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 귀자마모 】
무당산을 내려온 이후 주둔지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갈세가의 담장 안에 주둔지가 원활히 지어지고 있었고, 제갈세가는 약속대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매일 저녁 사령부 인원들을 내원으로 초대해 제공하는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식재료에 돈을 아낄 계획은 애초에 없는 건지 인근 여러 지방의 산해진미가 한 번도 겹치지 않고 메인 메뉴로 나왔다.
식사 자리에 초대된 공병대대 장교에게 제갈명 가주가 물었다.
“아니! 이 조그만 것에서 정녕 이런 밝은 빛이 나온다는 말입니까?”
자기가 발명한 것도 아닌데 장교는 마치 자기 발명품인 양 뿌듯한 표정을 하고 LED의 불을 껐다 켰다 해 보였다.
“그렇습니다. LED 패널은 넉넉하게 가져왔으니 제갈세가의 건물 곳곳에도 설치해 드리겠습니다. 전기도 많이 먹지 않으니 지금 설치 중인 태양광 발전기로도 충분할 겁니다.”
제갈세가가 무림에서 처음으로 전기의 혜택을 받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공병대대 장교에게 물었다.
“전신주를 좀 설치해서 무당산 위에도 전기를 조금이나마 공급할 수 있을까요? LED는 전기 진짜 조금 먹는다면서요.”
“가능은 합니다만, 무당파와는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습니까?”
“이제 좋아지도록 해야죠. 무당파, 제갈세가, 지구 재외공관 이렇게 셋이 힘을 하나로 합치면 나중에 호북성이 전 무림을 호령하게 될지도 모르죠. 그럼 지구인들도 더 안전하게 지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돌아가서 논의해 본 후 김 헌터님 말씀대로 진행해 보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기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주 제갈명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입신의 경지에 드신 무인께서 우리 제갈세가를 살려주신 것도 모자라 이렇게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 좀 제발 그만하시라니까요.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매일 감사 인사십니까.”
“이런 기연이 있을 수 있나 싶어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그렇습니다. 하하하.”
커다란 오리 한 마리를 혼자 다 먹은 스테노가 그제야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번 여행은 지루하긴 한데 음식은 마음에 들어.”
최수영이 스테노를 돌아보았다.
“언니는 살 안 쪄서 좋겠다. 여기 음식 맛있긴 한데 너무 기름져. 이러다 나는 살찔 것 같아. 빨리 다음 행성으로 가야겠어.”
식사를 마친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역시 제갈세가에서 내어준 고급스러운 객방을 사용했다.
나는 간단히 목욕한 후 침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1층 응접실에서 휴식을 취했다.
한참 후, 오랜 시간 따뜻한 물로 목욕했는지 젖은 머리와 온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최수영과 스테노가 나에게 다가왔다.
“아, 따뜻한 나무 욕조에서 샤워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내일부터는 다시 노숙자 신세야. 오빠는 금방 씻고 나왔네?”
“나야 뭐, 오래 걸릴 일 없지.”
“잘됐다. 거기 좀 앉아 있어. 나 방에 가서 화장품 가져올게. 오빠도 발라.”
최수영이 종종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내 맞은편에 앉아 젖은 머리를 털고 있는 스테노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다시 여행 시작이니 좋겠네, 스테노.”
“응, 좋아. 그런데 사실 이젠 딱히 여행을 돌아다니지 않더라도 그냥 너희들이랑 지내는 게 좋아졌어. 너희들이랑 있으면 다른 사람들도 계속 만날 수 있으니 지루하지도 않고. 고마워, 김수호.”
“갑자기 낯간지럽게 왜 그래.”
스테노가 VR 선글라스를 톡톡 치며 대답했다.
“다 네 덕분이잖아. 이렇게 여행도 하고, 많은 사람도 만나고.”
“그 선글라스야 네가 지구인을 다 돌로 만들어버릴까 봐 억지로 씌워 놓은 거지.”
“그래? 여긴 지구도 아닌데 그럼 벗어?”
“나까지 돌로 만들어버릴 셈이야?”
“그럴 리가. 너랑 수영이는 내 제일 소중한 친구인걸. 그리고 전에 했던 그 말은 이제 취소야.”
“무슨 말?”
“네가 날 배신하면 널 제외한 모든 지구인을 돌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말.”
“아, 처음 만났을 때 나 믿고 한국 가자고 했을 때 네가 말했던 거?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어? …아니지. 그전에, 그 말 진심이었어?”
“응. 진심이었는데? 그런데 이제 취소야. 이제는 네가 날 배신하더라도 난 너에게 해를 끼칠 일은 하지 않을 거야.”
“오늘따라 왜 이러신대, 스테노 양?”
“사랑 고백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만큼 널 만나기 전의 내 삶이 지루했다는 얘기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내가 몇 년이나 살았는지 알아?”
“나는 모르지.”
“나도 몰라. 아무튼 오래 살았어. 그런데 그 평생의 시간을 합친 것보다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이 시간이 나한테 훨씬 의미 있어.”
그때 최수영이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나 빼고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진지하게 해?”
“스테노가 지구인을 전부 돌로 만들려는 계획을 철회하겠대.”
“응? 오빠, 그게 무슨 말이야? 언니, 그런 계획이 있었어?”
스테노가 환하게 웃었다.
“아니야. 이제 없어, 그런 계획. 사실 없어진 지 한참 됐어.”
“언니도 이리 와. 영양 크림 좀 발라.”
이미 내 옆에 앉아 내 얼굴에 두 번째 화장품을 바르고 있는 최수영에게 말했다.
“수영아, 스테노는 영양 크림 같은 거 필요 없을걸? 피부도 늙지 않아.”
“아, 맞네. 와, 부럽다.”
스테노는 얼른 최수영 옆에 앉았다.
“아니야, 나도 그거 발라 줘.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부러워.”
* * *
다음날 일찍 제3, 4, 5 부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호북성을 떠나 천마신교가 있는 신장을 향해 출발했다.
신장을 향해 가고 있긴 하지만 목적지가 딱히 천마신교는 아니었다.
레이더와 드론으로 블랙 게이트를 찾으며 행군하다가 적당한 게이트가 나오면 다시 행성 이동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굳이 서북쪽을 향하고 있는 이유는 만약 천산에 도착할 때까지 마땅한 블랙 게이트를 못 찾으면 그땐 천마신교에 잠시 들르기 위함이었다.
우리 셋은 언제나처럼 전술차 지붕에 앉아 여행을 시작했다.
길 오른쪽에는 커다란 강이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천마신교까지 얼마나 걸릴까?”
“글쎄. 대열이 길어 빨리 달리지는 못하니까 일주일은 넘게 걸릴 것 같은데?”
“그럼 그 전에 블랙 게이트가 발견될 확률이 높겠네.”
“아마 그렇겠지. 오랜만에 장로들을 한번 보고 싶긴 하지만 주둔지 건설이 우선이니까. 나중에 따로 한번 오든지 하자.”
“그땐 이근수, 정성민 팀장도 같이 오면 좋겠다. 그 두 명이 성장한 걸 보면 장로들도 깜짝 놀랄 텐데.”
“그러게. 하하하.”
최수영이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는 스테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언니, 아까부터 왜 그렇게 강을 뚫어져라 보고 있어요?”
“응? 아, 응. 뭘 잠깐 본 것 같은데, 잘못 본 것 같기도 하고.”
“뭘 봤는데요?”
“별거 아니야. 제대로 보면 그때 말해 줄게.”
“스테노도 봤구나?”
둘의 대화를 듣다가 무심코 던진 내 물음에 스테노가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수호! 너도 봤어?”
“정확히 말하면 봤다기보단, 느꼈어. 뭔가 좀 이질적인 기운을. 인간도 몬스터도 아니던데.”
“수호도 느꼈다면 내가 잘못 본 게 아닌가 보네.”
“뭘 봤는데 그래, 스테노?”
“바다의 님프, 세이렌.”
“세이렌? 스테노 고향 행성에나 있는 종족 아니야? 선원들을 유혹해서 배를 뒤집는 그 님프?”
“맞아.”
“그런데 왜 여기 나타났지? 게다가 금방 멀리 사라져버렸어.”
“나도 모르겠어.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랄 뿐이야.”
“어떤 예상?”
“뭐, 포세이돈이 보냈다든가 하는 그런 예상.”
* * *
행성 087.
바다의 중심, 가장 깊은 곳.
세이렌 몇이 안절부절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앞에는 거대한 청동 의자에 바다처럼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신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세이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었다.
“카리브디스가 돌이 된 걸 확인하고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직도 스테노를 찾지 못하였는가!”
“죄송합니다, 포세이돈 님. 모든 세이렌들이 차원 관문을 넘어 이곳저곳을 뒤지고 있습니다. 곧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에우리알레는? 잘 감시하고 있느냐!”
“네. 전과 다름없이 서쪽 끝 황금 사과 정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우애가 제법 깊은 자매들이니 돌아온다면 그곳에 먼저 들를 것이다. 잘 감시하도록 해라.”
“네, 포세이돈 님.”
“한 달 더 주겠다. 그 안에 스테노를 반드시 찾아내라.”
“차원 관문이 어디로 연결되었는지 알 수가 없고 또 어떤 차원의 행성은 너무 넓어 찾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핑계는 필요 없다! 한 달 안에 행방을 알아 오지 못하면 내 이번엔 정말로 너희를 멸족시켜 버릴 것이다.”
* * *
며칠 후, 행성 049(무림) 감숙성(甘肅省) 어느 숲길.
치익―
무전기로 제3 부대 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북쪽 150킬로미터 지점 A급 블랙 게이트 발견. 게이트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드디어 블랙 게이트 찾았나 보다!”
“그러네. 그래도 꽤 많이 왔는데 천마신교에는 결국 못 들르겠다.”
“다음은 어느 행성이려나?”
“지구나 공룡 행성이 아니기만 바라야지. 자꾸 갔던 데 또 가면 재외공관 다 설치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되니까.”
“그래도 어느새 두 개나 설치했네.”
스테노가 물었다.
“수호, 이번에 도착했으면 하는 행성은 어디야?”
“나? 음… 행성 094면 좋겠어. 몬스터가 가장 많은 곳.”
“왜?”
“거기 몬스터들은 주로 정해진 영역에서 활동하거든. 그러니까 주둔지를 설치하려면 그 일대 몬스터를 전부 잡아야 할 거야.”
“뭐야. 그럼 거긴 번거로운 곳이잖아.”
“응. 그렇긴 한데, 거기서 본격적으로 채굴을 좀 해볼까 하고. 후지로랑 싸울 때 코인이 너무 많이 줄었거든.”
“이미 충분히 강하고 돈도 많은 거 아니야?”
“또 언제 어떤 강자를 만날지 모르니까. 대비는 해둬야지.”
스테노와 나의 대화를 듣던 최수영이 어깨를 움츠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으… 채굴도 좋지만 난 거기 싫어. 거기 몬스터는 너무 징그러워. 몸에서 나오는 그 찐득한 진액도 너무 싫고.”
해가 넘어가고 어둑한 밤이 되어서야 우리는 A급 블랙 게이트에 도착했다.
제3 부대를 시작으로 기다란 행렬이 블랙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며 게이트를 통과하했다.
그런데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전쟁터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부서진 전차들이 나뒹굴었고, 남은 전차들은 맹렬한 포격을 퍼붓고 있었다.
먼저 빠져나온 전차 부대는 아직 제대로 대열을 갖추지도 못하고 있었다.
포격이 퍼부어지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크고 작은 마물이 까마득하게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뒤편 언덕까지 가득 찬 게 수만 마리는 되어 보였다.
귀마왕과 함께 지구를 침략해 왔던 마물 숫자보다 수백 배는 많아 보였다.
키가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마물, 인간보다도 작은 마물, 공처럼 뚱뚱한 마물, 그리고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는 마물까지.
“이거 아무래도…….”
“행성 094 마물들 본거지에 떨어진 것 같지?”
“그런 것 같다.”
우리 쪽 화력도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마물의 수가 너무 많았다.
쏟아지는 포화를 뚫고 계속해서 마물들이 우리 진영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콰과과과!
우리 진영 너머로 쏘아낸 대천흑룡이 근처에 있던 마물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퉁.
당겨졌던 시위가 풀리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최수영의 손에서도 여러 발의 화살이 동시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쾅, 콰앙!
폭약이 장치된 화살이 마물들 복판에 떨어지며 폭발했다.
* * *
5월 9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9,77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65조 5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