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221화 (최종장) (222/222)

221. 최종장

이안이 달렸다. 악마에게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성검을 앞세워 내지르자, 망토 속에 있던 악마의 팔이 뻗어 나왔다.

카각!

악마의 단단한 손은 성검에도 쉬이 베이지 않았다.

이안은 정신을 집중해 검광을 피워냈다.

그 창백할 정도로 하얀빛에 악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허. 이 검광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캉!

악마가 양팔을 교차해 성검을 막아내었다.

어느새 그의 양손에는 부정한 감정들이 응축된 검푸른 기운이 일렁이고 있었다.

검광과 기운이 부딪힐 때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가 울렸다.

검을 맞부딪힐 때마다 정신이 오염되는 기분.

하지만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찰나라는 시간 속에 수십. 수백 합의 공방이 이어졌다.

이안은 대륙에서 제일 강한 검사.

그의 검술은 대악마조차 조금씩 몰아붙일 정도로 잘 벼려져 있었다.

악마가 즐거운 듯이 외쳤다.

“하! 그래. 그 여자한테 검술 하나는 제대로 배웠다 이건가?”

“좀 닥쳐!”

성검을 가슴까지 끌어들인 이안이 번개처럼 팔을 내뻗었다.

검광이 쓰인 검날은 빛 꼬리를 단 채 올곧은 궤적을 그렸고, 곧장 악마의 심장을 노렸다.

악마는 왼손은 위에서 아래로. 오른손은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 성검의 날을 때렸다.

깡!

얻어맞은 검날이 울부짖고, 그 궤적조차 어그러졌다.

하지만 예상했다.

이안의 눈이 은은하게 빛났다.

보인다. 악마가 어떻게 행동할지, 황제만큼은 아니어도 녀석의 어떻게 움직일지 대강 보이고 있었다.

이안은 틀어진 궤적 그대로 곱게 검을 뻗은 뒤. 자연스럽게 그 칼끝을 휘어 악마의 목을 노렸다.

악마가 어깨를 들어 검날의 옆면을 쳐내려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읽어냈다.

손목을 힘껏 꺾어 그대로 검을 세로로 돌린 뒤, 수직으로 악마의 어깨를 내려쳤다.

촤아악!

악마의 어깨가 깊게 베였다.

상처에서는 피 대신 검은 연기가 뿜어졌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지만, 그게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악마는 무적이 아니다.

그에게도 허용된 생명력의 한계란 게 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게임에서 그랬으니까!’

이안은 조금의 틈도 없이, 곧바로 악마에게 다음 공격을 이었다.

상대에게 끝없이 연격을 날리는 브레이브 하트의 검술처럼, 이안은 오로지 공격만을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악마도 조금은 위협을 느낀 걸까?

“하. 역시 그 눈. 거슬려. 역시 근접전은 쉽지 않군.”

그렇게 중얼거린 악마는 입을 크게 벌리며 보라색 연기를 토해냈다.

독성이 가득한 연기로 맡으면 피부를 곧바로 녹여 버리는 지독한 녀석이었다.

치유법도 없는 저 맹독은 우선 피하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이안은 정석에 따를 생각이 없었다.

“플로라! 강하게!”

“어? 하지만…….”

“어서!”

지시를 받은 플로라가 푸른 불덩이를 악마에게 날려 보냈다.

콰아아아!

폭발한 불덩이가 불꽃을 뱉어내며, 악마 주위의 모든 걸 삼켰다.

악마가 뱉어낸 맹독성 안개도 푸른 불꽃 앞에서 모조리 불타 버렸다.

문제는 악마 주위에는 이안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안 역시 폭발의 반경 안에서 열기를 고스란히 받았다.

이내 연기가 걷히고 악마와 이안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안은 몸 곳곳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벌겋게 변해 있었다.

그나마 고룡의 가호가 있었기에 이 정도 피해에 그쳤을 것이다.

분명 많이 고통스러울 터지만, 이안은 악마를 보며 웃었다.

“네 뜻대로는 안 될 거다.”

이게 바로 이안이 다다른 해답.

악마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집요하게 근접전으로 몰고 간다.

그걸 위해서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한다.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후. 이안은 비로소 그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악마가 말했다.

“그래. 그 광기 하니만큼은 마음에 드는구나.”

이안은 대답 없이 다시 땅을 박찼다. 악마는 손가락을 들어 이안을 가리켰다.

검은 기운이 손가락 끝에 모이더니, 광선의 형태로 이안에게 쏘아졌다.

이안은 다급히 땅을 굴러 광선을 피했다.

악마는 손가락을 움직여 이안을 끈질기게 추격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바닥에서 자라난 넝쿨이 악마의 양팔을 붙잡아 단단히 고정했다.

“우리도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우마딜로가 지팡이로 여러 번 땅을 두드리자, 계속해서 넝쿨이 자라나 악마의 몸을 속박했다.

플로라의 불꽃이 그런 악마를 넝쿨째로 태웠고, 스텔은 기적을 부려 악마를 강하게 압박했다.

동료들이 틈을 벌어준 덕에 이안은 무사히 악마에게 당도할 수 있었다.

이안은 아까보다 더 매서운 기세로 검을 휘둘러나갔다.

게다가 이번에는 레아도 함께다.

주로 공격은 이안이 했지만, 잠깐의 틈이 생겨나면 레아는 곧장 악마를 찔러 들어갔다.

다섯 명의 완벽한 연계는 악마의 모든 노림수를 봉쇄했다.

불꽃이 터지고, 악마의 기운이 어지러이 흩날릴 때마다 이안의 몸에 상처가 늘어났지만 뭐 어떠한가.

‘이기기만 하면 돼!’

촤악!

성검을 그어 올리자, 악마의 팔이 하늘을 날았다.

새 팔이 곧바로 돋아났다.

악마는 돋아난 팔로 곧바로 이안의 목을 노렸다.

그 팔도 잘라냈다.

이번에는 더 안쪽까지 파고든다.

이안은 악마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죽어!’

이안은 검 끝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검이 악마의 목에 닿았다.

의외의 성공이었다. 악마의 목이 떨어지고, 대량의 안개가 흘러나왔다.

이안은 당황했지만 검을 멈추지는 않았다. 곧바로 검을 되돌리려 했다.

그리고 악마의 머리가 곧바로 돋아났다. 악마는 볼과 어깨로 이안이 성검을 한순간 붙잡았다.

“잡았다!”

악마는 팔을 뻗었다. 이안의 가슴에 그 손을 박아 넣었다.

촤악!

격통이 피부를 타고 흘렀다.

이안은 가까스로 검을 되돌려 악마의 팔을 베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악마의 손이 심장을 부쉈을 것이다.

“괘, 괜찮아?”

“계속 싸워!”

이안은 다시 검을 휘두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악마의 목을 베었을 때. 그 일격은 분명 큰 피해를 주었다.

그렇다면 악마 역시 피해를 감수하면서 이안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는 것.

이안은 악마의 눈을 보았다.

놈의 눈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광기는 인간만의 전유물의 아니라는 것을.

‘그래. 한번 해보자고.’

뒤이어 서로의 목숨을 도외시한 무자비한 싸움이 펼쳐졌다.

피가 튀고, 서로를 죽이기 위한 치명적인 일격이 수십 번씩 오고 갔다.

이런 식의 난타전은 결국에는 더 독한 쪽이 이기는 법이다.

이안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상대를 분석하고, 판단했다.

이안의 검이 점점 더 정교한 궤적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이안이 경지가, 더 높을 곳을 향했다.

어쩌면 이네스의 경지를 넘볼 수 있을 만큼.

***

이네스는 이안의 곁에서 그가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

중요할 때 발휘되는 무시무시한 집중력.

그녀의 제자는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이네스는 문득.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생각했다.

이안을 처음 만났을 때. 이안이 이곳까지 다다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

그녀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입으로는 얼마든지 말할 수 있었다. 믿고 있었다고. 그럴 줄 알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생각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적. 그녀는 언제나 동료들을 믿는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났다.

이네스는 이내 생각을 지우고 이안의 싸움을 관찰했다.

이안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돼가며 악착같이 싸우고 있었다.

이대로는 싸움이 끝나고도 불구가 되어, 평생을 불편하게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이안도 그 사실을 안다. 하지만 도리어 더욱 맹렬하게 싸웠다.

모든 건 동료를 지키고, 승리하기 위해.

예전의 이안에게는 결코 기대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이안이 진정으로 성장을 보인 검술이 아닌, 바로 그의 마음이었다.

이네스는 그런 제자의 성장이 너무 대견하고. 너무 고마웠다.

이안이라면.

이안이라면 기적을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거듭된 격전에 이안의 소모도 심했지만, 한눈에 봐도 악마의 피해가 더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이 흩뿌리던 기세는 강력함을 잃었고, 더는 존재감도 이전 같지 않았다.

승리가, 머지않았다.

[조금만 더…….]

이안의 실력의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늘었다.

단순히 휘두른 검이 마법사의 마법보다도 더 신비롭고 파괴적인 일격으로 변모했다.

이안의 경지. 이안을 가로막고 있던 벽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이안의 몸속의 세포 하나까지 오로지 이 검에 집중했다.

이안이 땅을 박찼다. 검광과 어우러진 그는 빛이 되었다.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네스가 목놓아 외쳤다.

[이안! 지금이에요!]

이안이 빛처럼 빠르게 움직여 아래에서부터 검을 그어 올렸다.

악마의 몸 한가운데에 실선이 생겨났다.

이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시 움직였다. 가로에서 세로로. 세로에서 대각선으로.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악마가 재생하지 못하게.

저 저주받을 존재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

이내 악마의 몸이 무수한 실선으로 뒤덮이고.

이안은 왼발을 축으로 힘껏 회전했고. 오른발로 있는 힘껏 걷어찼다.

파악!

악마가 산산이 조각났다. 무수한 갈래로 나뉜 악마의 조각이 하늘에 흩날렸다.

이안과 동료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사악한 기운은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결국.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싸운 끝에 인류는 또 한 번의 위기를 이겨냈다.

기진맥진해진 플로라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났구나…… 전부 끝난 거야.”

“그래. 전부 끝난 거다. 모두들 수고 많았다. 다들 잘해주었어. 너희들이 노고에 진심으로 갈채를 보내마.”

“갈채는 무슨…… 잠깐. 이거 누구 목소리야.”

동료들이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의 악마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너……!”

“잘 해주었다 모두. 그만하면 인간치고는 매우 훌륭했어. 하지만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는 법. 절차를 무시하고 결과에 이르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너희들도 잘 알지 않나?”

악마가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이 오면. 하나가 죽는다.”

악마가 다시 손을 구부렸다.

이내 악마의 손에 거무스름한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전과는 명백히 다르다.

저건 위험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일격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안!]

‘으으…… 움직여라 좀!’

이안은 어떻게 해서든 성검을 들고 달려나가려 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독사를 마주한 쥐처럼, 온몸의 근육이 공포로 굳어 있었다.

그 새에도 악마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벌벌 떨고 있던 플로라가 억지로 혀를 움직여 외쳤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아!”

악마가 웃었다.

“하하하! 그냥 죽이기만 하면 재미가 없겠지. 이건 죽음과 허무의 힘을 극한으로 압축한 일격이다. 이것에 얻어맞는다면 단순한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너희들의 존재 자체가 사라질 테지.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거다. 네가 했던 모든 노력. 희생. 세상에 남긴 발자취.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두렵지 않나?”

사람들은 역사에 발자국을 남기고 남들에게 기억됨에 따라 죽음 이후에도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악마의 일격에 맞는다면 찾아오는 건 오직 압도적인 허무함뿐.

누군가 알아 봐주는 이도, 기억해주는 이도, 그리워해 주는 이도 없다.

사랑하던 모든 이들이. 미워하던 모든 이들이. 함께 웃고 떠들고 추억을 공유하던 모든 이들이.

사라져 버린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다.

그건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공포였다.

이길 수 없다. 인간은 절대 이 공포에 이길 수 없었다.

이네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안 돼…….]

이안의 동료들이 두려움에 떨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나서줬으면 하는 나약함.

이네스는 저 눈빛을 안다.

과거가 되풀이되려 하고 있었다.

이네스의 동공이 수축했다.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린다.

[안 돼……!]

그날 있었던 일은 마음속의 커다란 상처를 남아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네스를 괴롭히고 있다.

이네스는 기억한다. 그녀가 고뇌하며 괴로운 나날들을.

몇백 년 만에 다시 만난 동료들이 끔찍하게 살아가던 모습들을!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비극이다.

그렇기에 이네스는 여정 동안 간절히 원했다.

부디 이안이. 이네스의 트라우마를. 이 비극을 깨트려 주기를.

하지만 실패였다.

비극은 되풀이된다.

똑같은 아픔을 이안 역시 느껴야 한다.

그리고…… 이네스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네스는 자포자기했다.

“끝이다.”

악마가 모든 준비를 맞췄다.

악마가 검게 물든 양손을 하나로 뭉쳤다.

부정하게 꿀렁이던 기운이 일순, 한점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무색의 광선이 쏘아졌다.

광선의 정체는 ‘허무’다.

허무는 소리, 빛, 그리고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빨아먹는다.

주위에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모든 색감도 사라졌다.

흐릿한 공간 속에서 광선이 가까워진다.

동료들이 다급한 표정으로 서로에게 무어라 외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다.

몸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

이대로면 모두가 말려들 것이다.

모두가, 끝을 맞이할 것이다.

“그럴 순 없지―!”

무음이 공간에서 이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를 악문 이안이 온 힘을 쏟아부었다.

처음에는 손가락이다. 공포에 얼어 있던 손가락이 조금씩 흔들렸다.

[이안!]

“제발 움직여라!”

손가락부터 되찾은 신체의 제어권은 이내 팔로. 가슴으로. 그리고 심장으로 이어졌다.

공포에서 해방된 이안은 다리가 부러져라. 바닥을 박찼다.

이안의 신체가 바람과 같은 속도로 앞으로 쏘아졌다.

이안은 광선이 경로에 서 있던 동료들을 양옆으로 밀쳤다.

광선이 그런 이안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다.

이 시점에 이안이 어떤 짓을 벌이려는지, 모두가 알아챘다.

희생.

‘시발시발시발!’

이안의 마음의 외침을 들은 건 오직 이네스뿐이었다.

이안은 스스로의 행동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멍청하고, 자기답지 않다고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과는 다르게 그의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분명 평생 끔찍한 후회 속에서 살 것이라고.

이건 확신이었다.

이네스의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에 내릴 수 있는 확신.

이안은 살면서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많이도 후회했다.

더는 후회할 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의미 있게…….’

이안은 놀랄 만큼 담담하게 최후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때였다.

은발을 길게 기른 소녀가 이안의 앞을 막아섰다.

스텔이 이안을 등진 채 양팔을 활짝 벌렸다.

“무슨…… 빨리 나와 스텔 이 멍청아!”

이안은 스텔을 잡아당기려 했다.

하지만 스텔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를 말했다.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평소에 하던 ‘응’이 아닌, 처음으로 뱉은 ‘싫어’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안은 스텔을 구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힘을 쓰려 했다.

그리고 그때.

스텔의 앞에 플로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으로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물러서지는 않았다.

그 앞을 이번에는 레아가. 또 다음에는 우마딜로가 섰다.

서로가 희생을 하기 위해,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떨리는 눈동자로 이네스가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바라던 풍경. 바라왔던 동료들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평생을 괴롭혀 온 비극.

매일 밤 마음을 아프게 했던 트라우마.

그 모든 것들이 지금. 완전히 부서졌다.

이는 이네스에게는 구원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네스는 생각했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그렇기에 가진 모든 힘을 쥐어짜 냈다.

“……!”

이안은 성검이 스스로 움직이는 느낌에 깜짝 놀라며 거둬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성검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이안은 성검에 끌려가듯이 앞으로 향했다.

당황한 이안의 머릿속에 이네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고마워요 이안.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미련을 벗어던질 수 있었어요.]

‘이네스 님. 지금 성검을 움직이는 게 이네스 님인가요?’

[제가 이루어내지 못했던 걸 이안은 이뤄냈어요. 정말이지…… 훌륭히 저를 뛰어넘었잖아요. 이런 걸 청출어람이라고 하던가요?]

‘이네스…… 님?’

[저는 이안을 믿어요. 이안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안도 스스로를 믿어주세요.]

마지막 순간.

이네스는 여느 때와 같은 맑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 한편에 숨겨져 있던 서글픔과 외로움은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성검과 광선이 부딪혔다.

강한 폭발과 함께 주위에 총천연색의 빛이 흩뿌려졌다.

그리고 성검은…… 또다시 여러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

강력한 폭발은 지옥의 바깥에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악마의 군세와 맹렬히 싸우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당황하더니, 이내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부디 이안과 동료들이 승리하기를.

***

충격의 여파는 모두를 집어삼켰다.

이안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료들은 모두 기절해 있었다.

깨어난 건 오직 이안 뿐이다.

그런 이안을 보며 대악마가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아주 훌륭해! 존재가 소멸될 위험 앞에서도 서로 앞다투어 몸을 던지는 동료애라니! 너희 인간들은 가끔 이렇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주지. 나는 말이지. 이곳에 갇혀 있는 긴 시간 동안은 저 하늘의 별을 보며 지낸다.”

악마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그 반짝임을 나는 좋아한다. 방금 너희들이 보여준 모습도 별의 반짝임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았어.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를 표한다.”

이안이 떨리는 몸을 억지로 부여잡았다.

상처도 많고 피도 너무 많이 흘렸다.

무엇보다, 성검이 산산이 조각나 자루만이 남았다.

그런 이안을 악마는 심드렁하게 쳐다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걸 추천하마. 이네스의 영혼은 다시 조각났어. 아, 애초에 그녀를 기억은 하려나?”

“……기억한다.”

“그래. 그거 다행이군. 아니, 오히려 불행인가? 어쨌든, 나는 네가 그녀에게서 힘을 얻어 쓴다는 걸 안다. 검술, 정령술, 심지어 검광마저도 빌려 쓰더군. 그 정도로 뻔뻔하고 염치없는 인간은 처음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제 없다. 네놈도 힘을 모두 잃었다는 거다. 그러니 쓸데없는 저항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아까 보여준 반짝임에 대한 보답으로 적어도 마지막만큼은 고통 없이 깔끔하게 보내줄 테니.”

이안은 멍하니 손을 쥐었다 폈다.

악마의 말이 맞았다.

이네스는 더는 없었고,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이네스에게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말이다.

이제 이안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별다른 능력 없는 범인.

그에게는 더는 악마를 상대할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은 주저앉지 않았다.

만신창이인 몸을 꼿꼿이 세워 악마를 보았다.

그 모습에 악마는 의아해했다.

“자존심인가? 아니면 미련한 고집인가?”

“…….”

“듣고 있나?”

그제야 이안이 다시 악마에게 고개를 돌렸다.

악마가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감히 나를 앞에 두고서 다른 생각을 하다니. 뭐, 유언이라도 생각하던 참인가?”

“잠시 과거를 되새겨 보고 있었어.”

“과거 말인가?”

악마가 흥미를 보이자 이안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패배자였거든. 바보 같은 실수로 기회를 날려 먹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야구선수로서 실패한 일. 선배에게 돈을 떼먹힌 일. 도박에 심취해 인생을 낭비하던 일. 몇 년 동안 공시생 노릇을 한 일.

누가 봐도 이안은 인생의 실패자이며 패배자였다.

이안조차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믿지 않았어. 목소리에서 느껴지더라고. 근데, 그럴 수밖에 없었어. 나조차 나를 믿지 않았단 말이야.”

“갑작스러운 인생 고백인가. 뭐, 악마라도 상관없다면 기꺼이 들어주겠다.”

악마의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이안은 눈을 감은 채 말을 계속했다.

“근데 말이야. 어느 날 엄청난 사람을 만났어. 아주아주 아름답고, 강하고, 올곧은 그런 사람을. 그 사람은 나를 믿는다고 했어. 만남의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나를 지켜봐 주면서, 진심으로 믿어주었어.”

“흐음?”

“그러니까 나도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 한 번이지만…… 나 자신을 믿어보기로 했어.”

이안이 눈을 떴다. 그의 두 눈동자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동시에 이안의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악마가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무슨…….”

“글쎄. 믿음이 곧 힘이 되는 세계잖아? 사람들이 나를 진짜 불사신이라고 믿어주나 보지.”

이안은 살며시 손을 들었다.

몸속에서는 뜨거운 힘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간 그에게 결여되어 있던 힘. 이네스에게 의지해야만 했던 믿음이라는 힘.

이안은 조용히 읊조렸다.

“호크. 나와줘.”

이안의 손 위에 빛이 모여들더니, 이내 맹금의 형태가 되었다.

이전보다 더욱 찬란한 빛을 뿌리는 빛의 정령이 그곳에 있었다.

“핍?”

“호크. 부탁해.”

“핍!”

호크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로 날아올랐다.

구름 속으로 호크가 사라진 조금 뒤. 쨍한 빛이 구름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 뜨거운 열기에 먹구름이 걷혔고, 푸른 하늘과 찬란한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이안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태양을 쳐다보았다.

“응. 언제봐도 아름답네.”

이안은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성검의 자루를 굳게 쥐었다.

자루에서는 이내 빛이 피어올라 검의 형상을 이루었다.

검광.

경건하고 고결하던 이네스의 검광과는 달리 혼탁한 회색이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안의. 이안만의 검광이다.

이 혼탁한 빛은 다른 그 무엇보다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안이 말했다.

“나는 나를 다시 믿기로 했어. 그러니 이번엔 조금 다를 거다.”

악마가 놀라운 표정으로 답했다.

“설마 이런 일이…… 반짝임을 두 번이나 보게 될 줄이야…… 하지만 좋다! 비로소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구나! 와라! 네가 가진 전부를 부딪쳐와라!”

이안이 땅을 박찼다.

악마도 뛰어올랐다.

두 사람은 이내 교차하며 지나갔다.

“…….”

“…….”

둘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악마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반짝임이었다.”

“그래.”

“몇백 년만 더 살아라. 다시 너를 보고 싶구나.”

“그건 별론데.”

악마가 씨익 웃었다. 이내 그의 몸이 손끝에서부터 천천히 소멸하더니, 그의 몸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악마는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어쨌든. 비로소 악마가 사라졌다.

그리고 비로소 싸움이 끝이 났다.

***

스텔이 다시 일어났을 때, 이안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아마도 악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일 터.

하지만 스텔의 관심을 끄는 건 악마의 최후 따위가 아니라, 이안이 어딘가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텔이 물었다.

“……어디, 가?”

“아. 일어났어?”

스텔이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고민하던 이안이 답했다.

“찾아야 할 게 있어서 대륙을 좀 돌아다니게.”

“……찾아야 할 거?”

“응.”

“중요한 거야?”

“응. 아주아주.”

이안은 자루만 남은 성검을 쓰다듬었다.

이네스의 영혼은 또다시 쪼개졌다. 이제는 대체 몇 조각으로 나뉘었는지. 그 위치가 어딘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안은 찾으러 다닐 생각이었다.

설령 평생에 걸쳐 온 대륙을 돌아다녀야 한다고 해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것만이 이네스에게 입은 은혜를 보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은혜 같은 건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안은 다시 한번 이네스를 만나고 싶었다.

이네스와 마주해 못다 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스텔은 그런 이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짧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너…… 그래. 같이 가자.”

말리려던 이안은 스텔의 눈빛을 보고, 그녀의 고집을 꺾는 게 불가하다는 걸 깨달았다.

‘뭐. 여행에 같이 갈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

이안은 바닥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스텔이 그 옆에 앉아 등을 기댔다.

동료들이 일어날 때까지는 이렇게 쉬고 있을 생각이었다.

‘혹시 스텔처럼 같이 가겠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물어봐야겠어. 뭐. 있을 리는 없지만. 그리고 전쟁이 끝났으니 전후처리 같은 것도 신경 써야 하고. 할 게 무지막지하게 많구나.’

싸움이 끝났는데 오히려 머리는 더 복잡해진 기분이다.

문득, 뒤쪽으로 시선을 주니 스텔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이안도 갑자기 수마가 몰려왔다.

눈꺼풀이 내려앉는 걸 억지로 막던 이안은 문득 생각했다.

‘좀 자도 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니 긴장이 탁 풀리며 더는 졸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 햇볕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앞으로 또 어떤 일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모든 걸 잊고, 편하게 쉬고 싶었다.

이안은 이 세계의 뒷골목에 떨어진 지 벌써 수년째 만에. 아니, 어쩌면 그의 온 인생을 통틀어 가장 편안한 잠에 빠져들었다.

이안이 기분 좋게 코 고는 소리가 주위에 퍼져나갔다.

<망겜의 고인물로 살아남기 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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