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 *
천마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옆에 있던 최수영이 내 등을 밀었다.
"오빠, 빨리 가서 말려."
"그래야겠지?"
얼른 몸을 날려 천마와 양위복 사이에 가서 섰다.
"천마 할배, 무슨 일이에요?"
"비켜라, 김수호."
"안 싸우시기로 했잖아요."
"저놈이 먼저 테이블을 내리쳤다."
"말로 해요, 말로."
"말로? 요즘 같이 어울려주니 내가 누군지 잊은 게냐?"
"여기 오면서 저랑 한 약속은요. 무림 만인지상 천마의 약속이 그렇게 가벼운 거였나요?"
"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시 생각하던 천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수영이가 말해 주길 내일 일정에 친선 겨루기가 있더구나."
세계 헌터 만찬 모임의 이튿날 일정은 친선 겨루기였다.
최수영이 그 일정을 천마에게 말해 준 것 같았다.
어쩐지 그렇게 따라오겠다고 떼를 쓰더라니.
"그렇죠."
"그럼 내일 저놈에게 봉술을 좀 가르쳐주도록 하겠다."
이번엔 양위복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당신이 뭔데 우리 가문에 대대로 전수되어 온 오랑팔괘곤의 초식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평하는 것이오! 당장 덤비시오!"
천마가 팡 소리가 나게 소매를 한번 털고 나서 뒷짐을 지었다.
"멍청한 놈. 도움을 주려고 말을 해줘도 못 알아먹는구나. 초식에 내력을 싣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니까. 내 김수호 이놈과 약속한 바가 있어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알려주마."
천마가 먼저 뒤돌아 최수영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마의 뒤통수에 대고 양위복이 소리쳤다.
"좋소! 내일 한번 붙어봅시다!"
천마와 양위복의 작은 소란이 있은 뒤 만찬 모임은 밤늦게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헌터들은 자신의 무용담을 신나게 늘어놓기도 하고, 어느 행성의 몬스터가 가장 강한지 토론하기도 했다. 몇몇 헌터는 나에게 행성 087이 평평하다는 게 정말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화제는 자연스럽게 최강의 헌터는 누구인가로 흘러갔다.
캐나다에서 온 헌터가 말했다.
"프로필 보지 않았습니까. 미국의 리암 소령이야말로 새로운 최강자로 손색이 없지요."
몇몇 헌터가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번엔 터키 헌터가 입을 열었다.
"다들 최근 김수호 헌터의 영상을 안 보신 겁니까? 힘, 체력 강화 수치 같은 걸로 평가할 단계는 이미 넘어선 것 같던데요."
이번에도 다른 헌터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일본 헌터 모토히로 우메오가 의견을 냈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지요. 강화 등급이라는 것도 단순한 수치일 뿐. 정말 누가 강한지는 붙어봐야 알 수도 있습니다."
콩고에서 온 헌터도 우메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4년 전 콩고에 새로 발견된 금광의 소유주라는 소문이 있었다.
"맞습니다. 저는 다른 건 다 빼고 오로지 빠른 속도에 투자했습니다. 리암 헌터의 힘이 10단계까지 강화가 되었든, 김수호 헌터의 검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든 안 맞으면 그만 아닙니까."
독일에서 온 헌터가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하하하. 저는 아픈 게 싫어 내구도에 올인했지요. 하하하."
결국 늦은 밤까지 이어진 토론의 결론은 '붙어봐야 알 수 있다'로 마무리되었다.
다음 날 아침, 헌터들은 여러 대의 검은색 차를 타고 지구방위위원회에서 특별히 마련한 시설로 들어갔다.
나와 최수영은 몇 년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곳이었다.
특수작전국이 있던 그 자리.
당시의 특수작전국은 이제 없어진 건지, 건물은 안 쓴 지 꽤 돼 보였다.
건물 뒤편 넓은 운동장 한쪽엔 편히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 왼편에 마련된 의자에 자유롭게 착석하시면 됩니다.
사회자의 음성과 진행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헌터들은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각국 헌터분들의 친선을 다지고자 하는 자리이니, 과도한 경쟁이나 대결보다는 서로의 실력을 확인하고 응원해 주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헌터들이 모두 자리에 앉을 때쯤, 마이크를 든 사회자가 운동장 가운데로 나왔다.
- 어젯밤 대련 희망 상대를 간단히 조사하였는데요. 첫 번째 순서로 두 분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중국의 양위복 헌터님과…….
양위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헌터는 아니시지만, 무림 행성에서 오신 천마 님의 대련이 있겠습니다.
천마가 천천히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운동장 중앙에 두 무사가 마주 보고 섰다.
양위복은 N마켓에서 구매한 기다란 봉을 들고 있었고, 천마는 맨손이었다.
"무기를 드시오. 저쪽에 마련되어 있지 않소."
양위복이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 검, 창, 봉 등 다양한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필요 없다. 어디 그 오랑팔괘곤인가 뭔가 하는 무술의 초식을 펼쳐보아라."
"무림에서 넘어온 자들이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으나, 당신은 정말 도가 지나치군."
"오만하게 굴 만하니 그러는 것이다."
붕. 붕.
양위복이 온몸을 이용해 봉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봉이 회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며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던 소리가 차츰 날카로워졌다.
천마를 아주 쉽게 보지는 않았는지, 봉을 회전시키며 양위복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천마에게 다가갔다.
지구방위위원회의 예측에 따르면 '힘, 체력'과 '운동 신경'을 7단계까지 올린 양위복이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강화 내역 대로라면 라울과 비슷한 실력.
붕.
봉의 가운데를 잡고 빙빙 돌리던 양위복이 순간적으로 봉 끝을 잡고 천마를 향해 크게 휘둘렀다.
자신의 리치와 천마와의 거리를 정확히 계산한 공격이었다.
텁.
천마가 왼손을 옆으로 뻗어 양위복의 봉을 그대로 잡아버렸다.
"이것 보아라. 회전으로 봉의 속도를 높일 것이면 사각에서 들어오든가, 아니면 봉에 내력을 더 실어 막아낼 수 없게 해야 할 것 아니냐."
당황한 양위복이 급히 봉을 뒤로 빼내었다.
"닥쳐라!"
이번엔 봉을 회전시키지 않고 길게 찔러 들어왔다.
천마의 명치를 노리는 정확한 일격. 천마는 몸을 옆으로 틀어 양위복의 봉 끝을 가볍게 피해 냈다.
"보법도 틀렸다. 엄지발가락의 방향이 네가 뭘 할지를 다 알려주고 있지 않으냐. 천마신교의 어린 제자들도 네놈 발끝만 보고 있으면 그 봉술을 전부 피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순간 오른쪽으로 반쯤 돌려져 있던 천마의 몸이 다시 양위복을 향했다.
양위복은 다급히 봉을 다시 회수하여 들어 천마의 공격에 대비했다.
천마가 오른발을 대각선으로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무기가 없는 천마는 적어도 두 보는 더 나아가야 양위복에게 닿을 수 있었다.
다시 왼발이 대각선으로 한 보. 다음 걸음과 동시에 천마의 공격이 들어올 것은 자명했다.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 봉술의 이점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양위복은 봉을 짧게 휘두르며 뒤로 빠졌다.
퍼억!
천마의 손바닥이 양위복의 복부를 강타했다.
"크헉!"
양위복이 뒤로 몇 발짝이나 밀려나며 한 손으로 복부를 움켜쥐었다.
무릎이 덜덜 떨리는 걸 보니 다리가 풀릴 뻔한 걸 겨우 버텨낸 모양이었다.
"이것이 보법이고 변초이다. 네놈은 다음 내 오른발이 뻗어지면서 공격이 들어올 줄 알고 대비했겠지. 아마 얻어맞기 직전까지 내 손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내가 빨라서가 아니다. 네놈이 잘못 예측했기 때문이다."
양위복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천마를 노려보았다.
"발등에 힘을 주며 회전 공격을 하고, 발가락에 힘을 주며 찌르기 공격을 하면 그걸 누가 맞아주겠느냐. 다시 해보아라."
겨우 숨을 고른 양위복이 다시 봉을 천천히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천마와의 거리는 10미터.
봉 길이와 팔 길이를 합하면 3미터.
천마에게 봉 끝이 닿기까지 일반 보폭으로는 일곱 보, 큰 걸음으로는 네 보.
양위복이 보폭을 달리하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천마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허, 그놈. 어제는 고집불통인 줄 알았더니 그래도 말은 금방금방 알아듣는구나."
퍽.
퍼억.
그 뒤로도 양위복은 정확히 한 합에 한 대씩 천마에게 얻어맞았다.
그렇게 스무 합 정도가 지나고, 봉을 지팡이 삼아 겨우 서 있던 양위복이 지팡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겨우 천마를 마주 보고 선 그는 천마에게 포권을 취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더 배우고 싶지만 미천한 두 다리가 이제는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천마가 뒷짐을 지고 말했다.
"그 봉술과 초식은 엉망이지만 네놈 움직임과 습득력은 제법이구나. 더 배우고 싶거든 언제든지 찾아와라."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디로 찾아뵈면 되겠습니까?"
"강화도 게스트하우스로 오너라."
의아한 표정의 양위복을 뒤로한 채 천마는 나와 최수영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어떠냐, 김수호. 싸우지 않았지?"
"성질 많이 죽으셨네요. 천마 할배."
"뭐, 인마?"
"칭찬입니다."
"건방진 놈!"
자리에 앉은 천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독종 같은 천마신교 놈들만 보다가 저런 순진한 놈을 보니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좋구나."
"저 헌터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네가 나중에 저놈한테 그 전화인가 뭔가를 한번 해라."
"해서요?"
"소맥 먹으러 오라고 해."
다시 사회자의 음성이 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 멋진 대결이었습니다. 다음은, 일본의 모토히로 우메오 헌터님이 신청하신 대련입니다. 김수호 헌터님, 우메오 헌터님과의 대련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대련은 무슨. 나는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애들도 아니고 누가 센지 겨뤄서 뭐 얻을 게 있다는 건지.
테라 행성과 무림에서도 수많은 대련 제의를 받았지만 거의 응해 주지 않았었다. 정말 지독하게도 따라다니던 그 소림 땡중과의 대련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무공 이름이 금강불괴였던가.
사회자를 향해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 앉아 있는데, 최수영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오빠 뭐 해? 왜 안 나가?"
"뭘? 대련을? 그런 걸 뭐 하러 해."
"신청한 사람이 우메오라잖아. 감히 내 남자 친구를 무시한 놈."
"그건 네가 어제 다 갚아줬잖아. 몇 배로 갚아주던데?"
"그랬지. 근데 정신 못 차리고 또 저렇게 도전하잖아. 빨리 나가. 혼내주고 와."
"꼭 나가야 해?"
"당연하지. 감히 내 남자를 무시해? 오빠가 안 나가면 내가 나가."
우메오는 이미 일어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두 헌터님은 운동장 가운데로 나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마그네타 검을 풀어 의자에 기대놓고 걸어 나갔다.
우메오는 N마켓에서 산 자신의 카타나를 허리춤에 찬 채였다.
운동장 가운데 서자 우메오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검을 드시오."
나는 운동장 끝 무기가 세워져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길고 곧게 생긴 검 하나가 날아와 내 손에 빨려 들어왔다.
검이 있던 곳과 나와의 거리는 100여 미터.
처음에 염동력 장갑은 10미터 안팎의 물건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훨씬 먼 거리에 있는 물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검기를 발현할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염동력 장갑에 내력을 밀어 넣어보니 가능해진 일이었다.
"영상에서 본대로 잔기술은 대단하시군. 김수호 헌터."
우메오가 또 빈정대기 시작했다.
천성인 모양이다.
나는 대답 없이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잘 벼려진 은빛 검신이 햇빛을 반사했다.
우메오는 아직 무기를 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나를 노려보고 서 있던 그는 무릎을 살짝 굽히더니 몸을 왼쪽으로 틀었다.
오른손이 천천히 일본도 손잡이 위에 올려졌다. 하지만 아직 뽑지는 않은 채였다. 어렸을 때 일본 만화책에서 본 자세 그대로였다.
발도술(抜刀術).
틱.
우메오의 엄지손가락이 검막이를 조금 밀어 올렸다.
스윽.
뒤이어 오른발이 바닥을 쓸었다. 멈춰선 발끝은 정확히 내 오른쪽 허리를 향하고 있었다. 우메오의 기운이 허리와 오른팔에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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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63,911개]
[단가 64억 원]
[평가 금액 409조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