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화 > 공조
서서히 날이 풀리고봄이 가까워오는 때에 한바탕눈이 내렸다.
연초에 하얗게 내려앉은 눈더미 위에서 빛나는 창연한 불빛들은 수련에 몰두하던 생도들의 마음을 흔드는 데에 충분했고, 학관 내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수많은 객잔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하아.”
본디 연초에는 끼리끼리 모여서 지내는 법인데 혼자 기숙사에 들어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당선영은 심란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정무학관에서 세 번째 맞이하는 해다. 그때마다 그녀는 혼자였다.
남자들에게는 파멸을 가져다주는 요녀, 먹잇감을 노리는 독거미 등으로 불렸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시선을 독차지하는 그녀를 멀리했다.
“익숙한 줄알았는데….”
혼자인 것이 익숙해 졌다고 생 각했는데 오늘따라 부쩍 외 로움을 타는 걸 보면 아니 었나 싶다.
“친구라.”
오색찬란한 등불 사이를 끼리끼리 모여 오가는 생도들의 모습을 보며 그 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자신에게도 마음이 맞는 친구라는 게 있었다면, 이토록 외로움에 사무치 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
“바보 같은 생각이네.”
새로운 해의 시작이라는것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삶에 부정적인 그녀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입 에올린 것을 보면.
“응?
길거리를 오가는 생도들을 무료한 시선으로 내 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눈 에이채가서렸다.
당선영의 시선이 닿은 것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는 백우진이 었다.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이 된 그녀의 시선이 그의 걸음에 맞춰 움직였다.
백우진.
참으로 묘한 녀석이다. 생김새는 제 형과 비슷한구석이 있는데, 하는 행동 은정반대다.
형인 백무혁은 무욕한데 백우진은 탐욕적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볼 때마다 맑은 눈동자에서 그것이 훤히 드러난다.
“맑은 눈동자에서…, 말이지.”
본디 탐욕이 란 사람의 눈을 흐리게 하는 법 이다. 지금껏 자신을 향해 음심 을 드러낸 이들이 모두 그러했다.
며칠째 팔리지 않아 썩기 일보직전인 어물전 생선의 그것보다 못한 눈들 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우진은 달랐다. 탐욕적인 와중에도 그의 눈은 맑고 깨끗했다. 정 기(精氣)라는것이 눈속에 살아숨쉬는듯했다.
그래 서 일까. 그는 탐욕스러운 와중에 도 스스로를 완벽하게 제 어하는 모 습을 보였다.
“흐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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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문득, 결승전에서 보인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웃음이 났다. 그리고 한편으론 여전히 의 아했다.
화기(火氣)가 섞인 독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을 넘어 이를 이용하여 입 에서 불을 뿜어내는 건 대체 어 떻게 해 야 가능한 걸까.
“역시 재미있어.”
남자에게 이토록 많은 의문을 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를 지 켜만 보고 있던 그녀가 빠르게 옷매무새 를 가 다듬고 창틀을 밟고 하늘을 날아 조금 떨어진 곳의 지붕 위 에 올라섰다.
그녀는 눈이 쌓인 지붕과 지붕을 넘나들었다. 지붕 위에서 경공을 사용하 는 것은 학관규칙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듯, 힘찬 걸 음으로 그와의 거리를 좁혔다.
학관 상점 가에 있는 객잔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녀 또한 곧장 따 라서 들어갔다.
약간의 시 간차를 두고 객 잔 안으로 들어서 자 제법 북적 거 리는 내부가 그 녀를 반겼다.
앞서 백우진을 반겼던 점소이 가 온갖 안주를 들고 헐레벌떡 2층으로 향하 는 모습에 그녀 또한 2층으로 올라섰다.
“맛있게 드십시오, 대협!”
2층의 끄트머리 방에서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며 나오는 점소이.
당선영은 그를 지나쳐 백우진이 들어간 방에 당도했다.
경공으로 달려오느라 흐트러진 머릿결을 매 만지고, 위 가 파인 옷의 밑단 을 잡고 조금씩 끌어내 려 가슴골이 조금 더 드러 나게끔 하여 준비를 끝마쳤 다.
문고리를손에 쥐려던 찰나, 짙은회의감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내가뭐하는 거지.’
갑자기 자신의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창문 너머로보이는사내를보기 위 해 학관 규칙 까지 어 겨 가며 지 붕과 지 붕 사이 를 넘 나들어 여 기 까지 오다니 .
‘대체내가무슨 생각을….’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남자가 자신에게 매달릴 수는 있어도 자신이 남 자에게 매달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럴 수는 없다.
읏!”
감정이 격해지자 그녀의 코끝으로 희미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자신의 몸 에서 나는 것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일 층을 내려다 보았다. 남자들이 수두룩했다. 이대로 있다 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겠다 싶어 뒤로 돌아설 때.
드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놀란 그녀가돌아서기도전에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가녀린 팔을 붙잡고 잡아당겼다.
“자, 잠깐…!”
아차 하는 사이 방 안으로 몸이 끌려 갔다. 동시 에 문 또한 닫혔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눈동자에 싱글벙글 웃고 있는 백우진의 얼 굴이 들어왔다.
“나보려고온 거아니었어?”
한 치의 휘어짐 없이 일직선으로 뻗어오는 질문. 그것은 당선영의 감정을 더욱 동요시 키 는 데 에 충분한 힘 을 지 니 고 있었다.
그녀가 동요할수록 몸에서 내뿜는 향기 또한 깊이를 더했다.
백우진의 한쪽 팔이 자신의 손목을, 다른 한쪽 팔은 제 허리를 휘감고 있 었다.
“내게서 떨어져!”
당선영이 백우진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쳤다.
그에게 나 자신에게 나.
남자와 밀실에 함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 었다. 그녀가 황급히 나가려 하자 백우진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나 당 소저한테 할 말 있는데.”
“나중에 해.”
평소 같았으면 신경 쓰지도 않을 일이다. 남자가 미쳐 날뛰는 일 따위 숱하 게 보았고, 이성을 잃고 날뛰는 이에게 당할 만큼 녹록한 실력도 아니 었으니.
‘싫어.’
그러 나 백우진 이 미 쳐 날뛰 는 모습만큼은, 저 얼굴이 다른 사내들과 똑같 이 변하는 모습만큼은 눈에 담고 싶지 않았다.
“빨리 비켜.”
조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백우진은 설핏 웃다가 별안간 코를 벌렁거 리기 시작했다.
“이 냄새들 때문에 다급해진 건가?”
“뭐하는 거야…!”
한술 더 떠서 코로 냄새를 마구 들이마시는 모습에 놀란 당선영이 그의 멱 살을 붙잡았다. 이 대 로 문에 다 밀쳐 밖으로 빠져 나갈 셈 이 었다.
“우려하는 일은 없을테니 진정해.”
“어…?”
이 미 상당한 양을 들이 마셨다. 자제력 이 부족한 남자라면 이미 날뛰 었어 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다른 이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이상증세를 보일 정도건만, 그는 아무렇 지도 않아 보였다.
“너…, 아무렇지도 않은 거니?”
“그렇다니까.”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녀가 내뿜는 향기에 뒤로 물러났던 백우진과 지 금의 백우진은 경지부터가 달라졌다.
제갈연지가 조각조각 건네준 신기단을 통해 일갑자의 내공을 쌓아 절정 에 접어들었고, 비무제 상품으로 받은 의선단의 반쪽을 섭취하여 깊이를 더 했다.
향기를 맡으면 흥분감이 몰려온다. 기분이 좋아지는 수준까지만 몸에 남 겨두고, 나머지는 곧장 내공을 운용하여 태워 버렸다.
..
!....
...
밀실에 함께 있음에도 두어 시진은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소모량이 었다.
“그러니 진정하고 앉아. 안주 식어.”
“하.”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이 전부 우습게 됐다.
백우진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그녀의 의심 어린 눈초리 가 그를 향해 쏟아 졌다.
‘어떻게 된거지?’
그녀의 독공이 깊어 질수록 체 향 또한 짙 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또래 사이 에서 찾아보기 힘든 절정, 그것도중입에 발을 들인 고수였다.
독공을 익힌 눈에는 보인다. 백우진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공간에 넓게 퍼져 있는 향기가 함께 스며드는 것이.
아닌 척하려 해도 향기가 스며들 때마다 움찔거리 며 몸이 반응하고 있다 는 명확한 증거까지도.
‘단순히 자제력이 뛰어난 걸까.’
마치 무언가로 막아놓은 것처럼 일정 이상으로 흥분하지 않는다.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표정이나행동거지와는 달리 자제력이 뛰어난걸까.
이내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이유를 알고 싶기는 했으나 그가 직접 알려주 지 않는 이상 알 길은 요원했다.
“할말이 뭔지 얘기해봐.”
평온함을 되찾은 그녀는 제 몸에서 내뿜는 향기 만큼이나 달착지근한 목 소리를 냈다.
백우진은 제 호리병에 담긴 술을 술잔에 따라 연거푸 비워내다가 입을 열 었다.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지 않을래?”
“인 猌,,
“조별 과제 말이야.”
조별 과제 는 무조건 각 조마다 따로 해 야만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하나의 조로 힘에 부칠 것 같다고 판단되면 조장 간의 합의를 통해 힘을 합치는 것 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흐응….
들은 기억이 있다. 이번 기수의 신룡조가 역대급으로 적은 인원으로 꾸려 졌다는 얘기를.
“이렇게 힘을 합칠 거라면 차라리 조원을 더 뽑는게 낫지 않았을까?”
그녀 가 묻자 백 우진은 단호하게 고개 를 저 었다.
“내 울타리 안에는 신뢰할 수 있는 것만 집어넣어도 공간이 부족해.”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보통 조별 과제를 통해 높은 성적을 내는 데에만 혈안이 된 이들과는 달리 ,그는 목적 자체가 다른 듯했다.
그의 솜씨를 보고 싶다. 허나 그녀 또한 한 조를 이끄는 조장이 다. 개 인의 욕심으로 일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 다.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결정할게.”
“길게 말할것도 없어.”
다시 한번 술잔을 비운 백우진이 답했다.
“마물 토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