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 전쟁(4)
성벽이 보인다.
높은 곳에 올라선 이안은 황도를 둘러싼 높은 성벽을 천천히 살폈다.
‘이놈의 비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네.’
비는 며칠째 그치지 않고 있었다.
거세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질척해진 땅이 추운 날씨와 함께 병사들을 괴롭혔다.
게다가 습기 때문에 건량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다.
적군이 아닌 배고픔과 전염병을 더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한 간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대로 비가 계속 온다면 후퇴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공성전을 준비했다가는 싸우기도 전에 모두 죽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간부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기다려 보세요. 비는 금방 그칠 겁니다.”
이안이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그 말. 며칠 전에도 하시지 않았나요?”
“그, 그렇죠. 하지만 이 시기의 대륙 중앙은 그렇게 비가 많이 내리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진짜로 비가 그칠 거예요.”
“날씨가 평소와 같다면 그렇겠죠.”
이미 초여름이 돼야 했을 시기에 아직도 이리 쌀쌀하다.
조금만 추워지면 눈이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평범한 상황을 가정하고 전략을 짰다가는 된통 당할 수도 있다.
이안의 말에 지휘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이안 님께서는 후퇴하는 게 맞다고 보십니까?”
이안이 그렇다고 하면 당장에라도 군사를 물릴 기세였다. 그만큼 지휘관은 이안을 신뢰하고 있었다.
고민하던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가 이쪽으로는 전문이 아닌지라. 하지만 선택지가 딱 두 개가 있다는 건 알겠네요. 후퇴하거나. 돌격하거나.”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데 이곳에서 계속 버티는 건 미련한 짓이다.
결국에는 선택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저 성벽에 그냥 돌격하는 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너무 무모해요.”
“그것도 맞긴 하죠.”
이곳에 모인 아군의 숫자는 약 1만.
이안이 연이은 승리를 거듭하며 다른 아군 부대와 합류하다 보니 어느새 이렇게 숫자가 불어났다.
‘왕국들이나 로드릭이 이끄는 군대는 고전하고 있다고 하던가.’
전쟁의 전체적인 판세는 호각.
이안이 이곳까지 뚫고 오면 대륙에 퍼진 황제의 병력들이 어쩔 수 없이 회군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깨고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는 황도의 시민들을 모조리 다른 곳으로 피신시키기까지 했다.
연이어서 펼치는 황제의 과감한 행보에 이쪽에서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아마 그걸 준비하는 모양이군.’
이안이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간부들은 계속해 논쟁을 벌였다.
후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반.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한다는 의견이 반이었다.
차마 저 성벽에 병력을 들이박자고 주장하는 이는 없었다.
“쯧. 정보가 좀 더 있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을.”
“안에 심어둔 세작에게서 어떤 소식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전부 당한 것 같습니다.”
“이것 참…….”
그렇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정찰을 맡은 병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전령! 황제가 전령을 보냈습니다!”
“뭐?”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병사의 말대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화려하게 꾸며진 마차를 끌고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차에는 황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휘관이 긴장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황제 쪽에서 제안을 건네려나 보군.”
“차라리 잘 됐습니다. 어쩌면 무언가 실마리가 될 수도 있겠어요.”
이안을 비롯한 간부들은 서둘러 걸어가 황제의 전령을 맞이했다.
전령이 마차 안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한 옷을 입은 귀족이었다.
전령은 주위를 살피더니 냅다 호통을 쳤다.
“뭣들 하는가! 나는 폐하의 말씀을 가지고 온 전령이다! 어서 고개를 조아려 예를 표하라!”
느닷없는 호통에 간부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마찬가지로 황당해진 이안이 실소를 터트렸다.
전쟁 중인 마당에 황제고 뭐고가 어딨겠는가.
‘아무래도 황제가 죽어도 상관없을 머저리를 보냈군요. 아니면 일부러 이쪽을 자극하려고 하거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전령이 구시렁거렸다.
“흠! 흠흠! 전령을 이렇게 대우하더니. 예절이라고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군.”
“시끄럽고. 빨리 황제가 한 말이나 전해.”
전령이 휙 고개를 돌려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래. 네가 이안이렸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 네게 직접 말씀을 전하라 이르셨다.”
“뭐. 나랑 결투라도 하재? 그러면 얼마든지 환영인데.”
“무엄하다! 폐하께서 전한 말을 끊지 말라!”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지르는 모습에 의외로 박력 있었다.
당장 칼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꼿꼿이 세운 저 자존심.
‘왜 황제가 이 사람을 보낸 건지 알 것도 같네.’
전령은 목을 가다듬고 어울리지 않게 청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 그리고 내게 칼끝을 들이민 배신자 놈들아. 거두절미하고 말하겠다. 지금이라도 머리를 용서를 구하고, 항복한다면 선처해주겠다.”
항복 권고.
어디까지나 의례적인 말이었다.
실제로 황제도 이쪽이 항복할 거라고는 티끌만큼도 생각지 않을 거고.
이안은 손을 저으며 말을 끊었다.
“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러니까 말을 끊지 말라니…… 휴. 계속하겠다.”
전령은 다시 목을 가다듬었다.
“기어코 나에게 검을 겨누겠다면, 찾아오라. 황도의 성문을 열어놓겠다. 나와 제국의 명예를 걸고, 이 이틀간 성문이 닫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용기가 있다면 오라. 하지만 도망친다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아라. 성문을 열어주어도 싸우지 않는 겁쟁이가 감히 나를 이길 수는 없을 테니.”
성문을 연다니.
처음에 간부들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한 간부가 무심코 되물었다.
“그, 그 말이 진짜요? 성문을 연다는 게.”
전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지금 폐하께서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폐하가 친히 내려주신 기회다. 감사하게 여기도록. 이상이다.”
그렇게 말한 전령은 허겁지겁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다시 성벽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이안은 그 모습을 배웅하며 겸사겸사 성벽 쪽을 살폈다.
그리고 이내 황제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성문이 열렸어요. 남쪽 성문만 열린 것인지는 확인해 봐야 하지만.”
“허…….”
놀란 간부들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의견을 나누었다.
“역시 함정이겠죠? 군대가 들어서면 곧장 공격을 퍼부을 겁니다.”
“함정인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성벽을 끼고 싸우는 게 황제에게는 더 안전한 것도 맞아.”
“그렇다면 왜…….”
“전쟁을 오래 끌고 싶지 않다는 거죠.”
이안이 입을 열자 시선이 집중되었다. 어깨를 으쓱인 이안이 이어 말했다.
“방금 말한 대로 함정인 건 맞아요. 하지만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 것도 맞죠. 솔직히. 투석기나 마법으로 저 성벽을 뚫어내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잖아요.”
“그렇다면 이안 님의 생각은…….”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고 봐요. 설령 함정이라도요.”
이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의논해보세요. 아직 내일까지 시간이 있으니. 저도 나름대로 고민해볼게요.”
“예…….”
이안은 알았다. 결국, 저들이 이안의 뜻을 따라 황도를 향해 진격할 거라는 걸.
하지만 달리 다른 수가 없었다.
‘당장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지금 하늘에서 내리는 비.
원래 원작에서 전쟁을 벌일 때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이렇게 날이 춥지도 않았고.
명백히 이상 현상이 계속 벌어지고 있다.
이 싸움을 되도록 빨리 끝내야 하는 건 자명했다.
***
이안은 돌아가서 동료들에게 황제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황도로 진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다소 갑작스러운 일인 만큼 동료들도 놀라워했다.
“……황제가 과감한 수를 던졌군요. 너무나 위험해 보이지만, 또 매력적으로 보이는 기회에요.”
레아의 말에 플로라는 턱에 손을 짚고 중얼거렸다.
“황도의 백성들을 모두 밖으로 피신시킨 것도 그렇고. 갑자기 성문을 연 것도 그렇고. 황제의 생각은 종잡을 수가 없네. 혹시 레아 님은 짐작 가시는 게 있으신가요?”
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긴 역사 동안 숱한 위기를 겪어왔어요. 악마의 군세가 몇 번이고 황도에 다다랐었지요. 자연히 도시도 그에 대비하게 설계되었어요. 아마 황제는 그 부분을 이용하는 것 같은데…….”
적을 막아내기 위해 긴 세월 보강을 해온 난공불락의 도시.
그게 바로 황도다.
하지만 레아조차도 황도가 어느 정도의 방어력을 보여줄지 잘 가늠이 안 되는 눈치였다.
제국이 위기에 빠진 건 수백 년 만이니까.
오직 황제와 이안.
이 둘만이 황도의 굳건함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황도 내에서 벌이는 시가전…… 게임에서도 끔찍했는데.’
솔직히 이안도 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가장 승률이 높은 건 바로 지금이었다.
간부들도 그렇게 판단한 듯, 이안에게 찾아와 내일 진군할 거라는 의사를 전해왔다.
“근처에 있는 다른 부대들에도 연락을 넣어놓겠습니다. 시간 안에 올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알겠습니다.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황도로 진군할 거라는 소문은 금방 퍼졌다.
병사들은 당황했고, 하사관들은 그런 병사들에게 제대로 된 음식과 술을 나누어주었다.
혼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병사들은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마셔댔다. 취기가 병영에 돌았다.
그런 느슨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안과 동료들은 침착하게 내일을 준비했다.
“보자……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치유약 좀 챙기고. 안에 들어가면 정신없을 거야. 떨어지지 않게 정신 바짝 차려. 특히 플로라 너. 한눈팔다가 길 잃지 마?”
“나를 대체 뭘로 보는 거야.”
“우마딜로가 맨 뒤에서 스텔이랑 플로라를 챙겨줘. 나랑 길을 아는 레아가 앞에 설게.”
“알았다.”
우선 간단히 주의할 점만 일러두고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다.
내일은 힘든 전투가 될 것이다.
이미 게임의 흐름과 달라진 게 많은 만큼, 이안도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
일이 생긴다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버텨야 한다.
‘황제가 단단히 준비했을 테니, 쉽지 않겠지.’
지금의 이안은 강하다.
이미 인간 중에서는 적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강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황제다.
만약 이안을 죽일 상대가 있다면, 그건 분명 황제일 것이다.
이안은 황제에 대해 떠올렸다.
코르디스에서 나눴던 그 짧은 대화를.
그때 처음 황제에게 느꼈던 인상은 ‘종잡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황제는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적이었다.
명확한 공포였던 흑기사와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막상 검을 맞대면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요.’
[맞아요. 두려움의 대부분은 미지에서 오는 법이니까요. 지금의 이안은 충분히 강하니 자신감을 가지세요.]
고개를 끄덕인 이안은 조용히 검을 뽑아 들었다.
지금껏 싸움을 거듭하며 봐온 다양한 기술과 비기들.
이안은 그것들을 자신의 검에 녹여내는 과정을 다시 했다.
이안의 검은 지금도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료들은 때론 조용히. 때론 잡담을 나누며 이안이 발전해나가는 걸 구경했다.
병사들과 달리 술을 마시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고 크게 긴장하는 이들도 없었다.
동료들은 이안을 믿고 있었다.
내일의 전투도 결국 승리할 것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긴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