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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199화 (200/222)

199. 합류(2)

레아가 새로 동료가 됨으로써 비로소 5명이 되었다.

처음 이 세상 속에 떨어지고.

이안이 동료로서 맞이하기로 생각했던 캐릭터들이 전부 모인 것이다.

그간의 고생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니 감회가 남달랐다.

‘앞으로도 할 고생이 더 많지만요. 지금은 일단 레아가 다른 애들이랑 잘 어울리면 좋겠네요.’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레아는 의외로 금방 적응했다.

코르디스에서는 데면데면했었지만, 플로라와는 비슷한 나이에 공감대가 맞아서인지 빠르게 친해졌다.

또한 그녀는 믿음 깊은 신앙인이었기에 스텔을 좋아했고, 스텔도 그런 레아를 싫어하지 않았다.

제일 걱정이었던 우마딜로와는 대련을 벌이며 무기를 몇 번 섞은 뒤 서로를 뛰어난 전사라고 인정했다.

‘좀 어색해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그녀도 변한 거겠죠.]

코르디스에서 보았던 레아는 고독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 신분과 아름다움, 실력에 이끌려 수많은 사람이 다가왔지만, 레아는 그 모두를 거부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조금 서툴러도 레아는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려고 하고 있었다.

‘여러 일이 있었던 거겠죠.’

[예. 그리고 이제 그녀의 어깨에 무거운 의무가 생겼잖아요?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필요가 있어요.]

그녀는 함께 황제를 타도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제를 무사히 끌어내리고 나면 그 빈자리를 누군가는 메워야 한다.

황실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현 황제와 레아를 제외하면 황족은 모두 죽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음 제국을 이끌 황제는 레아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전사와 달리, 황제는 여러 사람과 손발을 맞춰야만 하는 자리다.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레아가 차기 황제라…… 지금부터 잘해 놓아야 나중에 편하겠는데요?’

새삼 레아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자, 레아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 할 말 있나요? 이안.”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하.”

레아가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제가 좀 더 편하게 부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차기 황제가 되실 사람이라 생각하니 입이 잘 안 떨어지네요.”

“플로라나 스텔은 편하게 부르면서…… 됐고. 오랜만에 대련이나 하죠.”

이안이 순순히 검을 뽑아 들자, 레아도 검을 뽑아 들었다.

둘은 이내 말없이 맞부딪혀 검을 섞었다.

초인의 반열에 진입한 이안은 신체의 강함을 이용해 초반부터 밀어붙였다.

레아는 맞서지 않았다.

맞서봤자 힘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걸 알았다.

그녀는 절묘하게 검의 각도를 조절해 힘을 흘리고, 황실의 검술을 선보였다.

레아의 실력은 황궁에서 봤을 때와 몰라보게 달라졌다.

추격대를 상대하며 숱한 위기를 겪으며 그녀의 검술에는 실전성이 더해졌다.

게다가 늘 부족했던 경험이 채워지니 레아는 이제 웬만큼 노련한 기사들보다 더 절묘하게 싸웠다.

재능.

그녀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이안처럼 이네스에게 전해 받은 재능이 아닌 스스로의 재능이었다.

그 재능에는 이네스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그 짧은 사이에 이렇게 성장하다니. 놀라울 정도예요.]

‘이네스님과 비교해서는 어떤데요.’

[…… 또 짓궂은 질문을 하는군요.]

검을 섞는 와중에도 이안은 잡담을 나눌 정도로 여유로웠다.

레아가 강해졌다 하나 이안과의 실력 차이는 아직 너무나 컸다.

특히, 이번 흑기사의 힘을 흡수한 게 컸다.

더 강화된 월안은 원치 않아도 상대의 마음과 움직임을 읽었고, 이따금 터트리는 거인의 포효는 상대의 혼을 빼놓았다.

솔직히 말해 레아의 일격은 정교했지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기색이 레아에게도 느껴진 걸까?

레아가 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검에는 황금빛 검광이 서렸다.

“아무래도 제가 많이 부족한 모양이네요. 제대로 해보도록 하죠.”

“……검광도 사용할 줄 아셨네요. 그보다 대련에서 검광은 역시 좀 그런 것…….”

부웅!

이네스의 검이 치명적인 궤적을 그리며 급소를 노려왔다.

이안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피한 뒤, 검광을 피워내 응수했다.

두 검광이 맞붙을 때마다 하얗고 노란 불티들이 사방에 튀었다.

이쯤 되자 이안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한쪽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이안이 집중하자 레아도 그제야 만족한 기색으로 더 가열하게 밀어붙여 왔다.

‘이제 보니 화끈한 기색이 있으시구만.’

레아의 검광은 몹시도 단단하고 심지가 굳다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손에서 쥐지 않고 끊임없이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이니.

오랫동안 공들여 쌓은 탑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

만약 흑기사의 힘을 흡수해 검광을 늘리지 못했더라면 밀리는 건 이안이었을 거다.

쾅!

검을 맞댄 채 내지른 이안의 주먹에 레아가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그걸로 대련은 끝.

뒤늦게 싸움에 너무 몰입했음을 깨달은 이안은 서둘러 레아에게 다가갔다.

‘차기 황제니까 조심히 대하자고 마음먹은 게 바로 아까 전인데…….’

레아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가 부딪힌 벽은 일부 부서져 있었다.

이안이 얼마나 강하게 때렸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혹여나 레아가 화났을까.

이안이 조심스레 레아를 살폈다.

하지만 레아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어딘가 사나이다운 호탕하고 후련한 웃음이었다.

이안은 그 모습에 크게 당황했다.

‘어, 어떡하죠. 제가 아무래도 너무 세게 때려서 레아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죠.]

이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신가요?”

“몸이 좀 쑤시지만 이 정도는 문제없어요.”

“근데 왜 웃으시는지…… 혹시 머리가 아프거나 그러시진 않죠?”

레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안을 쳐다보다, 그대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냥. 이렇게 대련에서 누가 전력으로 공격한 게 너무 오랜만이어서요. 황궁에서는 다들 제 지위를 신경 쓰느라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았거든요.”

“네…….”

“옛날 생각도 나고요. 코르디스에서 이렇게 대련했던 적이 있잖아요?”

확실히.

그 당시에도 이안과 레아는 서로 목검을 겨누며 실력을 겨뤘다.

그때의 레아의 실력은 이안에 비해 몹시 뛰어났고, 대련도 레아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랬던 그 둘의 실력은 지금 이렇게 역전되었다.

레아는 생각했다.

‘내가 황궁에서 안락하게 지내는 동안, 이 사람은 수많은 위기를 겪으며 강해졌겠지.’

후회되었다.

왜 시간을 더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을까.

왜 진즉 황궁을 나서 경험을 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후회를 그저 후회로 남기면 헛된 감정 소모가 될 뿐이다.

그간 낭비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레아는 더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녀의 친형제를 막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녀가 계속 짊어져 온 사명을 위해서라도.

‘사명.’

그 단어가 다시 한번 뇌리에 떠올랐다.

평생을 마음속에 꼭꼭 숨겨오고, 레아의 어깨를 짓눌러왔던 무거운 의무.

레아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이안. 그리고 다른 동료들이라면 말을 해도…….’

처음으로 그 사명을 함께 공유해보고 싶었다.

레아가 막 입을 열려던 그때.

교단의 사제 하나가 찾아왔다.

“이안님. 그리고 저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 도착했나 보네요. 바로 준비하고 갈 테니, 기다려달라 하세요.”

“알겠습니다.”

이안은 고개를 돌려 레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아는 입을 뻥끗하다, 이내 다물었다.

그리고 그 손을 붙잡으며 일어섰다.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

둘은 함께 연무장을 나서 손님을 맞으러 향했다.

***

“플로라! 내 딸! 잘 지냈니! 아빠가 일주일에 한 번은 편지를 보내라고 하지 않았니!”

“……어. 아빠 왔어?”

몇 개월 만에 딸을 보는 로드릭은 더 심한 팔불출이 되어 있었다.

로드릭은 곧바로 달려들어 플로라를 껴안으려 했지만 플로라는 양손을 뻗어 로드릭의 접근을 제지했다.

플로라의 거부에 상처받은 얼굴로 몸을 떨던 로드릭이 이내 이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느슨해졌던 표정을 다시 엄숙히 했다.

“고생 많이 했네. 흑기사는 분명 강력한 상대였을 텐데.”

“실제로 여러 번 죽을뻔하긴 했죠.”

“자네가 죽으면 우리 모두 난처해지네. 용맹히 싸워 공을 세우는 것도 좋지만 몸을 생각하게.”

그리고 로드릭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흠흠. 딱히 자네를 걱정한다기보다는 나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네.”

“아. 예.”

‘이 아저씨가 보기 싫게 왜 이래.’

아무래도 플로라가 이상한 부분에서 부끄러워하는 건 유전인 듯했다.

“흠흠. 로드릭님. 영웅께 저희도 소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내가 경황이 없었군. 소개하겠네.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이들이네.”

로드릭의 뒤에는 ‘반 황제파’에 속한 영주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그들은 호기심과 경외, 의심과 당혹감을 눈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 한 영주가 당황해 말했다.

“어…… 얘기는 익히 들었지만, 영웅의 외견이 참. 예. 독특하군요.”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은 멸시의 대상.

그런 사람이 교단에 인정받은 영웅이 되었다는 건 여러모로 그들의 믿음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소문으로는 이미 들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으니.

이안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태어난걸.”

“아, 아뇨. 심기를 불편하게 할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안의 표정을 본 귀족이 당황해 고개를 조아렸다.

예전에는 외모로 업신여김을 받았는데, 지금은 얼굴만 찌푸려도 오히려 상대방이 쩔쩔맨다.

‘이게 격세지감인가?’

이안은 표정을 풀고는 이 자리에 모여준 귀족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그 세력의 크고 작은 차이는 있어도, 모두 황제를 막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 이들이다.

전쟁이 벌어지면 이안의 편에 서 함께 싸워줄 것이다.

악수를 마친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교단의 사절과 군소 세력의 인물들. 그리고 텔 왕국의 외교관까지 있었다.

이안은 그들과도 인사를 마친 뒤, 자리에 앉았다.

원탁에 앉은 이들은 침묵을 지킨 채 로드릭을 쳐다보았다.

이번 회의의 주최자는 로드릭이었다.

로드릭은 자리에서 일어나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먼 걸음을 해주신 분들께 감사를 표하는 바요. 이곳에 무엇을 위해 모였는지는 다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오.”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한번 살핀 로드릭이 이어 말했다.

“이번 흑기사와 테이오스의 일로 황제가 악마 숭배자 세력과 연관이 있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소. 그의 권력에도 큰 타격이 되었지. 하지만 황제는 아직 그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소. 겨울이 지나고 봄이오면, 그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오. 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텔 왕국에서 온 외교관이 질문했다.

“황제는 왜 이리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오.”

“글쎄. 우선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오. 인정하기 싫지만 황제의 능력만은 매우 뛰어나니.”

제국의 힘은 강하다.

홀로 온 대륙을 상대로 싸워도 이길 정도로 강하다.

반황제파 세력이 떨어져나갔지만, 제국의 힘은 여전히 무시할 게 못되었다.

특히 그 수장이 황제라면 더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다른 이유는 솔직히 확신할 수 없소. 그저 갓 즉위한 황제가 본인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성과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악마에게 바칠 제물이 필요한 것인지 모르겠소.”

이 부분은 이안도 알지 못한다.

게임에서는 황제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끝끝내 알려주지 않는다.

황제에게 승리해도 황제는 입을 열지 않고, 패배하면 게임오버가 뜰 뿐이다.

‘어쩌면 로드릭의 말처럼 악마의 제물을 모으려는 걸 수도 있겠군.’

로드릭의 말에 참석자들은 웅성거렸다.

교단 측 인물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할 작정이오?”

로드릭이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에게 전쟁을 선포할 것이오. 이쪽에는 교단과 이안님이 있소. 적이 악마와 결탁했다는 걸 생각하면, 명분은 우리에게 있소.”

텔 왕국의 외교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길 수 있겠소?”

이번에도 로드릭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명분이 우리 쪽에 있는 만큼, 중립적인 세력들도 전부 우리 쪽에 가담할 것이오. 승산은 충분하다고 보오.”

로드릭은 입을 다물고 사람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참석자들은 빠르게 계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번 전쟁은 아주 큰 싸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그들이 가진 모든 걸 잃어버릴 수도 있다.

아무리 승산이 높다 하나 그들에게는 좀 더 확신할 만한 게 필요했다.

‘이쪽에 좀 더 확실한 카드가 있다면 고민 없이 고를 터인데.’

‘황제를 배신하는 건 여전히 부담이 크다. 명분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순간.

회의장의 문이 열리고 차려입은 레아가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레아가 차분히 걸어들어온 그 순간.

참석자들은 계산하기를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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