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합류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대륙의 정세도 점점 급박하게 치달을 때쯤.
어느덧 하늘에 짙게 깔린 구름은 첫눈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플로라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벌써 첫눈이 내리네. 작년보다 최소 2주는 빠른 것 같은데.”
“대륙이 추워지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응.”
“이번 겨울도 엄청 춥겠네.”
“……근데 왜 다 저한테 붙어 있는 거죠?”
플로라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자기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동료들을 보았다.
이안이 간단히 답했다.
“왜긴. 네 주위가 따뜻해서 그렇지.”
“숲의 종족은 추위에 취약하다. 우리는 동료지 않나? 동료끼리는 서로 돕는 법이다.”
“……플로라. 따뜻해.”
“사람을 난로 취급하지 말라고요!”
분통을 터트리는 플로라에게 동료들이 동시에 말했다.
“역시 플로라밖에 없어.”
“평소에도 이렇게 뜨겁다니. 그만큼 마법적 경지가 높다는 것이겠지. 훌륭하다.”
“……플로라. 대단해.”
동료들을 쏘아붙이려던 플로라는 살짝 붉어진 얼굴을 휙 돌리며 말했다.
“흥. 벌벌 떠는 것도 안쓰러우니, 이번 한 번만 봐 드릴게요. 이번 한 번만이에요?”
‘역시 쉽군.’
이제 플로라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완벽하게 터득한 동료들이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플로라가 툴툴거렸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그들은 지하 미로의 입구 앞에 서 있었다.
흑기사와의 싸움이 끝난 뒤.
마법사들은 테이오스가 지하미로의 최심층에 있는 ‘지옥의 입구’를 건드렸다는 걸 알아냈다.
단기간에 미로에서 엄청나게 많은 괴수들이 쏟아져 나온 건 그 때문.
그에 대한 반동인지 최근에는 지옥의 입구에서 튀어나오는 괴수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하지만 지하 미로를 언제까지고 불안한 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법이다.
마법사들이 파견되어 테이오스가 설치한 술식과 의식의 흔적을 지우고, 미로를 정상화한 게 바로 얼마 전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용병들의 미로 입장이 재개될 예정이었다.
그런 기념적인 날을 축하하며 영주는 이안을 이 자리에 초청한 것이다.
‘딱히 할 일도 없었으니 상관없지만.’
그의 뒤에는 용병들이 하나같이 흥분한 얼굴로 서 있었다.
한동안 미로에 못 들어가 벌이가 시원찮던 참이다.
그들은 미로에 들어가 한 몫 벌 생각에 잔뜩 들 떠 있었다.
그렇게 주위 기온과 어울리지 않게 사람들이 뿜는 열기가 넘치는 이곳에서 기다리길 한참.
마침내 안에 들어갔던 마법사들이 돌아왔다.
나이가 지긋한 마법사가 말했다.
“지옥의 입구는 원래대로 되돌렸습니다. 저희가 올라오는 데에 이틀 정도 걸렸으니, 이제 들어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고했소. 이만 들어가 쉬시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영주가 이안에게 말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린 듯합니다.”
“네. 잘됐네요.”
“다시 일터를 되찾은 용병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지요.”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요즘 들어 영주는 툭하면 이안에게 연설을 요구하고는 했다.
귀찮았지만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기사를 상대할 때 영주의 도움이 컸던 것도 사실이니.
이안은 고개를 돌렸다.
용병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안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험상궂은 사내들이 눈만 반짝이니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어. 음. 다들 안전하게, 열심히, 싸워서 돈 많이 벌길 바랍니다.”
“와아아아!”
“영웅께서 우리를 가호했다!”
“들어가자 자식들아!”
이안이 건성으로 뱉은 말에 우레처럼 함성을 내지른 용병들이 앞다투어 미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 쌓여 있던 눈송이가 뿌옇게 흩날렸다.
플로라가 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며 툴툴댔다.
“이안. 이제 돌아가도 돼?”
“그래.”
“별것도 아닌 일인데 다음부터는 그냥 아랫사람 시켜. 부탁한다고 다 들어주지 말고.”
플로라가 영주를 노려보며 대놓고 말했다.
“하하. 그, 그럼 저는 이만 일이 바쁘니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애써 모른 척한 영주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 뒷모습을 부루퉁하게 쳐다본 플로라가 말했다.
“자. 빨리 들어가자. 감기 걸릴라.”
“나 이제 감기 같은 거 안 걸려.”
“……그럼 너 혼자 계속 서 있던가.”
플로라가 새침하게 말하고 멀어지자, 이안과 동료들도 그 뒤를 따랐다.
그때.
스텔이 자리에 멈춰 이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응? 왜 그래?”
스텔은 거리의 인파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사람들은 때아닌 첫눈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스텔이 무엇 때문에 멈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왜.”
“……다쳤어.”
“응?”
그제야 이안은 사람들 사이에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 하나가 비틀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로브는 군데군데 찢어지고 피가 묻어 있는 게 한눈에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안이 감탄한 건 다른 부분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보다 빨리 발견해냈다고?’
이안이 내준 과제를 스텔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다.
그런 스텔이 기특했던 이안은 스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준 뒤, 앞으로 나섰다.
앞서가던 플로라가 이안을 보며 물었다.
“혼자 어디 가는 거야.”
“아니. 저기 아파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플로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혼자 다니지 말라고 저번에 말했잖아. 이제 네 위치를 생각하라고. 언제 암살자라도 올 줄 어떻게 알아.”
플로라는 요즘 부쩍 잔소리가 늘었다.
게다가 하는 말도 하나같이 옳은 소리뿐이었다.
멋쩍게 웃은 이안이 말했다.
“음. 딱히 암살자가 와도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저번처럼 또 다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일단 조심할게.”
플로라를 안심시킨 이안은 인파 속으로 나아갔다.
이안을 알아보고 우르르 다가오는 사람들을 제지한 이안은 비틀거리는 행인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괜찮아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우리 쪽에 사제가 있으니 괜찮다면 치료받고 가요.”
“아…….”
행인이 고개를 들었다. 이안과 행인의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한 빛깔의 황금색 눈동자.
그 눈동자에 안도감이 서렸다.
“……레아 님?”
긴장을 놓았는지, 레아는 그대로 이안의 품에 허물어져 기절해버렸다.
***
“저하의 상태는 어때? 괜찮으셔?”
플로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국의 황녀가 이곳저곳에 부상을 입고 혼자서 이곳까지 오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일단 스텔이 부상은 다 치료했어. 다만 몇 주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한 모양이야.”
“저하께서 어쩌다가…….”
플로라가 안타깝게 중얼거리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레아가 겪었을 상황을 생각하니 밥도 잘 안 넘어가는 듯했다.
스텔과 우마딜로는 황녀고 뭐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결국, 식사자리에서는 이안과 플로라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안이 설명했다.
“얼마 전에 레아 님이 황궁을 탈출하셨던 얘기를 들었어. 아마 황제랑 둘이 무슨 일이 있었겠지. 그 탈출 과정에서 분명 추격대가 붙었을 거고.”
“그러다 혼자서 이 멀리까지 도망쳐 온 거야? 세상에…….”
“아무래도 나 때문에 이곳에 온 거겠지.”
황녀에게 미리 바람을 넣어둔 건 바로 이안이다.
이맘때쯤 탈출해서 이안에게 합류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런 상태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황제는 그래도 동생을 아끼는 것 아니었나? 레아의 몸에 남은 몇몇 상처는 조금만 깊었으면 곧바로 목숨이 위험해지는 급소였어. 완전히 죽일 생각으로 추격대를 보냈다는 건데…….’
만약 레아가 목숨을 잃었다면, 황제에 맞설 구심점 하나가 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안의 계획도 크게 어그러졌을 터.
상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너무 운에 의지한 건가? 차라리 저번에 만났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했다면…….’
의미 없는 가정들을 떠올리던 그때.
레아의 방에서 미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안과 플로라가 동시에 벌떡 일어나 레아의 방으로 향했다.
“아 이안. 그리고 플로라.”
핼쑥해진 레아가 미소를 지으며 둘을 맞이했다.
플로라가 레아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와다다 말을 쏟아냈다.
“저하.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데 없고요? 필요한 거 없으세요? 말만 하세요!”
레아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플로라. 조금 바뀌었네요?”
“네? 아, 죄, 죄송해요. 좀 무례했나요?”
그제야 부끄러워진 플로라가 황급히 손을 놓았다.
하지만 레아는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듯한 느낌이라서요.”
“그, 그런가요?”
“어쨌든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요. 사실, 여러분들을 다시 못 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레아의 눈은 차분하고 깊었다.
목숨의 위기를 해쳐나온 전사 특유의 눈빛이었다.
황궁에서 봤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에 이안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들려주시겠어요?”
“네. 그 전에…….”
레아가 말을 흐리자 눈치챈 이안이 얼른 말했다.
“시장하시죠? 죽이라도 가져올게요.”
“가, 감사합니다.”
아까부터 꼬르륵 소리가 들리던 참이다.
이안은 주방장에게 부탁해 하얀 죽이 담긴 그릇을 가져왔다.
잠시 눈치를 살피던 레아는 게 눈 감추듯 죽을 비웠다.
다행히 음식이 입에 잘 맞는 것 같았다.
아니면 단순히 배가 너무 고팠거나.
“흠흠. 맛이 훌륭하네요.”
뒤늦게 품위도 신경 쓰지 않고 허겁지겁 먹은 게 민망해진 레아가 한차례 헛기침을 했다.
함께 쓴웃음을 지은 이안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시선을 아래로 내린 레아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황제와 논쟁을 벌인 일.
그날 밤 중에 암살자가 찾아온 일.
그리고 그 이후에 있었던 추격전까지.
“제국의 추격대가 저를 쫓았어요. 암살자, 마법사, 기사로 이뤄진 정예들이었죠. 저라고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어요. 저를 돕기 위해 따라온 이들이 열 명이 넘었죠.”
하지만 지금 그녀는 혼자다.
추격을 뿌리치는 와중에 모두 당했거나, 흩어졌다는 뜻이다.
레아는 비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피에람으로 곧바로 향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계가 너무 삼엄해 그쪽 활로를 뚫기 쉽지 않더군요.”
“그래서 아이벤으로 왔군요. 저를 찾아서.”
“예. 거리가 좀 멀었지만 제게는 선택권이 없었죠. 도주 경로가 길어지면서 우리는 모두 지쳤고, 추격대는 끈질기게 쫓았습니다.”
여러 위기가 있었다.
불과 아이벤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도 습격이 있었으니, 추격대가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위기 속에서 그녀는 부상을 입었고, 따르던 이들을 모두 잃었다.
그리고 그녀는 강해졌다.
“아무래도 폐하께서는…… 저를 더는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은 듯하더군요.”
설마 황제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몰랐던 그녀는 배신감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결단을 내리려면 레아가 분노에 떠는 지금이 적기였다.
“저는 악마를 토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대륙의 모두가 죽을 겁니다.”
레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표정은 차분했다.
마치 이안이 무엇을 물어볼지 이미 아는 것 같았다.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걸 위해서는 황제를 꺾어야 합니다. 황제는 악마를 추종하는 세력과 결탁해 있으니까요.”
레아와 이안이 눈을 맞췄다.
이안은 레아의 눈동자 속 분노를 읽었다.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 레아 님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니…… 저희와 함께 해주시겠습니까?”
유일한 혈육인 황제에게 칼을 겨눌 수 있냐는 물음.
예전의 레아였다면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레아는 고민하지 않았다.
황제가 혈육의 정을 과감히 잘라냈듯. 레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굳은 의지를 담아 말했다.
“예. 필요하다면 황제를. 오라버니를 제 손으로 직접 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