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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20화 (221/222)

220. 대악마

지옥은 기묘한 곳이었다.

펄펄 끓는 용암과 유황불. 족히 만년은 넘게 그 자리에 있었을 빙하. 폭풍우와 붉은 번개.

그 모든 것이 한 공간에 공존했다.

게다가 주위에 떠도는 서늘한 공기. 아무것도 없지만 무심코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꺼림칙한 분위기까지.

무엇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공간이 바로 이곳이었다.

다섯은 말없이 걸었다.

마지막 싸움을 앞둔 만큼, 누구 하나 긴장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두에는 언제나처럼 이안이.

그 뒤로 레아가.

중앙에는 플로라와 스텔이.

후방에는 우마딜로가 맡아 천천히 이동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인 보람도 없이, 지옥에서는 그 어떤 습격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옥 자체가 텅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공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 한 존재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너무나 압도적이었으니까.

이안은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하늘 높이 솟아오른 얼음 기둥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 기둥의 윗부분은 먹구름 속에 묻혀 있었다.

저 기둥의 위에서 대악마는 이안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잠시 멈춰 섰던 이안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동료들이 뒤를 따랐다.

그리고 마침내 얼음 기둥 아래에 다다랐다.

기둥의 겉면에는 위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이안은 계단 앞에 멈춰 섰다.

의연하게 행동하려 해도, 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스텔이 이안의 소매를 꾹 잡아당겼다.

“……왜 그래?”

이안이 묻자 스텔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푸르게 잔디가 자란 땅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주위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이안은 실소를 터트렸다.

“허. 어이가 없네.”

“지상의 미련은 모두 놓아두고 오라는 걸까요? 아니면 가장 좋은 컨디션으로 올라오는 배려일지도요.”

악마가 배려라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다들 이안을 쳐다보며 결정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모닥불 앞으로 가 주저앉았다.

“그래. 어디 원하는 대로 해주자고. 몸도 좀 녹이고. 피로도 좀 풀고.”

“함정이 아닐까 몰라.”

플로라가 이안 다음으로 앉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글쎄. 그런 좀스러운 짓은 안 할 것 같은데.”

“하긴…… 명색이 대악마인데.”

나머지 동료들도 의심을 거두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았다.

따뜻한 불빛이 그들의 마음을 녹였다.

멍하니 불을 쳐다보며 이안이 중얼거렸다.

“따뜻해지니까 입이 좀 심심하네. 그러고 보니 계속 굶었던 것 같은데.”

“육포랑 빵이 조금 있다. 나눠 주겠다.”

“진짜?”

어차피 마지막 일 줄 알고 모두 식량 같은 건 안 챙긴 줄 알았는데, 우마딜로가 품에서 빵과 육포를 꺼냈다.

우마딜로는 솜씨 좋게 빵과 육포를 모닥불에 데운 뒤, 동료들에게 나눠주었다.

양은 넉넉하지 않았다. 맛도 평범한 건량의 그것.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힘이 났다.

동료들과 조금 남은 식량을 나눠 먹는 행위에서 서로가 이어져 있음을 느꼈다.

따뜻해진 분위기.

플로라가 동료들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나저나 참 신기하다니까? 이렇게 별나고 개성적인 사람들이 함께 모이다니.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하. 분명 운명이겠죠. 신께서 인도하신 걸 거예요.”

“동의한다. 그렇지 않나 이안?”

우마딜로의 질문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다.

“…….”

이안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주저했다. 이 말을 해도 괜찮을지 망설여졌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그에게는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동료들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할 말이 있어. 들어줘.”

이안의 말에 동료들이 입을 다물었다.

다시 머뭇거린 이안이 천천히 이야기했다.

“저번에 황제가 말한 말 있잖아. 내가 원래 이곳 사람이 아니라고 했던 그거, 사실이야. 자세히 설명하기에는 복잡한데…… 난 대충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고 있었어. 악마가 내려올 거라는 것도 알았고, 너희도 일부러 찾아다닌 거야. 악마랑 싸우기 위해서는 너희가 필요했어. 그러니, 우연은 아니야. 운명도 아니고.”

이안은 속에 있는 것들을 담담히 풀어냈다.

사실. 굳이 밝히지 않았어도 될 일들이다.

하지만 이안은 굳이 모든 걸 밝혔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

이안은 온전히 타산적인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접근했다.

그저 ‘성능’이 좋으니까 이들을 찾아다녔다.

같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게임 속 캐릭터로서 이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안에게 동료들은 더는 게임 캐릭터 따위가 아니다.

이안은 자기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와 준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다.

그렇기에 마지막 순간만큼은 모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안은 그간의 일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건 전부 설명했다.

그리고 악마와의 싸움에서 최선을 다하겠지만 누군가 죽을 확률이 크다고. 어렵사리 토해냈다.

끝에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미안. 지금껏 숨겨와서. 속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아무도 죽지 않게 최선을 다할게. 만약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이안이 말끝을 흐렸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동료들이 당황했다. 단 한 명만 빼고.

“상관없어.”

고민 없이 대답한 건 스텔이었다.

스텔은 이안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난 좁은 공간 안에 평생을 갇혀 있었어. 그런 내게 큰 세상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준 건 이안이야. 그러니 난 이안이 어디서 왔든. 어떤 생각으로 나와 만났든 상관없어. 설령 지금 죽는다 해도, 난 괜찮아. 나에게 삶을 준 게 이안이니까.”

“스텔…….”

이안의 눈이 커졌다.

곧바로 괜찮다고 말해주어서인지. 아니면 스텔이 말을 유창하게 해서인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이어서 플로라도 허리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나 참. 뭐 얼마나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나 했더니. 어차피 네가 예언자 행세할 때 이미 네가 뭐라고 하든 하나도 안 놀랍거든? 그리고 나도 스텔 양이랑 똑같아. 힘들 때 네가 붙잡아 주었어. 그래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고. 그거 외에 뭐가 더 필요해? 그러니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늘 그렇듯이 건방질 정도로 당당하게 굴라고. 보, 보기 안 좋으니까.”

“플로라…….”

옆에서 우마딜로와 레아도 거들었다.

“너는 나와 내 동료들을 구해주었다. 나한테는 그거면 됐다. 그리고 여기 모인 모두는 죽음을 각오했다. 이제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이야기다.”

“동의해요. 대륙의 황제로서 제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이안이 함께 짊어져 주었잖아요? 설령 이안의 출신이 특별하고, 우리보다 많은 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그건 흠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대단한 거죠.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도망치지 않았으니까.”

단순한 위로가 아니었다.

이안이 진심을 털어놓은 것처럼, 동료들도 진실만을 털어놓았다.

미안하다고 다시 사과하려던 이안은 말을 삼켰다.

이안은 대신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우리도 이안에게 고마워요.”

이내 다섯은 대화 주제를 돌렸다.

더는 죽음이니 싸움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어렸을 때 경험했던 재미있는 일들이나, 함께했던 모험들에 대해서. 미래에 어떻게 살고 싶은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모닥불 앞에서 함께 식사하며 담소를 나눈다.

이 일상적인 행복이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져, 이 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피하고 싶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빠가 내 생일 때 쿠키를 구워줬는데…….”

“플로라.”

“응?”

“쿠키 얘기는 일을 모두 끝내고 그때마저 얘기해줄래?”

“아. 응.”

이안은 천천히 일어나서 계단 앞에 섰다.

동료들도 일어났다.

이안은 고개를 들어 기둥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 속에 갇혀 있는 기둥을.

“그래.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지.”

여정의 끝이 다가왔다.

***

계단을 끝까지 오른 끝에 기둥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먹구름이 돔 형태로 감싸고 있는 넓은 공간.

그곳에 악마는 홀로 서 있었다.

그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을.

꼭 그렇게 노려보고 있으면 구름을 꿰뚫고 그 너머를 볼 수 있기라도 한듯한 태도였다.

이안과 일행이 올라서자 악마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군!”

그는 어딘가 들떠 보였다. 마치 소풍 전날 어린아이처럼, 잔뜩 기대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이내 실망으로 일그러졌다.

“뭐야. 그때 봤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잖아. 이거, 조금 실망인데…….”

하지만 악마는 뺨을 양손으로 두드린 뒤,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흠. 시작도 하기 전에 초를 칠 수 없지. 또 무언가 대단한 걸 숨겨두었을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럼 다시 시작하지. 환영한다. 영웅들아.”

마치 1인극을 하듯. 홀로 중얼거리던 악마가 우아하게 팔을 벌렸다.

그 모습에 이안은 입을 다물었고 이네스가 중얼거렸다.

[…… 제가 싸웠을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군요. 종잡을 수 없는 존재예요.]

반응이 없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악마가 말했다.

“내 모습에 다들 당황한 듯하군. 너희들이 생각하기에는 ‘악마스럽지’ 않나? 그럴만해. 하지만 이런 내 모습은 너희들의 탓이다.”

“뭐?”

악마는 긴 생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설명했다.

“나는 온갖 부정한 감정들로 만들어진 존재. 두려움 그 자체를 형상화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지. 두려움! 과거, 너희 인간들은 자연 그 자체를 두려워했다. 낙뢰, 홍수, 그리고 산불.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대자연의 웅장함. 그 당시의 나는 정령과 크게 다를 바 없던 외견이었다. 인간이 겸손함을 알던 시기였지.”

아련한 과거를 들여다보는 듯. 악마는 슬픈 눈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조금이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형이나 기계가 연기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 언밸런스함이 일행의 가슴을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악마가 말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건, 너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이제는 같은 인간이라는 증거다. 두려울 게 없어서 본인들 스스로를 두려워하다니. 참으로 건방진 존재가 아닐 수 없어.”

익살스럽게 말하던 악마의 어조가 서늘해졌다.

그의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어두운 감정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악마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그의 몸이 발산하는 존재감이 급격히 강해졌다.

피부가 저릿해지는 감각에 이안과 동료들은 자세를 잡았다.

그런 이안을 깔보듯이 내려다보며 악마가 선언했다.

“그리고 그런 오만함을 꺾어 겸손함을 심어주는 게 바로 죽음과 공포의 역할. 나는 이곳에서 너희를 꺾고, 대륙을 불태울 것이다. 인간들의 핏속에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를 새겨줄 것이다. 그러니 준비는 되었나 영웅들이여?”

악마가 망토를 펄럭이며 말했다.

“끝을 맞이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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