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 일상
신룡이 되자마자 백우진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신룡에게 주어지는 개인 연공실이었다.
비무 도중에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부족한 점을 발견하여 곧장 보완하기 위해서와 같은 천상 무인 같은 이유는 아니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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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단순한 도피에 불과했다.
“아후, 질려.”
용봉 비무제를 관람하기 위해 학관을 찾은 이들이 떠 나가기 전 백우진을 한번이 라도 보고 가기 위 해 온갖 방문 요청을 넣었기 때문이 다.
남궁수를 꺾 었을 때 이미 겪은 바 있는 일이 었으나 신룡이 된 지금은 그 정 도가 더욱 심했다.
그중에서도 백우진을 가장 괴롭힌 것은 백 영학의 지시를 받고 찾아온 섬 서백가의 가신들이었다.
“웃긴 놈들이야, 정말.”
백 영학 본인 또한 자식과 사이 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았는지 어 릴 적 에 그 나마 ‘백우진’을 남몰래 챙겨주곤 했던 이들만 쏙쏙 골라 보냈다. 물론 자신 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인물들이 라 얼굴만 보고 축객령을 내렸다.
연공실에 난 작은 창문 너머로 해가 뉘 엿뉘 엿 넘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이 쯤이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학관을 떠났을 터, 백우진은 연공실을 나섰다.
“슬슬 내 돈부터 챙기러 가볼까.”
흐흐흐I
1 1 1 •
백우진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하오문의 문도에게 빌린 300냥에 자신이 가진 돈 150냥을 전부 자신의 이름 앞에 걸었다. 그에 따른 배당은 무려 50배.
“450냥에 50배면…, 어우야!”
무려 22,500냥!
어 떻 게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만 흥청 망청 쓰고 다녀도 한동안 돈 걱 정 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한 거대한 액수였다.
내 기 가 이루어진 도박으로 향하자 잃은 돈이 눈에 아른거 려 미 처 떠 나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도박이 이래서 무서운 거야, 음.”
도박은 패가망신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라는 걸 재차 깨달았다.
백우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점소이의 길을 가 로막았다.
“엇,어서오십…, 허억!”
반사적으로 고개부터 숙이고 보던 점소이 가 백우진의 얼굴을 확인하고 헛바람을 들이 켰다.
“내 배당금을 받으러 왔는데.”
450냥을 걸면서 받았던 작은 철패를 꺼내어 보여주자 점소이의 눈이 뒤집 어질듯 커졌다.
“헉…!”
그는 조금이 나마 남은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이쪽으로 오십시오.”
점소이 가 안내 한 곳은 객잔 2층 가장 끄트머 리 에 있는 방이 었다. 그곳의 문을 두드리자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일이냐.
“배,배당금을 찾으러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의 대답이 끝나기 가 무섭게 방 안에서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획 하고 열렸다.
“어,어서 오십시오.”
백우진에게 온갖 생색을 내며 300냥을 빌려주었던 하오문의 문도가 첫만 남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역시세상은 짜릿해.’
벼 락을 썼을 때와는 또 다른 짜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 나갔다.
자신을 업신여기고 별볼일 없는 사람처럼 여기던 인간이 돌변하는 모습 은 언제 봐도 기분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백우진은 해맑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내 배당금 내놔.”
하오문도의 얼굴이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저,저기 공자…, 아니, 옥면신룡 대협!”
“어, 왜.혹시 돈이 부족하다거나 없다거나하는 식의 대답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까맣던 얼굴이 정반대 색깔인 하얀색으로 변하는 모습은 제법 볼만한 광 경이었다.
“주,죽여주십시오!”
다짜고짜 넙죽 엎드리는 하오문도.
백 우진은 방 안으로 들어 가 의 자에 앉았다. 그러 자 하오문도의 머 리 도 이 쪽을 향해 돌려졌다.
“읊어봐.”
나지 막한 소리 로 말하자 하오문도가 침을 꼴깍 삼키 며 입 을 열 었다.
“대 , 대협 께 드려 야 할 금액은 22,500냥입 니 다. 헌데 그만한 금액 이 수중 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기를 건 사람이 엄청 많았던 것 같은데 그 돈들은 다 어디 가고?”
“일부는 내기꾼들에게 빌려주었고, 일부는 지원을 나온 상위 지부에서 가 져갔습니다….”
결국 내 기를 통해 거둬 들인 돈을 또 고리대금으로 이용하여 불리 기 위 해 사용 중이 라는 뜻이 었다.
“그래서 지금줄수 있는돈이 얼만데.”
“오, 오천 냥 정도입니다.”
“그럼 나머지는?”
“사, 상위 지부에 연락한다고 해도 한 번에 드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사료 됩니다.”
죽여주십시오!
제 머리를 땅바닥에 쾅쾅 찧어가며 읍소하는 하오문도를 바라보는 백우진의 눈에는조금의 동요도보이지 않았다.
“네 목숨이 내 돈보다 비싼 건 아니잖아. 그치?”
“그,그렇습니다.”
하오문도는 가슴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신룡은 결국 정파의 거두가 될 몸 이 아닌가. 다른 이들처 럼 자비로운 마음씨 가 있을 거라 여겼는데 전혀 아 니었다.
“죽여달라는 무책임한 말대신대책을 내놔 봐.”
백우진이 명진마저 꺾고 옥면신룡이 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도한 이후, 하오문도는 밤낮을 새워가며 이 일에 대한 대책을 떠올렸다. 미친 듯이 머리 를 굴려봐도 가능한 방법은 하나뿐이 었다.
“현재 저희 지부는물론 파견을 나왔던 상위 지부에서도 22,500냥이나되 는 금액을 한꺼번에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 하, 할부로 지급하는 것 은 어떠시온지….”
“할부라….”
22,500냥이 뉘집 개 이름도 아니고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는 것쯤, 백우진도 예상하고 있던 사안이 었다.
“도둑놈처럼 딱 22,500냥만지급할생각은 아닐 거야,그치?”
고개를 처박고 있는 하오문도의 얼굴이 썩 어 들어갔다.
“무,물론아니지요.”
“너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줄게.”
•••경청하겠습니다.
백우진이 오른손 검지를 펼쳤다.
“첫 번째, 할부로 지급하되 내게 지불해야할금액을 唐만냥으로상향조 정한다.”
“대, 대협! 그것은…!”
할부로 지급한다는 것은 결국 하오문 지부가 백우진에 게 빚을 졌음을 뜻 한다. 하오문도 또한 그것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인 만큼 어느 정도 이자를 지불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큰 금액은 아니었다.
‘젠장, 우리 가 을이 라는 게 문제 다.’
문제는 이쪽이 한없이 힘 없는 을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었다.
하오문의 문도들 대다수가 기녀, 점소이, 소매치기, 마부 등 보잘 것 없는 신분을가진 이들로이루어져 있지만구파일방 중 하나인 개방과더불어 천 하의 정보를 쥐고 흔드는 곳이다.
정보를 사고파는 하오문의 특성상 가장 중요한 것은 무력이 아닌 신용이 다. 신용이 없는 곳과 누가 거래를 하려고 들겠는가.
백우진이 이번 일에 대해 마음먹고 입을 나불대고 다닌다면 문제는 커진 다. 보다 상위 지부에서는 그에게 돈을 끌어모아 지불할 테고, 문제를 일으 킨 자신과 지부는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것만은 안된다!’
이곳까지 올라오기 위해 내다버린 세월이 얼마인지 셀 수조차 없다.
하오문도는 신중한 태 도로 그에 게 물었다.
“허면두 번째는 무엇인지….”
백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중지를 펼쳤다.
“두 번째, 내게 지급해야 할금액을 25,000냥으로 상향 조정한다.”
이를 들은 하오문도의 얼굴이 조금이 나마 펴 졌다. 25,000냥 또한 적지 않 은 금액 이 지 만 그가 최 악의 경우 상정하고 있던 금액 이 었기 에.
“ 단.,,
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 라는 점 이 었다.
“내게 빚을 진 동안 너희는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무상으로 제공한 다.”
“그, 그 정도라면….”
“그리고 마지막 하나.”
정 보의 값어 치 가 상당하긴 하지 만 5,000냥에 비 할 바는 아니 었다. 백우진 의 두 번째 제안을 넙죽 받아들이려 할 때, 또 하나의 조건이 이어졌다.
“결승전이 벌어지기 전날, 내게 몹쓸 짓을 사주한놈이 있다.”
“헙…!”
고개를 들어 올린 하오문도의 얼굴이 사색이 되 었다.
“그놈이 누구인지 알아와.물론그놈에 대한 정보만 달라는 게 아니겠지猌 놈의 집에 놓인 숟가락 개수부터 하루에 반찬을 몇 번이나 집어 처먹는지까 지 전부.”
하오문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빌어먹을!’
학관 내에 하오문의 지부는 두 개다. 하나는 자신이 속한 지부였고, 또 하 나는 명가의 자제들이나 돈 많은 집 자식들을 대상으로 의뢰를 받거나 정보 를 사고파는 자신의 지부보다 조금 더 끗발이 날리는 지부.
학관 내에서 일을 벌였다는 걸 감안했을 때 외부 세력의 소행일 가능성은 한없이 적다.자신이 치매에 걸려 받은의뢰를기억하지 못하지 않는이상,범 인은또 다른 지부일 가능성이 컸다.
이는 곧 동료를 팔아넘 기 라는 말과 일맥 상통했다.
5,000냥이냐, 동료냐.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기간은 얼마나주실 예정이신지…?”
“으음, 일단 달포 정도로 할까.”
“감히 대협에게 몹쓸 짓을 사주한 녀석의 모든 걸 알아오겠습니다!”
하오문에게 동료의식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
떠들썩했던 학관이 원래의 분위기를찾아가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설치되 었던 노점들이 전부 철거됐고, 대 연무장에 설치되 었던 비 무대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거리를 거닐며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었다. 개연성 충 만한 외모 탓에 원래부터 시선을 달고 살기는 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이 확연하게 달라졌다.
“흐잇….”
그 탓에 제 갈연 지 만 고생 하는 중이 었다. 백우진 에 게 시 선 이 몰려 함께 주 목을 받을 때마다 그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뒤에 숨기 바빴다.
제갈연지를 데리고 향한 곳은 용봉 비무제 마지막 날에 훌륭한 도피처가 되 어주었던 개인 연공실이 었다.
“와아…, 엄청 커요.”
신룡에게 주어지는 연공실인 만큼 그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열댓 명이 함 께 써도 거뜬할 수준이다.
백우진의 입 장에선 낭비로 보일 뿐이 었다. 조금 더 줄인다면 소외된 일부 에게 조금 더 편안한 환경이 제공되지 않았을까.
“앞으로 제갈 소저도 여기 쓰도록 해.”
“에에…, 그래도 되나요…?”
“내 허락만 받으면 누구든 상관없다고 하던데.”
크기가 큰 만큼 이런 부분에서는 또 마음에 들기는 했다.
백우진은 주변을 둘러보며 헤, 하고 웃는 제갈연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내게 할말 있지 않아?”
“무, 무슨 할말이요…?”
짐짓 모른 척하는 모습에 백우진의 얼굴에 장난기가 어렸다.
“모른다면 어쩔수 없지.”
등을 돌려 나가려 하자 제갈연지가 헐레벌떡 뛰어와 백우진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마, 말할게요…!”
“그래, 해봐.”
기 다렸다는 듯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게에, 원래는 신기단이라는건데요….”
신기단(神機鯉).
제갈세가가 직접 연단하는 영약으로 한 알 섭취하면 20년 가량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 었다.
“그거를 잘게 쪼개서 다른 거랑살짝섞어봤어요….”
백우진이 그녀가 준 숙취 해소제를 통해 얻은 내공은 10년을 조금 상회하 는 수치였다.
“그귀한걸 왜 나한테 준 거야?”
“그,그게에….”
얼굴을 붉힌 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몸을 배배 꼬는 제갈연지.
백우진은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 감아.”
“히끅!”
그녀가 딸꾹질을 하기 시 작했다.
“저, 저는 아직 마음의 주,준비가…,히끅!”
어깨에 올려진 손으로부터 빠져나가려 발버둥을 치는데 힘이 전혀 느껴지 지 않았다.
백 우진은 조금 더 얼굴을 들이 밀며 재 차 말했다.
“눈 감으래도.”
“네에….”
제 갈연지 가 결국 눈을 감았다.
입 벌려.”
“버,벌써 거기까지…!”
망측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순순히 입을 벌린다.
백 우진은 그 모습이 무척 이 나 귀 엽 게 보였다.
“눈꼭 감고 있어.”
“네,네에.”
그녀의 어깨에서 살포시 손을 떼 가슴 안주머니를 뒤져 작은 목함을 꺼 내들었다.
용봉 비무제 부상으로 받은 의 선단이 담긴 목함이 었다.
목함을 열기가 무섭게 향긋한 내음이 연공실 내부를 메우기 시작했다. 백 우진은의선단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정확하게 반으로 쪼갠 뒤, 하나는 다시 목함에 넣고 하나는 손바닥 위 에 올려두었다.
“자아, 간다.”
백우진은 엄지와 검지로 잡은 의선단을 그녀의 입 속에 던져 넣고 곧장 그 녀의 입을 막았다.
“우웁!
아차 하는 사이 의선단은 고체에서 액체로 변하여 그녀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이 를 확인한 백 우진 이 손을 떼자 제 갈연지 가 놀란 목소리 로 소리 쳤다.
“배,백 공자! 이건….”
“의선단 반쪽이야.”
“왜, 왜 저한테 ….”
“너도 나한테 줬으니까.”
칼이 오가는 야만적 인 세 계 에서 지 켜 야 할 것은 단 하나다.
원수와 은혜는 두 배로 갚을 것.
제갈연지가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자신 또한 베푸는 것이다.
“하,하지만…!”
자신이 먹은 게 못내 아깝다는 듯 소리치는 그녀를 강제로 연공실 바닥에 앉혔다.
“기운 날아가기 전에 빨리 운기조식부터 해.”
그렇게 말한뒤, 백우진이 한쪽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입맞춤은 그 다음에 하자고.”
“헤엑…!”
제갈연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