요.]
“대체 그 괴물은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이안이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왠지 이네스라면 정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잠시 뜸을 들인 이네스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글쎄요. 오랜 기간을 살아온 괴물. 그 이상으로 알 필요가 있을까요?]
“예. 그렇죠. 꼭 세상 모든 걸 알 필요는 없겠죠. 배가 엄청 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어요.”
황급히 주제를 돌린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문 앞에 선 건 플로라였다.
그녀는 이안을 보고 눈에 띄게 밝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급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왜 이렇게 오래 자는 거야! 혹시 안 깨어날까 봐 엄청 걱정…… 스텔 양이랑 우마딜로가 걱정했다고.”
“미안. 그거 전해주러 온 거야? 다른 심부름꾼한테 시키지.”
이안은 플로라의 손에 들린 물에 적신 수건을 집어 들어 몸을 닦았다.
플로라가 그런 이안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괜찮은 거 맞아? 온몸이 땀으로 푹 젖었잖아. 열이라도 있는 거 아니지?”
까치발을 들고 이안의 이마에 손을 대보려는 플로라를 보며 이안의 쓴웃음을 지었다.
“아파서 땀 흘린 거 아니야. 잠시 집중할 일이 있었거든.”
“……환자면 환자답게 쉬기나 해. 쓸데없이 체력 소모하지 말고.”
“그래그래. 마침 점심시간인데 어서 밥이나 먹자.”
이안은 플로라의 등을 앞으로 밀며 식당으로 향했다.
이미 식탁 앞에는 스텔과 우마딜로가 앉아 있었다.
우마딜로는 이안을 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깨어났나 이안!”
“덕분에.”
“……치유할게.”
스텔은 습관적으로 치유 기적을 읊어 이안을 치유하려 했다.
딱히 다친 곳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 스텔을 말린 이안은 식탁 앞에 앉았다.
얼마 안 있어 예배당의 일꾼들이 은쟁반에 음식을 가득 담아 왔다.
그들은 이안을 보며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더니,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 부디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감사히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이안의 의례적인 감사 인사에 일꾼들의 표정에 기쁨이 가득하였다.
이곳에 머무른 지도 제법 되었으니 이제 와 유별나다 싶은 반응이지만, 그들은 그전까지 이안을 그저 교단의 손님으로 알고 있었다.
교단이 인정한 영웅과는 느낌이 달랐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앞으로는 이런 반응들에 익숙해져야 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한숨을 내쉰 이안은 갓 구운 빵에 손을 가져갔다.
식사를 시작하자 동료들은 이안이 잠든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 해주었다.
이안은 가끔 맞장구만 쳐주며, 얘기를 경청했다.
“온 대륙에 네 소문이 퍼졌어! 교단의 영웅이 나타났다고. 그리고 그 영웅이 흑기사를 꺾고, 악마 토벌을 선언했다고. 그것 때문에 다들 시끌시끌해.”
플로라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이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영웅의 탄생과 흑기사의 죽음.
대륙의 사람들이 얼마나 흑기사를 두려워했는지를 생각하면 소문이 빠르게 퍼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플로라는 밥 먹는 것도 잊고 계속 재잘거렸다.
“테이오스에 대한 얘기도 같이 퍼졌어. 테이오스와 흑기사가 함께하고 있었으며, 테이오스는 악마의 마법을 다뤘다고. 덕분에 황제에 대한 의심도 엄청 커졌대.”
“황제는 뭐라고 하든?”
“자기는 몰랐대. 그리고 테이오스에게는 추적대를 보내 사살에 성공했대. 테이오스의 목이 황궁의 성문에 걸렸다고 하네.”
“흠.”
잠시 고기를 씹으며 고민하던 이안이 물었다.
“진짜 죽인 건 아니겠지?”
“당연히 그렇겠지! 뭐 얼굴이 똑 닮은 다른 사람을 대신 죽였거나 하지 않았겠어?”
이안도 플로라의 의견에 동의했다.
‘황제가 테이오스를 내쳤을 것 같지 않아요.’
테이오스는 사악하지만 애초에 황제 역시 깨끗한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테이오스는 유능하다.
황제가 그런 실력자를 내칠 것 같지 않았다.
‘이제 완전히 황제의 적이 되었네.’
흑기사를 처치하고, 영웅의 지위를 밝혔다.
이제부터 이안은 부인할 수 없이 황제의 적이 되었다.
황제는 어떤 수를 써서든 이안을 처리하려 할 것이다.
교단의 영웅을 대놓고 해하지는 못하겠지만…….
‘암살자나 독 정도는 조심해야겠어.’
흑기사의 다음 차례는 황제다.
게임의 흐름대로라면 곧 대륙을 집어삼킬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이안은 황제에 맞서야 했다.
‘전쟁은 오래 끌수록 안 좋아. 되도록 빠르게 끝내야 해.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아비게일이랑 로드릭과 상의를 해봐야겠어.’
이안은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나갔다.
단 며칠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게 바뀌어 있었고, 그만큼 신경 쓸 것도 많았다.
이안은 생각에 잠긴 와중에도 돼지고기 하나를 나이프로 잘라 스텔의 앞에 놓아주었다.
음식에 익숙하지 않던 스텔은 예전에는 고기를 씹는 것도 힘겨워했지만, 이제는 곧잘 먹는 듯했다.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자기 앞접시를 포크로 두드리는 플로라에게도 고기를 한 점.
접시를 산채로 쌓아두고 포식을 즐기는 우마딜로의 앞에도 고기를 올려주었다.
그렇게 손과 머리를 둘 다 바쁘게 사용하다 보니 식사가 금방 끝났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자마자 사제 중 하나가 찾아와 말했다.
“영웅님.”
“낯간지러우니까 이안이라 부르세요.”
“그러면 이안 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래요. 말씀하세요.”
“이번 싸움에서 전사한 이들을 기리며 추모 행사를 열 계획입니다. 부디 참석해주십시오.”
“……혹시 제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겁니까?”
“오늘까지 일어나시지 않았으면 그대로 진행했을 예정이었습니다.”
이안은 괜스레 미안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그럴 필요 없는 데…….”
조그맣게 중얼거린 이안은 사제의 뒤를 따랐다.
사제는 이안 일행을 위해 새 옷을 준비해주었다.
흑기사와의 싸움에 망토를 제외하면 옷이 넝마가 되었기 때문.
일행은 모두 새 옷으로 단장했다.
플로라는 화려한 드레스로.
나바혼은 평범하게 편한 복장으로.
그리고 스텔은 아직 사치를 부리는 데에 거부감이 큰지 수수한 사제복을 입었다.
준비를 마친 일행은 사제의 안내에 따라 광장으로 이동했다.
엉망이 된 중앙광장에 수십 개의 관이 쭉 늘어서 있었고, 그 주위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인파는 이안이 다가오자 양옆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냈다.
“저 사람이 영웅이라고?”
“불길하게 생겼는데 진짜 맞아?”
“쉿. 듣겠다.”
“난 봤어. 기가 막히게 잘 싸우더라고.”
소곤거리던 이들은 이내 병사들의 매서운 눈총을 맞고 입을 다물었다.
이안이 관 쪽으로 다가서자 영주가 그를 맞이했다.
“왔습니까?”
“예.”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전과 달리 이안에게 한층 더 공손해진 영주가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사제가 나와 죽은 자들의 넋을 기리는 기도를 외웠고, 영주는 짧게 전사자들의 용맹과 헌신을 치하했다.
사람들은 함께 기도하고 묵념한 뒤, 이내 자기들과 연이 있는 관으로 가 꽃다발을 헌화했다.
이안은 에스테반의 관 앞으로 갔다.
살짝 들어 올려진 관에서 에스테반은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관을 부여잡고 흐느끼고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안은 사내에게 가 조심스레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마틴.”
“훌쩍. 이안. 아니, 이안 님. 오랜만입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에스테반의 친동생.
마틴 화이트가드가 코를 훌쩍이면서도 고집스럽게 말했다.
‘사흘 만에 코르디스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이 두 형제의 관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서로 간에 애정이 있다는 건 알았다.
이안은 마틴에게 에스테반의 검을 내밀었다.
“이건…….”
“마틴이 사용해주면 에스테반 경도 기뻐할 거예요.”
마틴은 에스테반의 검을 손에 쥐고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안에게 말했다.
“형님은 가문을 버리고, 기사단을 버리고, 보장된 미래를 버렸습니다. 어렸을 때의 전 그 선택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죠. 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원하기에 그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었을까. 저는 아직도 그 답을 모릅니다.”
마틴이 고개를 돌려 이안의 눈을 보며 물었다.
“형님은 과연 마지막에 원하는 걸 얻어냈을까요?”
이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분명히.”
“그럴까요? 그럼 다행이군요.”
마틴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한참이나 에스테반을 내려다보았다.
***
행사가 끝나고. 할 일이 너무나 많았지만 이안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웠다.
실제로 아직 몸 상태가 영 아니었던 것도 있지만,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이안은 품을 뒤져 주머니 속에 있던 구슬을 꺼내 들었다.
영롱한 황금색 구슬이었다.
‘분명 평범한 물건은 아니란 말이지.’
구슬에서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분명 흑기사의 힘 일부가 담긴 것일 거다.
‘이걸 어떻게 한담.’
생긴 거로만 봐서는 삼켜야 할 것 같았다. 색깔도 왜인지 먹음직스러웠고.
하지만 선뜻 입에 넣기에는 영 불안했다.
‘이걸 먹고 갑자기 저도 흑기사처럼 타락해 버리거나 그러면 어떻게 하죠?’
[…… 그러면 사제님들이나 마법사님들께 구슬의 조사를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요?]
‘아뇨. 그러면 무조건 반대할 거 같아요. 저 같아도 그럴 거예요.’
사악한 괴물의 몸에서 굴러나온 구슬을 먹겠다니.
교단의 영웅에게 그런 짓을 시킬 수는 없을 거다.
이안은 구슬을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먹지 않는 게 맞다.
하지만 반드시 먹어야 한다고 직감이 외쳐댔다.
한참을 고민하던 이안은 결국 결심을 내렸다.
“에라 모르겠다.”
이안은 구슬을 입에 넣고 그대로 삼켜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