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 * *
며칠 후, 강화도.
오전엔 레온이 준 마법 서류를 훑어보았다.
다수의 적을 유용하게 상대할 수 있는 불 속성 마법, 실드를 응용해 적을 잠시 가둬버릴 수 있는 활용법, 단순한 짐승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정신 마법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투에 쓸 수 있을 법한 기존의 마법 외에도 레온이 고민해서 연구한 응용법도 많이 적혀 있었다.
전체적으로 다 훑어봤으니 몇 가지는 본격적으로 연습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엔 천마 게스트하우스에 찾아갔다.
이혁진 실장의 말대로 천마의 제자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천마와의 대화를 통해 내력을 더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알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문득 어젯밤에 꾸었던 꿈이 떠올랐다.
"나의 제자가 되겠다고? 껄껄껄. 네놈이 드디어 이 천마 님의 발아래 있음을 인정하는구나."
천마는 이런 대사를 던지며 바닥에 엎드려있는 내 어깨 위에 자기 발을 얹고 껄껄대고 있었다.
나는 거세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젯밤 꿈 생각을 떨쳐버렸다.
절대 천마의 제자가 될 수는 없어.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서자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근수와 정성민이 보였다.
"김수호 왔느냐?"
그들 뒤를 서성이던 천마가 나를 먼저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네, 천마 할배가 빼간 우리 직원들이 잘 있나 확인차 왔지요."
"뭐? 빼가? 이 두 놈은 무림인 전체가 그토록 갈구하는 기연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나 천마에게 내공심법을 배우다니."
사실 놀라웠다.
이곳으로 불려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두 디펜서 몸속의 기운이 단전으로 제법 모여들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천마의 대화를 들었는지 이근수의 기운이 잠시 흐트러졌다.
따악!
동시에 천마가 들고 있던 나뭇가지가 이근수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집중하라 했다!"
이번엔 정성민의 기운이 흐트러졌다.
짜악.
"네놈들은 언제까지 옆의 놈이 얻어맞을 때마다 내공을 흐트러뜨릴 셈이냐! 꼭 둘이 같이 얻어맞아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천마 할배, 지금이 때가 어느 땐데 사람을 때려가며 가르쳐요."
"아무것도 모르면 구경이나 하거라. 때리는 것이 아니라 제일 취약한 혈도를 자극하는 것이다."
나는 천마와 잡담을 나누면서 주변의 마나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두 디펜서의 몸속 내력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그렇게 대화하고 있었는데, 다섯 보 정도 떨어져 있던 천마가 갑자기 한걸음에 내 앞으로 다가왔다.
천마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얼굴을 내 앞에 들이대었다.
"뭐, 뭐예요? 갑자기."
"네놈도 내 제자가 되고 싶은 게냐?"
"무슨 소리예요, 그게?"
"네놈 몸속에 있는 그 내공 말이다. 강대하지만 어지럽게 흐트러진 그 특이한 내공. 그걸 다듬어보고 싶은 것이 아니더냐?"
"아니요? 저는 지금도 내력이 차고 넘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돈데요?"
"그럼 왜 저 두 놈의 몸속을 뭐 그렇게 열심히 관조(觀照)하고 있는 것이냐?"
소름 돋는 할배 같으니.
"우, 우리 직원들에게 몹쓸 짓을 하고 계신 건 아닌가 살펴보는 중입니다!"
천마가 다시 천천히 물러섰다.
"그으래? 알겠다. 나중에 마음 변하면 찾아오너라. 저 두 놈은 평생이 걸릴지 몰라도, 김수호 네놈은 나한테 잘 배우기만 한다면 얼마 안 가 생사현관도 타통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사이비 같은 무공을 배우고 싶대요?"
순간 천마의 오른손이 사냥감을 노리는 독수리 발과 같은 모양을 하고 내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나는 다급히 왼손을 들어 천마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뻗어 들어오는 천마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는데, 천마의 출수가 워낙 빨라 팔꿈치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내 목을 움켜쥐려던 천마의 손은 불과 십 센티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천마와 나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뭐 하는 짓입니까."
"어린놈이 무공은 강한데 하는 짓이 귀여워 봐주었더니,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여기서 더 건드리시면 저에게도 더 이상 노인 공경은 없습니다."
"말은 멋대로 내뱉어도 예의가 있는 놈인 줄 알았더니. 네놈이 이 사이비 같은 무공에 사지가 찢겨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었구나."
아차.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갑자기 제자 운운하며 몰아붙이길래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실수했다.
천마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무공에 대한 자긍심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 말은 제가 실수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천마."
천천히 천마의 팔꿈치를 잡은 왼손의 힘을 풀어보았다.
다행히 천마의 독수리 발톱 같은 손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이번만 넘어가 주겠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나와 생사결을 펼치게 될 것이다."
생사결을 운운하는 이 노인은 귀마왕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 직원들을 지켜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천마가 없었더라면 수백의 직원들이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 어쩌면 거기엔 최수영까지 포함되었을 수 있다.
나는 결단코 천마와 싸우거나 척질 생각은 없었다.
"제가 말은 한 번씩 이렇게 해도 천마 할배 존경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저는 싸울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조심하거라."
다시 뒷짐을 진 천마가 천천히 두 제자에게로 돌아갔다.
지이잉.
진동 소리에 휴대폰을 꺼내 보자 레온에게 톡이 와있었다.
[형! 뉴스 봤어요?]
[무슨 뉴스?]
[중국 최대 헌터 기업 주하이의 헌터들이 전멸했대요!]
[전멸? 거긴 등록된 헌터만 200명이 넘는 회사 아니야?]
[하얼빈에서 최초 목격된 몬스터인데, 베이징에서 주하이의 헌터들하고 붙었나 봐요. 여기 링크요.]
[n.news.naber.com/article/051/00082673452?sid=207]
레온이 보내준 링크를 눌러보았다.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몬스터와 전투를 벌이던 주하이 헌터 전원 사망.'
선양시에 출몰한 몬스터를 잡기 위해 주하이의 헌터 전원이 출동했으나 모두 돌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며칠 전 인적 드문 산에서 발견됐을 때는 군에서 폭격을 퍼부었는데도 해치우지 못했다는 내용도 함께 적혀 있었다.
기사를 다 볼 때쯤 레온에게 전화가 왔다.
"응, 레온아. 기사 봤어. 이거 혹시 우리가 아는 그 메두사인가?"
- 아니요. 지금 행성 087의 시점에서 보면, 메두사는 이미 오래전에 페르세우스에게 죽었어요.
"그래? 그럼 이건 뭐지? 사람을 돌로 만들고, 폭격을 맞고도 안 죽어?"
- 아마 스테노나 에우리알레가 아닐까 싶어요.
"그건 또 누구야?"
- 메두사의 언니들이요. 신화에 잠깐 등장해요. 자신들을 해치우려 찾아오는 영웅들을 모두 돌로 만들었을 뿐, 큰 말썽은 피우지 않아 이름만 잠깐 나오는 정도예요.
"그런 무시무시한 괴물이 셋이나 있었어? 그럼 해치우려면 눈 감고 목을 베어버려야 하나?"
- 신화 속 괴물과 일치한다면 문제가 훨씬 심각해요.
"뭔데?"
- 신화에 의하면, 메두사를 제외한 두 언니는 불사의 몸이에요. 영웅 페르세우스도 그래서 막내 메두사의 목만 겨우 치고 달아난 거고요.
"불사의 몸?"
- 네. 테라 행성의 그 불사인과는 전혀 다른 의미예요. 신화에는 아예 죽일 수 없는 존재로 묘사돼요."
"아예 죽일 수가 없어?"
어느새 천마가 옆에 다가와 내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천마가 물었다.
"불사의 몸?"
나는 전화를 끊고 천마에게 답했다.
"아, 들으셨어요? 중국에 몬스터 하나가 나타났는데, 레온이 읽은 신화에 의하면 죽일 수 없는 불사의 몸이래요."
"그래? 강하다더냐?"
"그런가 봐요.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된대요."
"허허, 요물이로군. 그럼 눈을 감고 가서 두드려 팬 다음 꽁꽁 묶어 놓으면 되지 않느냐."
"뭐, 중국에서 어떻게든 하겠죠."
"그런데 중국이면 그 봉술을 쓰던 양위복이 사는 곳 아니냐?"
"네, 맞아요. 무림인들과 비슷한 언어를 쓰는 곳이요."
"양위복 그놈은 잘 지내고 있나?"
* * *
랴오닝성 서부 사막화 지대.
스테노의 머리 위로 요란한 소리를 내는 폭격기 몇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또 저거네? 엄청 시끄럽게 날아다니는 새들. 안에는 인간이 타고 있었지, 참."
며칠 전, 대포알을 퍼부으며 하도 귀찮게 하길래 가까이 날아올라 봤더니 안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스테노와 눈이 마주친 파일럿은 그대로 돌이 되었다.
"오늘도 폭탄을 떨어뜨리려고 왔나?"
폭격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스테노의 머리 위로 온갖 포탄이 떨어져 내렸다.
쾅! 콰앙!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땅이 파이고 바위가 터져나갔다.
스테노가 서 있던 땅은 유성이라도 떨어진 듯 거대한 분화구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에이, 정말. 먼지 날리게."
거대한 분화구 한가운데는 스테노가 그대로 서서 손등으로 코를 막고 서 있었다.
"여기 인간들은 엄청난 걸 타고 다니네. 에우리올레와 살던 언덕에 이놈들이 나타나면 언덕이 엉망이 되겠어."
주변 지형이 완전히 뒤집힐 폭격이었지만 스테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더 걸었을까. 이번엔 자동차 한 대가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왔다.
100여 미터를 남기고 선 자동차에서 긴 봉을 들고 하늘색 장삼을 입은 사내가 내렸다.
중국 대표 헌터 양위복이었다.
양위복은 소매에서 넓고 긴 끈을 꺼내 자기 눈동자 위에 동여맸다. 양위복은 눈을 가린 채 차분히 스테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잠시 후, 양위복의 입에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이런 제길. 도대체 기운이 느껴지질 않는군."
그때였다. 스테노가 황금빛 날개를 펼쳐 양위복에게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날개가 퍼덕이는 소리에 양위복이 자리에 멈춰 서 봉을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봉을 붕붕 돌리고 있는 양위복의 앞에 스테노가 내려섰다.
"야! 너 나랑 같은 말을 하네?"
양위복이 가지고 있는 동시통역기의 영향이었다.
갑작스러운 스테노의 물음에 양위복이 답했다.
"괴물, 덤벼라."
스테노의 눈살이 구겨졌다. 하지만 양위복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몇천 번을 들어도 지겨운 그 대사. 그래도 그리스어로 들으니 반갑네."
양위복이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있는 힘껏 봉을 휘둘렀다.
퍼억.
양위복의 봉이 스테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사막 먼지를 뒤집어쓴 스테노의 몸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뿐. 스테노는 허리에 닿아 있는 양위복의 봉을 신경질적으로 밀어버렸다.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한 행동.
"성질나게 하지 마. 이것저것 물어볼 게 많으니까."
스테노가 다시 천천히 양위복에게 다가왔다.
"여긴 어디야? 내가 튕겨 나온 그 구멍에 대해 아는 거 있어?"
그제야 양위복도 스테노의 물음에 대답해 주기 시작했다.
"게이트 말하는 것이냐?"
"게이트? 그게 게이트라는 거야? 뭐 천천히 가도 되긴 하는데,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해?"
"못 돌아간다, 괴물. 내가 오늘 너 때문에 돌이 되어버린 중국인들의 넋을 풀어줄 것이다."
양위복이 다시 한번 스테노를 향해 봉을 휘둘렀다.
이번엔 스테노도 그냥 맞아주진 않았다.
양위복의 봉과 스테노의 청동 팔이 부딪쳤다.
까앙!
스테노는 이번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고, 양위복의 봉만 반대로 튕겨 나갈 뿐이었다.
스테노가 말했다.
"소용없어. 네가 아무리 애를 써도 내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어."
양위복이 이번엔 봉을 찔러 들어갔다.
눈을 가리고 있는 탓에 공격이 정교하지는 못했다.
스테노는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라 양위복의 봉을 피해 냈다.
"하지만 난 너한테 가서 그 눈가리개만 벗기면 돼. 그 정돈 일도 아니라고. 더 마음에 안 들면 죽을 때까지 패줄 수도 있고."
날개를 두어 차례 더 퍼덕인 스테노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내 머리카락들이 널 물 수도 있어. 얘네들은 독은 없지만, 항상 배가 고프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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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33,961개]
[단가 66억 원]
[평가 금액 224조 1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