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 시가전(2)
이안은 올리고르의 얼굴에 박힌 성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남아 있는 악마 숭배자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상황이 마무리되자 레아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악마 숭배자들이 황도에서 버젓이 움직이다니. 이제 황제는 숨길 생각도 없나 보군요.”
“어차피 이곳에서 아무도 나가지 못하면 소문도 퍼지지 않는다는 거겠죠.”
우마딜로는 놈들의 시체를 살피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꺼림칙한 기운이 풍긴다. 플로라. 불태워야 한다.”
“알았어.”
플로라가 손짓하자 불길이 시체를 덮었고, 이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역겨운 냄새와 함께 주위에 검은 기운이 퍼졌다.
그 검은 기운을 맡지 않기 위해 일행은 뒤로 물러서야 했다.
플로라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이런 놈들도 상대해야 한다는 거지?”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나마 여기 있는 놈들은 약한 놈들이야. 진짜 실력 있는 놈들은 황궁 안에 기다리고 있겠지.”
“황궁이라…… 이제 이 광장을 가로지른 다음에, 주택가를 통과하면 바로 황궁이야. 황궁에는 어떻게 들어가지?”
“글쎄. 일단 혹시 문이 열려 있는지 확인해야지.”
그때였다.
광장의 저편에서 또 다른 무리의 악마 숭배자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뒤쪽에서는 적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이안 일행을 발견했다.
“적을 발견했다! 배신자 황녀가 이곳에 있다!”
“황녀의 목을 베라!”
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남문에서 마주쳤던 기사들과 문양이 달라. 다른 쪽 문에 있던 놈들이 온 거야.’
[아군의 다른 부대가 이미 전멸했거나, 따로 병력을 빼도 될 정도로 여유롭다는 거군요.]
‘전멸은 아닐 거예요. 우리도 나름 전력이 강한 편이니까. 하지만 여유롭지 않다는 건 확실하네요.’
생각을 마친 이안은 곧바로 지시를 내렸다.
“나와 레아 님이 앞을 맡을게. 너희가 뒤를 상대해줘.”
“알았다.”
“응!”
이안은 레아와 함께 악마 숭배자에게 달려들었다.
뒤쪽에서는 도끼와 지팡이를 든 우마딜로가 기사의 갑옷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에게서 신경을 거둔 이안은 곧장 악마 숭배자에게 검을 흩뿌렸다.
파박!
순식간에 악마 숭배자 셋의 목에 빨간 선이 그어졌다.
이내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공기와 맞닿은 피는 이내 증발하더니 핏빛 안개가 되었다.
“혈 마법!”
“캬아아아!”
순간적으로 시야가 가려졌다.
당황하는 레아에게 분명 목이 베였을 악마 숭배자들이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 끝은 불그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안은 곧장 주먹을 뻗어 녀석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놈의 안면이 주저앉으며 송곳니가 후두둑 튀었다.
“질긴 놈들이라도 몸을 토막 내면 결국 죽어요! 그리고 놈들이 흘린 피에 닿지 말아요! 독이 들어있어요!”
“네…… 네!”
이안은 조언을 건네면서도 몸을 쉬지 않았다.
성검을 들고 부지런히 적을 베어나갔다.
‘워낙 생명력이 강한 놈들이라 여러 번 베어야 하는 게 성가시군.’
그러다 놈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이안에게 몸을 날렸다.
이안은 곧바로 검을 그어 놈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놈의 머리와 몸통이 떨어진 그 순간.
절단면에서 피가 폭발적으로 분사되며 놈의 머리가 투포환처럼 날아들었다.
이안조차 예상하기 힘든 엽기적인 한 수.
놈이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
“끼하하하! 영웅의 피만 있다면 이제 나도 두려울 게 없다!”
이안의 목까지 다다른 놈이 아가리를 크게 벌렸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송곳니를 이안의 목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우드득! 놈의 송곳니는 이안의 피부를 뚫지 못했다.
“으어?”
부러진 송곳니가 아래로 떨어졌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놈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안은 그런 놈의 머리카락을 부여잡은 뒤, 바닥을 향해 힘껏 던졌다.
투곽!
놈의 머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쯧. 더럽게.”
“괘, 괜찮은가요. 이안?”
“별것도 아니에요.”
우두머리의 죽음에 그 부하들은 크게 동요했다.
그들은 이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안과 레아는 그들에게 달려가 마지막 한 놈까지 숨통을 끊었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해도, 악마 숭배자를 그냥 풀어주었다가는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일을 마친 이안은 동료들을 돕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저쪽도 상황이 끝나가고 있었다.
우마딜로가 소환한 넝쿨이 기사와 마법사들을 단단히 옥죄고 있었다.
묶여 있는 적들은 이내 우마딜로의 손도끼에 숨이 끊어졌다.
스텔과 플로라가 도와줄 틈도 없었다.
“이 자들은 약했다. 그리고 이미 부상 당한 상태였다.”
“아직 다른 쪽 성문의 주요 전력이 오지 않은 거야. 부상은…….”
이안은 주위를 슥- 둘러봤다.
함정의 폭발로 엉망이 된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이놈들도 어디에 함정이 있는지 모르는 거지. 몇백 년에 걸쳐 보강한 거니까 아마 황제도 다 알지는 못할걸?”
“지독하군.”
“우리에게는 그나마 좋은 소식이야. 얼른 황궁으로 가자. 하지만 그 전에 플로라. 요란하게 한방 부탁해.”
“뭐? 응, 알았어.”
눈치껏 알아들은 플로라가 손위에 불덩어리를 소환해 크게 키웠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가 되었을 때, 광장의 한복판을 향해 던졌다.
환한 빛과 함께 요란한 폭발음이 터졌다.
콰아아앙!
온 도시를 울릴 정도의 굉음.
이안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면 다른 쪽에도 충분히 소리가 들렸겠지. 그놈들은 아마 황궁 쪽에 문제가 생길 줄 알 거야.”
요란하게 마법을 터트렸으니, 저들은 혼란한 와중에도 억지로 병력을 차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군이 이길 확률은 확실히 늘어날 터.
일을 마친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겨 이내 주택가에 들어섰다.
도로 양옆으로 고급스러운 주택이 질서 정연하게 들어서 있었다.
귀족들과 상위층이 머무는 지역.
일행은 발걸음을 좀 더 신중히 옮겼다.
도로가 좁아진 만큼 피할 수 있는 공간도 준 데다가, 악마 숭배자들이 숨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래쪽이야!”
“위대한 분을 받아들여라! 컥!”
“지붕 위랑 2층 창문에도 있어!”
은신과 도주에 능숙한 악마 숭배자들이다. 그들은 그림자에 숨어 있다, 이안 일행이 보이면 냅다 마법을 날리고 도망쳤다.
대부분은 이안의 화살이나 플로라의 마법에 쓰러졌지만, 몇몇은 무사히 도망쳐 다시 습격해왔다.
게다가 무엇보다 까다로운 건 그들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기서 멈춰.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오면 여기 있는 놈들을 다 죽일 거야. 그냥 죽이는 것도 아니고, 죽여서 위대한 분들께 제물로 바칠 거다!”
“사, 살려주세요!”
빡빡 민 머리에 문신으로 기괴한 문양을 새겨넣은 노인이 외쳤다.
노인은 한 청년을 붙잡고 그 목에 끝이 휘어진 단검을 갖다 대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인간의 뼈로 만들어진 제단이 만들어져 있었고, 그 주위에 농민으로 보이는 이들 십여 명이 묶여 있었다.
“……아주 별짓을 다 하는구나.”
“그, 그만둬라.”
당황한 레아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가자 노인은 미련 없이 청년의 목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청년이 피를 토하며 거꾸러졌다.
“나는 분명히 경고했다.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면 죽인다고. 네가 죽인 거야. 황녀.”
“무슨……!”
노인은 주저 없이 다음 인질의 머리를 잡고 단검을 가져다 댔다.
분노한 레아가 외쳤다.
“악랄한 녀석! 원하는 게 뭐냐! 무고한 사람들은 어서 풀어줘!”
“원하는 거?”
노인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의 영혼…… 이라 말하면 어차피 안 들어줄 거잖아? 그러니 우리 이대로 가만히 있자고. 나야 뭐. 시간만 끌면 되니까.”
레아가 초조한 얼굴로 이안을 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노인이 재빨리 말했다.
“허튼 짓거리는 할 생각 말라고. 나를 죽여도, 내 부하들이 곧바로 저놈들을 죽일 테니까.”
노인의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그의 부하들은 당장에라도 사람들을 죽일 듯이 단검을 갖다 대고 있었다.
이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앞에 녀석들보다 더 영리한 놈들이네.’
인질이라니. 이건 또 예상치 못한 형태의 방해였다.
이안은 빈틈을 살피면서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우선 노인을 자극하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 사람들은 어디서 데려온 거야. 행색이 황도 사람들은 아닌데.”
노인이 피식 웃었다.
“말을 하면서 기회를 볼 셈인가? 뭐, 시간만 끈다면 나야 상관없지. 황도 근처 촌락에서 끌고 온 놈들이다.”
“이렇게 백성들을 죽이고 인질로 잡고 하는 거, 황제는 허락한 거냐?”
“허락?”
노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우리가 섬기는 이는 오직 위대한 분들뿐이다. 황제와 우리는 그저 계약을 했을 뿐.”
“그건 알겠고. 이 지랄 하고 있는 거 황제가 알겠냐고.”
“글쎄. 테이오스는 무슨 짓을 벌이든 상관없다고 했다. 황제가 우리를 직접 불렀으니, 이 정도쯤은 눈감아주지 않겠어?”
“그렇단 말이지…….”
황제는 알고도 방치했다.
이들과 한통속이라는 소리였다.
충격받은 레아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엇나갔어도 이런 짓을 오라버니가…….”
이안은 레아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노인에게 말했다.
“뭐,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이제 끝인가? 어차피 시간은 여유로운데, 더 대화나 나누지? 이래 봬도 난 영웅이란 것들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거든.”
“아니. 마법 준비가 얼추 끝난 것 같아서 말이야.”
이안은 플로라 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노인의 발아래에서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주위를 순식간에 삼켜 버리는 뜨거운 열기.
노인이 그대로 불길에 목숨을 잃었을 거라는 건 의심할 나위 없다.
하지만 레아가 다급히 외쳤다.
“프, 플로라! 아직 인질들이 저기에 있어요!”
“그건 걱정마세요.”
불기둥이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휘말렸던 백성들은 멀쩡했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이건…….”
“아직 레아 님께는 보여드리지 않았던가요? 제 불꽃은 원하는 것만 태울 수도 있거든요.”
“다, 다행이다.”
레아가 안심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사이 이안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밧줄을 풀어주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어디 적당한 곳에 숨어 있어요. 이 근처 집 아무 곳에나 들어가 있으면 될 거예요.”
“아. 아아. 감사. 감사…… 가. 가…….”
이안의 어깨를 붙잡은 여성의 몸이 세차게 떨렸다.
[긴장이 풀렸나 보네요. 가엾게도.]
‘예.’
이안은 쓰러지려는 여성을 부드럽게 잡아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여성이 몸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폭발하며 주위에 살과 뼛조각을 흩날렸다.
그리고 그에 연쇄적으로 다른 주민들의 몸도 폭발해 버렸다.
“…….”
“이, 이안! 괜찮아?”
“응. 이 정도는 조금 따끔할 뿐이야.”
상당히 강력한 폭발이었지만 이안에게는 큰 타격은 아니었다.
다만, 기분이 더러웠다.
아주아주 더러웠다.
“…….”
“세상에…….”
“너무하잖아.”
동료들 역시 지독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이안은 몸을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그래. 처음부터 풀어줄 생각은 없었다 이거지. 악마 숭배자답구만.”
지금 자신이 누구랑 싸우고 있는지.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나는 기분이었다.
“어서 가서 황제와 결판을 내자고.”
이안은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황궁을 지키는 거대한 성벽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