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에페이로스 왕국 】
검은 구름은 점점 속도를 높여가며 마그네타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미 몸통과 분리된 귀자마모의 머리통이 쉰 소리를 내었다.
“어… 어떻게. 태초의 마기가… 한낱 인간에게…….”
잠시 후 검은 구름이 모두 마그네타 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인간… 에게 귀속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저 검… 저 검에 귀속…….”
생명력이 다했는지 귀자마모의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쿤쿠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검은 구름이 그 검에 다 빨려 들어갔네요?”
“그러게요. 검을 든 느낌이 좀 묵직해진 것 같기도 하고. 이게 무슨 일인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검기나 그 대천흑룡인가 하는 걸 쏘아 보시죠?”
“그럴까요.”
귀자마모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건지 아직 남은 마물들은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우선 검기부터.
촤악.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쏘아져 나간 검기는 범위 안에 닿는 마물들의 몸을 사정없이 가르고 지나갔다.
“이건 다르지 않군요.”
다음은 대천흑룡.
콰과과과.
대천흑룡 역시 그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물들을 부숴버리며 지나갔다.
“딱히 달라진 건 없네요?”
“그런가요? 분명 엄청난 힘을 가진 무언가였을 텐데요, 김 헌터님.”
“귀자마모는 그 검은 구름이 태초부터 있던 마족의 힘이라고 했어요.”
“담긴 스토리도 뭔가 화려한 힘이군요.”
그때 최수영과 스테노가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오빠?”
“보다시피, 두 헌터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귀자마모를 처리할 수 있었지.”
“아니, 그거 말고. 그 검은 구름 같은 거.”
“나도 모르겠어. 마그네타 검에 완전히 다 빨려들어 갔어. 그래서 뭐가 달라진 게 있나 하고 검을 써봤는데 딱히 달라진 건 없네.”
“그래? 아무튼 뭐 오빠 몸 이상해지고 그런 건 없지? 마물의 힘이잖아.”
“응. 지금은 괜찮은 거 같아.”
“다행이다. 그럼 됐어.”
“수영아, 마쿤쿠 헌터님. 그럼 남은 마물들 채굴 좀 마저 할까요?”
“그러시죠. 하하하. 저 오늘 채굴 제일 많이 한 날입니다.”
“그건 저도 그래요.”
휴대폰을 꺼내 보자 오늘만 14만 코인이 넘게 채굴되어 있었다.
평가 금액은… 1,000조 원이 넘어갔다. 물론 뭐 이제 매도해서 현금화를 할 계획은 없으니 평가 금액은 크게 중요하지 않긴 했다.
채굴 세부 내역을 보니 일반 마물들은 마리당 10코인. 그리고 50코인이 열두 번 채굴된 걸 보니 이건 십이호마인가 하는 대장급 마물에게서 채굴된 것 같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자마모는 1만 코인.
예전에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신급 몬스터 카리브디스를 몇 번 공격한 것만으로 1,300코인이 채굴되었던 걸 보면 귀자마모도 그 정도 급의 채굴량을 가진 모양이었다.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최수영과 마쿤쿠가 도와줘서 손쉽게 해치울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혼자 절대 못 이길 상대는 또 아니었다.
그런데도 1만 코인이라니.
마족이 예전엔 신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했으니 그때를 기준으로 채굴 등급이 나눠진 걸까.
우선 카리브디스와 비교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지금 그때보다 훨씬 강해지긴 했지만, 그때 카리브디스를 상대했을 땐 스테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길 수 있었을지도 확실하지 않았던 상황.
“마쿤쿠, 수영아. 채굴 세부 내역 좀 확인해 주세요. 귀자마모에게 얻은 코인이 몇 개나 되나요?”
마쿤쿠가 물었다.
“제가 죽이지 않았는데도 채굴이 되나요?”
“예전에 신급 몬스터랑 싸울 때 보니 등급이 높은 상대는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때 최수영이 외쳤다.
“오! 나 400코인 따로 들어온 게 하나 있네. 이게 귀자마모한테 화살 쏴서 받은 건가 봐.”
마쿤쿠도 확인을 마치고 대답했다.
“저도요. 저는 600코인이 들어왔습니다.”
이들이 귀자마모를 공격한 건 불과 몇 번. 게다가 별 타격도 주지 못할 정도의 공격이었다.
대충 카리브디스와 귀자마모가 동급 정도는 된다는 얘기가 되었다.
신급 중엔 귀자마모가 약한 건지, 카리브디스와 싸울 때 비해 내가 생각보다 많이 강해진 건지 판단이 쉽지는 않았다.
일단 우리는 다른 헌터들과 함께 남은 마물을 모두 처리했다.
구심점과 전의를 잃은 마물들을 모두 처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령부와의 회의를 통해 이곳에 주둔지 설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마물들이 워낙 밀집해 있던 터라 드론으로 꽤 멀리까지 정찰을 보내 보아도 몬스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뜻밖의 마물 집결지로 이동해 오는 바람에 시작은 순탄치 않았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몬스터는 얼씬도 하지 않을 장소를 찾게 된 것이다.
* * *
다음 날, 사령부 회의 막사.
이번 행성에서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제3 부대장 말론 대령이 말했다.
“어제 전투에서 파괴된 전차가 총 일곱 대, 장갑차가 여섯 대입니다. 본격적으로 제3 부대에서 주둔지를 설치하기 전 전력 재배치가 필요합니다. 잃은 장비와 병력 대부분이 가장 앞서 게이트를 빠져나온 제3 대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제5 부대장 박현준 중령이 답했다.
“말론 사령관님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제5 부대에서 전차 두 대와 장갑차 두 대를 포함한 일부 병력을 이곳 행성 094에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제4 부대장도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얼굴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력 재배치 약속을 다 받은 말론 대령이 이번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김수호 헌터님 덕분에 저 많은 마물들과 그… 마물의 어머니라던 대장 마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름이 귀자마모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러려고 따라나선 거니까요.”
같은 한국인이라고 제5 부대장 박현준 중령이 내 편을 들어주었다.
“당연히 할 일이라고 하셨지만, 무당파와의 비무에 이어 대장 마물 격인 귀자마모와의 전투까지. 지구에 이런 일을 처리할 수 있는 분이 누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김수호 헌터님이야 말로 지구의 영웅이십니다.”
말론 대령도 기분 좋은 웃음으로 박현준 중령의 말을 인정해 주었다.
“하하. 맞습니다. 여기 김 헌터님이 안 계셨다면 이번 재외공관 설치 작전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다들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지구의 영웅이라니요. 채굴 회사 대표일 뿐입니다.”
최수영이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이렇게 사람들 칭찬을 어색해한다니까. 순 부끄럼쟁이 같으니라고.”
“뭐? 부끄럼쟁이? 내가?”
“그럼 아니야? 하하핫. 귀여워. 그래서 오빠가 좋아.”
“부끄럼쟁이라서 좋다고?”
“힘센 것도 좋고.”
“뭐?”
“하하핫.”
* * *
마물들과의 대규모 전투 이후 한가로운 나날이 지속되었다.
물론 공병부대는 주둔지 건설에 한창 바빴지만, 그건 우리와는 딱히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드론과 정찰대가 다음 블랙 게이트를 찾기 위해 매일같이 수색을 돌고 있었다.
처음엔 여기저기 돌아다니자며 보채던 스테노도 요즘은 가만히 주둔지에 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만큼 여긴 뭐 볼 게 없는 행성이었다.
바다도, 푸른 숲도 없었고 오로지 돌산, 사막, 습지대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곳곳마다 못생기고 진액을 뿜어내는 몬스터들까지.
스테노가 금방 싫증 낼 만한 행성이긴 했다.
숙소에 가만히 누워 꽝이의 꾹꾹이를 받고 있었는데 밖에서 정민우 상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수호 대표님! 블랙 게이트를 찾았답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래요? 얼마나 떨어진 곳이랍니까?”
“삼십 킬로미터 정도 북쪽이랍니다. 출정 준비를 마치고 오늘 저녁 출발 예정입니다.”
“네, 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드디어 행성 094를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옆 숙소 천막이 요란하게 걷히며 스테노가 뛰어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호! 우리 여기 떠난대? 게이트 찾았대?”
“응. 찾았대. 오늘 저녁에 출발한대.”
“아… 정말 지루했어. 다음은 어디가 나오려나? 나는 거기 가보고 싶어. 불사의 금속 인간들이 산다는 그 테라 행성.”
숙소 밖으로 나오자 스테노가 밖에 나와 서 있었다.
“이제 스테노가 안 가본 행성도 그 테라 행성 하나 남았네.”
“아니야. 내 고향 행성도 마찬가지야. 평생 서쪽 숲에서 동생들과 살았는걸. 내 고향이야말로 여행해 보고 싶은 곳이 제일 많은 행성이야.”
“그럴 수 있겠구나. 거기서도 여행 많이 하자.”
“그래! 하하핫.”
“그건 수영이 웃음소리인데?”
“오래 다니다 보니 닮아졌나 봐. 하하핫.”
최수영이 천막을 나오며 스테노를 나무랐다.
“그거 예쁘게 웃는 거 아닌데? 왜 그런 걸 따라 해, 언니.”
“난 수영이 웃는 거 예쁘던데? 따라 하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 언니 마음대로 해.”
천막 앞에 세워두었던 검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최수영이 물었다.
“뭐 좀 알아내지는 못했어? 그 검은 구름.”
“응. 바위도 베어보고 검기도 쏴보고 다시 이것저것 해봤는데, 검이 좀 묵직해진 느낌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
“분명 뭐가 있을 거 같았는데. 그냥 검 속으로 사라져 버린 건가?”
“모르겠어. 일단 안 좋은 쪽으로 변하진 않은 것 같으니 됐지 뭐.”
저녁 무렵. 제4, 5 부대가 출정 준비를 다 마치고 북쪽 블랙 게이트를 향해 출발했다.
처음엔 2,000명이 넘는 대규모 이동이었는데 어느새 700여 명으로 규모가 줄어 있었다.
* * *
테라 행성에 가보고 싶어 하는 스테노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다시 공룡 행성에 도착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블랙 게이트를 찾아 하룻밤만 주둔한 뒤 바로 다시 이동할 수 있었다.
화이트 게이트로 빠져나온 스테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아, 나 여기 싫어, 정말.”
“운도 없네. 바로 다시 행성 094라니.”
또다시 행성 094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바탕 몬스터들과 전투를 치르고 며칠을 더 떠돈 후에야 다시 블랙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엔 테라 행성 나와라!”
스테노는 블랙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어? 여긴?”
“아무래도 스테노 고향 행성에 온 것 같은데?”
“어! 맞네. 저기 놀라서 우리 바라보는 저 사람들 옷 좀 봐. 여기 행성 087 맞는 것 같아!”
차에서 얼른 뛰어내린 스테노가 저 멀리서 놀란 눈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에게 달려갔다.
나와 최수영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스테노가 물었다.
“여긴 어디야? 너희 내 말 알아들어?”
큰 눈을 끔뻑이며 우리를 바라보던 청년이 겨우 입을 열었다.
스테노가 사용하는 언어와 같은 고대 그리스어였다.
“여긴 핀두스 산맥 서쪽 에페이로스 왕국 외곽입니다.”
“나랑 말이 통하는구나! 여기 내 고향 맞네! 가만! 핀두스 산맥 서쪽이라면? 내가 살던 서쪽 숲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 얘, 그렇지? 여기서 황금사과 동산이 멀지 않지?”
“예? 황금사과 동산이요?”
“오케아노스강 서쪽 끝 말이야.”
“거긴 여기서 한참 먼데요.”
“뭐? 여긴 핀두스 산맥 서쪽이라며?”
“그건 맞아요. 하지만 오케아노스강은 서쪽은 세상의 끝과 맞물려 있잖아요.”
* * *
5월 18일 김수호 넥시트코인(NXT) 보유 현황
[보유량 208,300개]
[단가 67억 원]
[평가 금액 1,395조 6천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