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전쟁(3)
황제의 군사들은 다급하게 외쳤다.
“밀리지 마! 막아야 한다!”
“주, 중앙이 뚫렸습니다!”
“놈이! 놈이 온다!”
“나, 나한테 오잖아! 나를 지켜라! 어서!”
뚱뚱한 지휘관은 허겁지겁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의 부관들은 멍한 얼굴로 그런 지휘관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표정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당연히 지휘관에게도 뾰족한 방법은 없었다.
그저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칠 뿐이었다.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하다못해 시간이라도 벌라고! 그나저나 내 말을 가져오라고 한 지 언젠데 아직 안 온 거야! 당장 여길 벗어나야…….”
“이걸 말하는 거야?”
“응?”
지휘관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안은 말의 고삐를 붙잡고 물었다.
“그러면 안 되지.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지휘관이라는 사람이 혼자 살자고 도망쳐서야 쓰겠어?”
“네놈. 네놈이 이안이구나……!”
“그리고 그쪽이 이곳 지휘관인 어니스트 백작이겠네.”
이안은 고삐를 쥐고 있던 말의 엉덩이를 툭 때렸다.
놀란 말이 한차례 울부짖더니, 저 멀리 튀어나갔다.
백작이 도망칠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백작의 눈에는 희미한 물기마저 어렸다.
그는 망연자실하며 말했다.
“대비는 충분했을 터인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마법사들과 기사들은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러게 처음부터 결투를 받아들였으면 서로 좋았잖아.”
“이이익! 너 같으면 받아들이겠나!”
백작이 버럭 소리쳤다.
한 달 전.
이안이 스콜드와 결투를 벌여 군대를 뒤로 물러나게 한 건 이미 온 대륙에 퍼진 이야기다.
사람들은 그 놀라운 영웅담에 환호했다. 심지어 제국 측 병사와 기사들마저 그 이야기를 즐겨 할 정도.
하지만 군대를 이끄는 지휘부로서는 절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참사였다.
의외로 황제는 이안과 결투에 임했던 기사들과 스콜드를 너그럽게 용서했지만, 그 자비심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하여. 이안과 맞서는 지휘관들은 절대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명예도 없는 겁쟁이라고 적군과 아군 모두에게 욕을 얻어먹었지만 고집스럽게 모른 척했다.
그러자 이안은 전략을 바꿨다.
싸움 중에 홀로 군대를 뚫고 들어와 지휘관급 인물들을 암살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휘관들은 기사나 마법사 등의 고급 전력을 자기 주위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마저도 잘 먹히지는 않았다.
검을 뽑아 든 이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모르니 일단 물어는 볼게. 이대로 항복하고 투항할 생각 있어? 그러면 당연히 살려주고, 포로로 잡혀도 손님으로서 대접해줄게.”
큰 기대는 없었다.
지금껏 제국의 지휘관 중에 항복한 이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눈앞의 이 얼간이 같은 백작도 마찬가지였다.
“하! 나는 제국의 귀족이다! 목숨을 구걸하라는 건가? 차라리 날 죽여라!”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검이 번뜩였고, 지휘관의 몸이 허물어졌다.
이안은 찝찝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나머지 간부들이 항복해줄까도 싶었지만, 상관의 죽음에 그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이내 간부들이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허물어졌다.
‘그냥 살려달라고 하지. 명예가 뭐라고…….’
[그들은 끝까지 자기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에요. 이안.]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이내 힘을 줘 외쳤다.
“아레스트 백작은 쓰러졌다! 모두 검을 내려놓고 투항하라! 부디 목숨을 귀하게 여겨라! 고향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라!”
이안의 외침은 혼란한 전장에서도 선명하게 퍼져나갔다.
황제의 병사들은 당황했다.
지휘관이 벌써 쓰러지다니.
머리를 잃은 군대는 금방 와해하는 법이다.
그들의 패배가 확실해졌다.
여기서 더 싸웠다가는 개죽음에 불과했다.
그 점을 눈치챈 몇몇 병사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달아났다.
대부분은 황제에게 고용된 용병들이었다.
남은 병사들의 약 절반 정도는 이지를 잃고 싸움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웠다.
이안 덕에 사기가 바짝 올라 있던 아군은 머지않아 적을 모두 분쇄해 버렸다.
‘이번에도 끝났네.’
한차례 함성과 함께 승리를 자축하던 병사들은 이내 부지런히 움직였다.
투항한 포로를 밧줄로 묶었고, 아군의 시신을 수습했다. 몇몇은 적군의 시체를 뒤져 귀중품을 털기도 했다.
이안은 그런 병사들을 지나쳐 후방으로 향했다.
이쪽의 지휘관들과 밝은 얼굴로 이안을 맞았다.
“고생했습니다! 이번에도 이안 님 덕분에 손쉽게 승리했습니다!”
“뭐. 사실상 미끼 부대인데요 뭘.”
이안이 지휘관을 암살하고 다니자, 저들은 군대를 여러 개로 나눠 전장을 넓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이안이 강해도 그 몸이 하나인 이상 한계는 있는 법.
황제는 이안이 있는 쪽에 미끼를 던지고 그사이에 다른 곳에서 승리를 거두는 식으로 싸우고 있었다.
반대로 아군은 이안 쪽으로 병력을 최대한 집중해 황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황도를 치면 적들도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계산이었다.
‘황도까지는 이대로 이틀 거리인가. 너무 순조롭군.’
이곳까지 오는 데에 걸린 시간은 불과 한 달 남짓.
그간 이안이 속한 부대는 연전연승을 거듭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승리는 전적으로 이안 덕이었다.
홀로 지휘관을 베고, 요새의 성벽을 넘어 안쪽에서 성문을 박살 내곤 했으니.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진격이 빠른 건 예상외였다.
‘황제가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어. 뭔가 함정이라도 꾸미는 건가?’
진짜 골칫거리인 황제의 측근들과 악마 숭배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하급 간부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너무 쉬워요. 아무리 이안 님이 강하다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을까요?”
“멍청아. 초 치지마. 애초에 너라면 이안 님을 어떻게 막아낼 건데.”
“그, 그건 그렇지만.”
이번에 상대했던 백작이 무능한 건 절대 아니었다.
그는 지형을 제대로 살필 줄 알았고, 병력을 세심히 배치했다.
오직 이안 한 명을 막기 위해서.
하지만 이안은 우마딜로의 도움을 받아 하늘 높이 날아올라 대부분의 병력을 뛰어넘어 지휘관의 근처에 떨어져 내렸다.
그런 이안을 저지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흑기사를 다른 왕국이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아무리 뛰어난 지휘관이라도 무력이 이렇게 차이가 나면 별도리가 없겠죠. 그래서 황제가 나서지 않을까 했는데…….]
‘황제는 황도를 나서지 않을 거예요. 뭐. 일단 황도까지는 무난하게 가겠네요.’
이안은 적당히 간부들을 격려한 뒤 걸음을 옮겼다.
싸움을 마친 동료들이 솥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중 플로라가 가장 먼저 이안을 알아챘다.
“이안! 어서 와! 레아 님이 따뜻한 수프를 요리해 놨어!”
레아가 슬쩍 옆으로 이동해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플로라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적당히 했지?”
“응. 그냥 불꽃으로 겁만 주었어. 답답하기는 했지만…….”
이안은 플로라에게 되도록 싸움에 깊게 관여하지 못하게 했다.
분명 플로라의 이런 전장에서 엄청난 효용을 보일 거다.
하지만 이안이 신경 쓰는 건 플로라의 마음이었다.
“잘했어. 우리 진짜 적은 사람이 아닌 악마니까. 앞으로도 꼭 중요한 때가 아니면 넌 나서지 마.”
“알았어. 이안 말대로 할 게.”
손짓 한 번에 병사 천명을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플로라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플로라의 정신에도 어두운 감정이 스며들 터.
이안은 다시 플로라의 불꽃이 검은빛을 띠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지휘관만 베도, 플로라가 나설 일은 없으니까.’
이안이 자리에 앉자 레아가 따뜻한 수프가 든 그릇을 내밀었다.
스콜드와의 결투 이후 한 달이 지났지만, 주위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다 못해 추울 지경이었다.
“고생했어요 이안.”
“감사합니다.”
이안은 고맙게 그릇을 받아들였다.
‘맛있네.’
의외로 레아에게는 요리에 대한 재주가 있었다.
동료들은 따뜻한 수프에 입김을 불어가며 열심히 퍼먹었다.
먼저 식사를 마친 플로라가 가볍게 말했다.
“이제 좀만 더 가면 황도라는데, 어쩌면 전쟁이 일찍 끝날 수도 있겠다. 그렇지?”
“그래야지. 내가 그렇게 할 거야.”
이안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플로라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의도는 따로 있는 모양이다.
“근데…… 레아 님은 표정이 별로 안 좋네요? 어디 아프신가요?”
플로라가 슬며시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쓴웃음을 지은 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픈 건 아니고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마음에 걸리는 것? 아. 황제와의 일 때문에…….”
“그렇지 않다.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죠.”
레아는 씁쓸한 얼굴로 하늘을 보았다.
곧 황도다.
황제. 오테르. 기사단장. 그 외 긴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에게 검을 겨눠야 했다.
하지만 도망칠 수는 없다. 아니. 도망쳐서는 안 된다.
황제의 과오는 레아가 바로잡아야 한다.
그게 황족의 의무니까.
툭. 투둑.
레아의 얼굴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날이 추워 거의 눈에 가까운, 그런 비였다.
***
“폐하! 적이 황도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그 영웅이라는 놈을 막아야 합니다!”
“이곳은 제국의 심장! 다른 곳으로 향한 군대를 당장 돌려야 합니다!”
“하, 하지만 우리 군대는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습니다. 그 병력을 불러모은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크게 줄어들 겁니다. 성벽 뒤에서 수성한다면 능히 10년은…….”
“지금 그게 문제요! 폐하께서 위험하지 않소!”
장군들은 서로를 향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황제는 턱을 괴고 앉아 무감정하게 쳐다보았다.
마치 자기 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런 황제의 낌새를 눈치챈 장군들이 슬며시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걱정이 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이대로 가다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되물었다.
“위험? 황도가 함락당하기라도 할 거란 얘기요?”
“……다른 건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안이라는 자의 소문이 절반만 진실이라고 해도 위험합니다.”
황제는 장군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은 무섭게 명성을 떨치는 이안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지휘관들만 골라 살해한다니, 겁을 잔뜩 집어먹었군.’
황제는 비웃는 듯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자는 내 손으로 직접 죽일 것이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하, 하지만 황도가 위기에…….”
“제국의 긴 역사 동안 황도 앞에 적이 다다른 게 이번이 처음인 줄 아시오? 그대들은 쓸데없는 생각 말고, 전쟁에서 승리할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으시오.”
그렇게 말한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테이오스와 오테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둘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처럼.
황제는 오테르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황도의 백성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 주시오. 후방의 도시들로 나눠 보낸다면 적들도 쫓지 않을 것이오.”
“폐하! 설마…….”
“나는 여기 처박혀서 지루하게 공성전을 벌일 생각 따윈 없소. 내가 이안을 그자를 죽이든. 그자가 내 목을 베든. 깔끔하게 끝이 나겠지.”
“하지만!”
황제는 오테르의 말을 끊고 이번에는 테이오스에게 말했다.
“전에 내가 말했던 건 어떻게 되었소?”
테이오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대륙에 존재하는 악마 숭배 집단 대부분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전했습니다. 악마라도 소환할 수 있을 만한 전력입니다.”
“좋소. 그들을 전부 이곳에 모으시오.”
“폐하!”
오테르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오테르 공. 이번만큼은 아무 말 없이 내 말에 따라주시오. 이런 식으로 부탁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오.”
“폐하…….”
오테르는 머뭇거리다 이내 고개를 숙인 뒤,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황제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는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하늘에서 무언가를 읽은 듯, 피식 웃은 황제가 중얼거렸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