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시가전
약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 넷으로 갈라져 각각 성문을 하나씩 맡았다.
그중, 남문을 맡은 이안과 동료들에게 지휘관이 설명했다.
“이미 숙지하고 있으시겠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저희는 곧장 황궁으로 향할 겁니다. 아마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겠죠. 그 틈을 타 이안 님이 황궁으로 가 황제를 처치해주십시오.”
일반 병사들이 미끼로서 시간을 끄는 동안, 이안을 비롯한 고급 전력들이 황궁을 치는 계획이다.
이안이 황제에게 도달해 그의 목을 치느냐. 아니면 그 전에 아군이 전멸하느냐의 싸움.
그 무엇보다 이안의 역할의 중요했다.
이안은 검집을 고쳐 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의연한 이안의 모습에 조금 안심한 지휘관이 이번엔 레아 쪽에 시선을 주었다.
“저하.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리실 순 없겠습니까?”
격렬한 싸움이 될 것이다. 목숨이 위험할 터.
지휘관은 이번 싸움에 이안과 레아라는 반 황제파의 구심점을 모두 잃어버리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아는 단호히 거절했다.
“아뇨. 저는 반드시 가야 해요. 제가 직접 싸우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저하의 뜻이 그러시다면……. 부디 조심하십시오.”
가볍게 목례한 지휘관이 이내 자신의 자리로 떠나갔다.
그리고 이안과 일행은 그와는 반대로 진형의 선두로 나아갔다.
돌격 신호를 내리면 이안이 가장 앞서서 달려나갈 생각이었다.
너무 위험하다고 지휘관은 우려를 표했지만,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사, 살면서 황도에 싸우러 갈 줄이야. 이번에는 정말 내 운도 다한 것 같아.”
“신이시여.”
“그래도 영웅께서 함께하시니, 어떻게든 될 거야.”
지금도 병사들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우뚝 서 있는 황도의 저 거대한 성도를 보고 있노라면,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아직 가시지 않은 취기와 이안이 앞에 서 있다는 안도감에 버티고 있는 것 뿐.
이안은 그런 병사들을 한번 둘러본 뒤, 옆에 나란히 선 기사들을 살폈다.
이안과 함께 기꺼이 선두를 맡아준 이들이었다.
기사들이 이안에게 목례했다. 이안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적막을 깨기 쉽지 않았다.
아군도 조용했고 성벽 안의 적들도 조용했다.
폭풍 전의 고요.
그 고요를 깬 건 낮고 깊은 뿔 나팔 소리였다.
우우우웅.
나팔 소리가 퍼져나갔다.
출격 신호.
이안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저 황도의 성벽을 향해.
‘일단 황도에서는 별 움직임이 없네요. 성문을 열어준 데다가 화살 하나 안 날리다니.’
[약속 하나는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겠죠.]
‘저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에요.’
이안은 슬며시 성검을 뽑아 들었다. 마찬가지로 레아와 우마딜로가 무기를 꺼내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스텔은 입으로 자그맣게 기도를 읊더니, 선두를 맡은 이들에게 기적을 걸어주었다.
긴장한 플로라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도 들렸다.
전투를 앞둔 이안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점점 성벽이 커진다. 성벽의 긴 그림자가 발에 밟혔다.
이제 성벽까지의 거리는 절반.
여전히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고, 이안은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등 뒤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씁. 괴물 아가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구만.’
지금이라도 발걸음을 돌리고 싶었다.
이것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을까? 자꾸 그런 망설임이 생겼다.
하지만 절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이안도 이런 데 병사들은 오죽하겠는가.
어느새 성벽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번 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달리라는 신호였다.
레아가 외쳤다.
“대륙을 위하여!”
“대륙을 위해!”
“우와아아아!”
레아가 땅을 박차며 앞서나갔다. 이안도 그 옆에 빠르게 따라붙었다.
“제가 외치려 했는데 선수를 치셨네요!”
“하하! 언젠가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맑게 웃는 레아의 뒤로 전 병력이 일제히 뛰기 시작했다.
수천 명이 땅을 박차자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었고, 지면이 웅웅 진동했다.
이안과 동료들. 그리고 기사들은 빠르게 달려 성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성안으로 들어선 순간, 이안은 볼 수 있었다.
그들을 향해 화살을 겨누는 궁수들과 마법을 준비하는 마법사를.
‘그래. 이제 시작이라 이거지.’
그들 중 하나가 외쳤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그 함성에 맞추어 화살비와 함께 크고 작은 마법들이 발사되었다.
후두둑!
선두에 선 기사들은 실력자였다. 그들은 쏟아지는 화살 따위는 가뿐히 쳐내었다.
하지만 문제는 마법이었다.
맹렬한 불꽃이 기사를 갑옷째 태워버렸고, 얼음 덩어리가 날아와 비에 젖은 땅을 얼려버렸으며, 갑작스럽게 지면이 치솟았다.
전문적으로 전쟁을 위해 훈련된 마법사 부대의 공격에 기사들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적의 간부 중 하나가 열성적으로 외쳐댔다.
“이 기세다! 이 기세를 몰아 놈들을 섬멸하라! 두 번째 공격을 준비……. 컥!”
어느새 날아온 화살이 간부의 목에 틀어박혔다.
“나 높은 사람이오 하면서 그렇게 티 내면 안 되지.”
이안은 태양의 활을 쥔 채 연거푸 화살을 쏟아내 적들의 마법사와 궁수들을 저격했다.
화살이 한 발 쏘아질 때마다 적 하나가 쓰러졌다.
어떨 때는 두 명을 한꺼번에 꿰뚫어 버릴 때도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한 일격에 마법사들은 두려워하며 방어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덕분에 적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아군의 마법사들이 활약할 틈이 주어졌다.
이쪽에서 적을 향해 쏘아낸 칼날 바람을 시작으로 요란한 마법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혼란 와중에도 이안은 침착하게 말했다.
“신경 쓰지 말고 우리는 계속 앞으로 가자. 플로라 너도 최대한 여력을 아껴놔.”
“아, 알았어!”
이안과 레아가 계속해 달리자 대기하고 있던 제국의 기사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안과 레아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의 검에 망설임은 없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배신자 황녀를 죽여라!”
씁쓸하게 웃은 레아가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레아와 기사들의 몸이 엇갈리자 핏방울이 사방에 튀었다.
숱한 경험으로 갈고닦은 레아의 일격을 기사들은 막아낼 수 없었다.
기사들이 순식간에 당하자 당황한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접근했다.
절대 이 뒤로는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그들에게 느껴졌다.
그러자 이쪽의 병사들도 모여들어 그들과 맞붙었다.
처음에는 나름 진형을 갖춘 싸움이었다.
하지만 진형은 빠르게 붕괴했고, 곧 난전이 펼쳐졌다.
병사들은 각각 흩어져 싸우며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피와 빗물이 튀었다.
이안과 일행은 그 한복판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역시 제대로 준비하고 있었어. 그나마 여기는 나 때문에라도 상황이 나았지만, 다른 성문으로 들어온 부대는 피해가 크겠어.’
하지만 그 걱정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른 이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일행은 얼마 안 가 그들은 시가지에 발을 들였다.
‘게임에서는 이곳에서부터 골치 아파졌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발을 디딘 순간.
밟고 선 바닥에서 틱! 하는 소리가 났다.
이안은 반사적으로 동료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한발 늦게 굉음이 울렸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돌 부스러기가 흩날렸다.
당황한 플로라가 외쳤다.
“뭐, 뭐야 대체!”
“지뢰야. 마법 함정이지.”
이안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고, 레아가 이어 설명했다.
“…….악마를 대비한 방호 시설 중 하나일 거예요. 이런 함정들이 황도 전체에 설치되어 있다고 보면 되겠죠.”
“이, 이래서 사람들을 다 대피시킨 거구나. 마음대로 터트릴 수 있게.”
“그런 셈이지.”
플로라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이러면 어떡하지? 어디에 함정이 있을지 모르잖아.”
“잠시 기다려봐.”
이안은 두 눈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안의 눈이 은은히 빛나면서, 주위에 있는 신비의 흔적들을 찾아냈다.
이안은 흔적이 있는 곳에 돌을 던져 보았다.
챙!
순식간에 피어난 얼음꽃이 주위를 찔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이안이 안심하고 말했다.
“대충 위치는 알 수 있을 것 같아. 너희는 나보다 몇 걸음 뒤에서 따라와.”
“아, 알았어.”
“늘 생각하는 거지만 재주가 많다. 이안.”
우마딜로의 무뚝뚝한 칭찬에 손을 내저어준 이안이 앞으로 향했다.
도시 곳곳에 함정이 많았다.
하나하나 안심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함정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함정은 다른 함정이 이미 발동된 곳에 교묘하게 숨겨진 경우도 있었다.
사람의 심리를 찌르는 영리함이었다.
게다가 위협은 함정뿐만이 아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기계가 이쪽을 향해 공격을 퍼붓기도 했고, 가끔 정령이 튀어나오거나, 적의 마법사나 기사들을 마주칠 때도 있었다.
한순간만 늦게 반응해도 큰 피해를 보았을 순간이 많았다.
하지만 이안 뿐만 아니라 동료들 역시 실력자들.
각자가 가진 특기를 이용해 역할을 다한 끝에, 일행은 빠르게 황도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황도의 중앙 광장.
황궁까지 불과 얼마 안 남은 장소에 이르렀을 때, 이안은 돌연 걸음을 멈췄다.
“느낌이 쎄한데?”
이안은 주위를 스윽 둘러본 뒤 외쳤다.
“어차피 다 들켰으니까 그냥 나와!”
잠깐의 적막 이후, 광장 곳곳에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검은 로브를 입은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로브에 새겨진 문양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운 만큼은 하나같이 사악했다.
이안이 이죽거렸다.
“악마숭배자들이구만 이거. 여기서 활약하면 황제가 한자리 줄 거라고 약속했나 보지?”
“…… 자리? 웃기는군. 너를 죽여서 그 영혼을 바치면 우리가 섬기는 분께서 헤아릴 수 없는 힘을 줄 텐데 그깟 권력이 대수겠는가?”
수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끼어들었다.
“잠깐. 얘기가 다른데?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시간 벌기다. 애초에 우리 실력으로 저놈을 이기는 건 힘들어. 테이오스 님이 말했을 텐데?”
“하! 그 잘난 테이오스는 저놈을 상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쳤지. 나는 그런 겁쟁이와는 달라.”
“뭐? 지금 뭐라…… 컥”
사내의 공격은 신속했다. 발끈하려던 여자의 목을 쥐었고, 순식간에 피를 빨아가 버렸다.
여자는 바싹 마른 미라가 되어 바닥에 철퍽 널브러졌다.
그 사이, 사내의 부하들이 여자의 부하를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했다.
‘내분인가? 아니. 애초에 같은 조직이 아니었던 거야. 그나저나 말하는 중에 공격하다니, 비겁하다고 해야 할지 영리하다 해야 할지…….’
가볍게 여자를 처리한 사내가 툭툭 손을 털었다.
그리고 이안을 보며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애초에 황제고 뭐고 관심 없다. 내가 이곳에 온 건 너를 죽이기 위해서다.”
“아. 그래.”
떨떠름하게 대답한 이안이 문득, 생각난 게 있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이름이 뭐였더라?”
“올리고르. 킨 올리고르다. 지옥에서 두 번째로 강한 악마를 섬기는 하수인이자, 네놈을 죽일 사내의 이름이지.”
“올리고르. 올리고르…….”
몇 번 그 이름을 곱씹던 이안이 말했다.
“응. 역시 모르는 이름이야.”
“흐흐. 너 따위가 감히 내…….”
“그냥 죽어라.”
이안은 올리고르가 말하는 틈을 타 성검을 집어 던졌다.
당황한 올리고르가 급하게 막아내려 했지만 성검에는 검광이 서려 있었다.
스콜드가 사용하던 투검술.
성검은 그대로 올리고르의 장벽을 뚫고 녀석의 머리에 박혔다.
올리고르의 몸이 허물어졌다.
“우리가 시간이 좀 촉박해서 말이야. 미안하다.”
이안은 성검을 뽑아 들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