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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02화 (203/222)

202. 전쟁(2)

갈라진 창이 후두둑 바닥에 떨어졌다.

긱스는 얼빠진 얼굴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다.

그저, 무기만 깔끔히 베였을 뿐이다. 거짓말처럼.

‘어떻게?’

긱스의 단창은 나름 고가의 무기였다.

긱스는 그런 단창이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절단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대부분의 다른 구경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순간적으로 검광을 피워올려 정확히 단창 만을 베는 걸 눈으로 본 이는, 이곳에서 한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스콜드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정밀한 일격이었다. 대체 저런 경지에 들려면…….’

감탄하던 스콜드는 이내 한 가지 의아함을 느꼈다.

‘근데 왜 굳이 창을 벤 거지? 목을 베는 쪽이 더 쉽고 빨랐을 텐데. 설마…….’

이안은 긱스에게 말했다.

“무기를 다시 가져오세요. 이대로 끝나면 많이 아쉬울 것 아닙니까?”

“…….”

긱스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지금 이렇게 끝이 난다면 단 일 합 만에 상대에게 패했다는 비웃음과 함께, 여태 쌓아놓은 명예가 전부 무너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안은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이다.

오직 긱스를 위해.

그것도 모자라 이안은 긱스에게 제안했다.

“먼저 공격할 기회를 줄 테니, 경이 가진 가장 강력한 한 수로 부딪혀 오세요. 후회가 남지 않게요.”

“……고맙소.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 긱스는 다시 자세를 잡고 호흡을 골랐다.

그러곤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창이라는 무기에 충실한 찌르기 공격.

하지만 특유의 현란한 스텝과 어우러지며, 그 타격 지점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대단히 독특한 스텝이네요. 아마도 저 기사의 가문에 내려오는 비전이겠죠.]

‘예.’

그 일격을 끝까지 눈에 담은 이안은 창끝이 가슴에 닿기 전.

그제야 검을 들어 창대를 순식간에 베어냈다.

긱스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자신하던 공격을 이렇게 쉽게 쳐낼 줄 몰랐던 것이다.

또다시 두 동강이 난 창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긱스에게 이안이 말했다.

“훌륭한 기술이었어요. 완성도도 흠잡을 데가 없고요. 단지 제 눈이 좋아 막아낸 것뿐이니, 상심하지 마세요.”

조롱이나 의례적으로 건네는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이안이 인정함으로써 긱스는 단 한 합 만에 쓰러진 기사가 아닌, 훌륭한 기술을 가진 기사가 되었다.

그의 명예가 지켜진 것이다.

“더 하시겠어요?”

“아닙니다.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한 수 배웠습니다.”

긱스는 너무 고마워 어찌할 줄 모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긱스에게 눈총을 보내거나 야유하지 않았다.

결투에 임한 기사를 죽이지 않고, 그 명예를 지켜준 데다가 조언까지 해줬다.

이 쉽게 볼 수 없는 자비로운 모습에 지켜보던 아군이고 적군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이는 이안의 노림수였다.

‘기왕이면 살려두는 게 좋겠죠. 전쟁이 끝나도 제 말을 따르게 하려면 미리 좋은 모습을 보이는 게 중요하고요.’

일부러 명예와 자비를 보여 적을 감동시킨다.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것이다.

감동한 상대가 마음을 바꿔 이안쪽으로 합류 하리라고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모든 건 전쟁 끝난 이후를 위해서다.

게다가 이런 미덕 하나하나가 쌓여 중립 세력의 참여를 이끌어낼 것이다.

‘그리고 이런 특이한 기술들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죠.’

대륙 전체가 참여하는 전쟁이다.

그만큼 여러 지역 출신 강자들이 참전하고, 그들이 선보이는 특별하고 기상천외한 절기들을 볼 수 있다.

이안은 그런 기술들을 눈으로 관찰하고 분석해 자신의 검에 더할 생각이었다.

‘당장 조금 전의 기사만 해도 발걸음과 더불어 긴 창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몸의 중심을 움직이는 게 예술이었어요. 그런 기술을 보지도 못하고 대뜸 단칼에 죽여버리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좋은 생각이에요 이안. 자비를 보이면서 자기 기술도 갈고닦을 수 있다니. 분명 좋은 소문이 퍼질 거예요. 그리고 그 소문들은 분명 큰 힘이 되어 되돌아오겠죠.]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외쳤다.

“다음 나오세요.”

그러자 앞선 결투를 보고 피가 끓은 기사들이 앞다투어 튀어나오려 했다.

그들은 이내 순서를 정한 뒤, 차례로 이안에게 결투를 청했다.

하나 같이 뛰어난 실력이었지만 이안이 위협을 느낄 상대는 없었다.

이안은 그들이 가진 기술을 눈으로 보고 분석했고, 결투가 끝나면 그들을 살려 보냈다.

생전 본 적 없는 기이한 형태의 결투였다.

아니. 이건 결투라기보단 마치 기사들이 이안에게 가르침을 얻은 모습에 더 가까웠다.

이 싸움에 걸린 걸 생각하지 않았다면 스콜드 흐뭇하게 결투를 관람했을 거다.

‘야단났군.’

그는 지금 기분이 좋으면서도 불안했다.

기사들 간의 화합. 실력자들의 부딪힘. 명예로운 결투.

모두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기사임과 동시에 이곳의 지휘관이다.

그에게는 전쟁에서 승리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싸움 한번 못하고 꼼짝없이 이곳을 내줘야 하게 생겼다.

‘죽이기는커녕 상처 하나 입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실력 차이가 난다는 거겠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약속을 깨야 한다.

마법사와 신관들에게 일러 이안을 집중 공격해야 한다.

물론 적들도 이곳에 몰려 있는 만큼 난전이 벌어질 거다.

하지만 이대로 결투를 계속하는 것보다는 승산이 높았다.

마침 결투에 임했던 기사들도 멀쩡하지 않은가?

스콜드는 곧장 손을 들어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선뜻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

그는 지휘관이다.

하지만 지휘관이기 전에 기사다.

비겁하게 약속을 배신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저렇게 싸우는 이안을 보니 피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나갔던 기사가 항복하자 스콜드는 힘껏 뛰어 이안 앞에 내려섰다.

그는 망토를 벗어 던진 뒤 무기를 뽑았다.

지극히 평범한 생김새의 롱소드 두 자루였다.

스콜드는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우선 내 못난 부하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가르침을 주어서 고맙다.”

“아뇨. 저한테도 도움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안의 진심 어린 말에 스콜드의 미소가 진해졌다.

“갑자기 기억이 나는군. 코르디스에서 악마를 막아낸 검사가 있었다는 걸. 또 교단에서 소문을 부풀린다 생각했는데, 오히려 소문이 현실만 못하군.”

이안도 성검을 쥐고 적당히 대답했다.

“과찬입니다.”

“하지만 이번 싸움은 아까 것들처럼 간단하지는 않을 거다. 너랑 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피를 봐야 할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어.”

그렇게 말하는 스콜드의 눈빛이 사납다.

숱한 위기와 싸움을 거쳐온 기사의 눈빛에 이안도 자세를 잡았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에는 피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스콜드는 강하니까.

탓!

이안은 어떤 동작의 전조도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앞으로 창처럼 뻗어지는 성검.

동시에 어지럽게 펼쳐지는 스텝.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은 이안의 이 공격이 어떤 것인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긱스 경의 기술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탄생시켰다. 그것도 이 단기간 만에.’

혀를 찬 스콜드는 도리어 앞으로 돌진했다.

타격점을 알기 어렵기에, 막으려 하다가는 크게 낭패할 수도 있었다.

가슴 앞에 십자로 교차한 스콜드의 두 검에서 상아색 검광이 피어올랐다.

흐릿한 색이다. 아직 숙달되지 않았다는 뜻일 터.

하지만 그럼에도 검광은 검광이다.

이안 역시 성검에 새하얀 검광을 덧씌웠다.

둘의 검이 맞붙기 직전.

돌연, 스콜드의 두 검이 어지러운 궤적을 그리며 이안의 양 옆구리를 찔러 왔다.

그도 아는 것이다.

서로 검을 맞부딪히면 자신이 불리하다는 걸.

‘생긴 건 사잔데, 여우처럼 싸우는구나.’

이안은 한쪽 발을 땅에 짚고 빠르게 돌았다.

회전한 검날이 찔러오는 두 검을 차례로 쳐냈다.

깔끔한 방어에 순간적으로 당황한 스콜드지만 공격을 멈추지는 않았다.

쉼 없이 이어지는 쌍검술은 대단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경험과 재능. 그리고 가문의 검술.

이 세 박자가 합쳐져 스콜드를 무적의 검사로 만들어주었다.

평범한 이였다면 어지럽게 펼쳐지는 쌍검의 궤적에서 길을 잃고, 그 목을 내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안은 쌍검의 궤적을 모두 읽었고, 정확한 대응을 하는 와중에 상대를 관찰했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도 아니에요. 엄청 실전적이고 군더더기가 강해요. 뭐랄까. 기사보다는 용병의 검을 보는 느낌이네요. 게다가 아직 한 수를 숨겨 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이안의 시선에서 자신의 검을 분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까?

스콜드는 분노했다. 한 명의 검사로서 이안의 저 여유를 깨부숴주고 싶었다.

“으아아악!”

짐승 같은 포효와 함께 스콜드가 몸을 던졌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아니.

온몸을 주더라도 어떻게든 피해를 주겠다는 동귀어진의 수.

‘뭐지? 갑자기 미친 건가?’

승부를 보기에는 한박자 빠른 타이밍이었다.

갑작스럽게 이럴 줄은 예상 못 했던 이안은 땅을 박차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안의 몸이 떠오른 그때.

스콜드가 검을 쥔 뒤 그대로 이안을 향해 던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경악했다.

검을 버리는 기사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안이 놀란 건 다른 부분이었다.

‘던진 검에 검광이 서려 있다!’

손에서 검을 떼었는데도 검광이 흩어지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했는지 놀라움 밖에 느껴지지 않는 기술!

‘일부러 몸을 던지는 척하면서 내가 뛰어오르는 걸 유도하고, 바로 투검인가?’

스콜드의 손에서 이어진 빛줄기가 긴 꼬리를 달고 이안의 급소를 향했다.

공중에 떠오른 동안 피할 길은 없다.

남은 건 오직 막아내는 것뿐.

이안은 검광을 최대한 두껍게 한 뒤,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발휘해 날아오는 검을 쳐냈다.

카강!

검은 의외로 쉽사리 튕겨 나갔다.

검광이 적게 서려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안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더 있구나.’

앞서서 날아오는 검은 눈속임.

은은하게 빛나는 검광의 뒤에 숨겨 있던 또 다른 검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과연 필살의 일격이라 할 만하다.

검을 내리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안은 팔을 뻗어 그대로 날아오는 검을 맨손으로 잡아냈다.

‘끄윽.’

형형한 검광에 이안의 단단한 피부가 베였다.

피가 튀었다.

검의 전진을 막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속도를 늦출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번 짧은 시간의 틈 동안 이안은 성검을 아래로 내렸다.

캉!

날아오던 검이 맹렬하던 그 기세를 잃었다.

검을 내린 이안은 땅에 착지한 뒤. 스콜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양 검을 모두 잃고, 허망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 검광을 맨손으로 잡는 사람이 있다니…….”

“감탄했습니다. 손에서 벗어난 검에 검광이 계속 유지되다니. 상상도 못 한 기술이었습니다.”

“내 선조는 원래 용병이었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검을 던지는 것 정도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지. 뭐. 결국 소용 없었던 것 같지만.”

“아뇨. 이번에는 진짜 섬뜩했어요.”

이안은 손을 펼쳐 뼈가 훤히 드러난 상처를 보여주었다.

스콜드의 한 수를 어느 정도 경계했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 피해에 그쳤다.

‘역시 강자들이 많구나.’

이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에 스콜드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약속은 지키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군대를 그냥 물린다면, 나는 군법에 의해 처형될 거다. 그럴 바에 결투 중에 명예롭게 전사한 것이 낫겠지. 마무리를 부탁한다.”

이안은 설득할까 하다 이내 검을 다시 들었다.

스콜드는 이미 마음을 굳혔고, 그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이안을 보며 스콜드가 중얼거렸다.

“남의 기술을 따라 사용하던데, 부디 우리 가문의 것도 잘 사용해주면 좋겠군.”

“언젠가 기회가 되면요.”

스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어 말했다.

“그나저나 놀라울 정도의 강함이다. 나와 같은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하하. 한번 죽다 살아오지 않으면 그런 강함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건가?”

이안은 코르디스에서 악마를 토벌하고 난 후. ‘공식적으로’는 한번 죽었다 살아났던 셈이다.

스콜드가 농담처럼 건넨 말은 바로 그 얘기였다.

이안 역시 쓴웃음을 지었고, 이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후.

적들은 약속을 지켰다.

그들은 군대를 돌렸다. 아군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배웅했다.

그리고 이안이 홀로 황제의 군대를 물리친 얘기는 온 대륙에 퍼져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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