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화 > 피어나는 꽃
여러모로 떠들어대기 좋은 신룡 쟁탈전 비무가 결정되 었다.
“들었어? 올해 첫 신룡 쟁탈전.”
“음. 도전자가 유화연 소저 라지 ?”
“아주 재미있게 됐어. 약혼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것 아닌 가.”
연인 관계였던 두사람이 비무대에 올라서는모습을 상상하는 이들에 의 해 쉬어버린 지 한참오래된 떡밥이었던 파혼에 대한소식들이 무덤에서 살 아 돌아왔다.
“그런데 진짜 파혼 이유가뭘까?”
“글쎄. 그건 당사자들만 알고 있겠지.”
“어떻게 알방법 없으려나….”
여기저기 소문 몰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몇몇 생도들이 백우진과 유화연 주변 사람들을 대상으로 탐문까지 했다는소식이 전해졌다.
“이봐, 장삼. 거하게 한 잔 쐈으니 이제 좀 말해보게.”
“응? 무얼 말인가?”
“백 공자하고 유 소저가 헤어진 진짜 이유 말일세! 자네가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금을 들여 한상 차려준 거 아닌가!”
“아,그거 말인가? 히끅!”
잠깐만 기 다려보게 .
그렇게 말하며 점을 볼 때 꺼내는 물품들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하는 장삼.
“자네 지금뭐하나?”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를 알고 싶다면서?”
“그랬지.그러니 어서 말을….”
“내 이 천지신명께 물어 두 사람이 헤어진 이유를 알아볼 테니 조금만 시 간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여 앉은 이들이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텄구만, 텄어.”
“그냥가세!”
어느새 혼자가 되 어버린 장삼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식 탁 위 에 놓인 음 식들을 푸짐하게 맛보며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려댔다.
다른 이들도 이와 비 슷했다. 신예 화와 제 갈연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 과 함께 딱 잡아떼고 도망 다녔고, 구왕수는 장삼과 마찬가지 로 이 것저 것 얻 어먹다가 마지막에 뒤통수를 쳤다.
누구 하나 뚜렷한 증언을 확보하지 못한 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 두 사 람이 정한 신룡 쟁탈전의 날이 밝았다.
올해 전체 학년을 통틀어 처음으로 맞이하는 신룡 쟁탈전에 대한 생도들 의 관심은 뜨거웠다.
“바글바글하네.”
대 연무장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며 혀를 내두르는 백우진.
저들이 모두 자신과 그녀가 파혼한 사실을 두고 떠들어댄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생전 없던 두통이 생길 것만 같다.
“배,백공자….”
함께 있던 제갈연지 가 무언가 불안한 듯, 떨리는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왜?,,
가볍게 반문하자그녀는 할말이 가득한표정으로 말하기를 꺼렸다.
‘왜 이렇게 불안하지…?’
이미 끝난 사이인 두 사람을 두고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떠들어대는 사람 들, 제 몸 돌보지 않고 바득바득 과제를 수행하며 백우진의 턱 밑까지 다가 온유화연.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모든 일들에서 이유 모를 불안과 불길 함을 느꼈다.
학관이 아무리 드넓다 한들 중원 무림에 비하면 우물 안 세상에 불과했고, 이곳에 저마다 원하는 무언가를 찾아왔다고 해도 혈기 넘치는 나이인 만큼, 자극적인 소문에 귀를 쫑긋 세우고 반응한다는 것 또한 당연했다.
하지만이건 너무심해….’
그 모든 걸 감안해도 지금의 상황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비무뿐만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자체에 몰두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누군가가 준비한 무대 위에 올라선 듯한 감각.
그럴 리가 없다고, 모든 건 그저 백우진이 전 연인이었던 유화연을 만나는 것에서 오는 불안함일 뿐이 라고 자위하고 있지 만, 만약 이 런 상황이 되도록 유도한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필시 그녀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이러한 분위 기를 연출했다면 목적은 당연하게도 하나밖에 없다.
백우진과 재결합하는 것.
‘안돼.’
제갈연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두사람이 다시 한몸인 것처럼 붙어 다니게 되는 상상을 하자, 강렬한 거부감이 온몸에 엄습했다.
‘그것만은 절대로!’
끼어들 틈 없는 연인을 그저 하염없이 바라보던 그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 라.
이 모든 불안을 그에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만 약 이 모든 게 자신의 망상에 불과하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은 없을 테 니.
‘괜찮을거야, 괜찮을….’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며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을 잠재우기 위해 안간힘 을 썼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하게 흘러 전 연인인 두 사람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시간이 다가왔다.
백우진의 담당 교수인 염철진이 이번 비무의 심판 자격으로 비무대 위에 올라섰다. 그의 등장 하나만으로 주변을 둘러 싸고 있는 생 도들의 기 대 감이 치솟았다.
“지금부터!”
내 기를 실은 우렁 찬 목소리 가 울려 퍼 졌다.
“2학년 생도간의 첫 번째 신룡 쟁탈전을 시작한다!”
와아아아아!
용봉 비무제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함성이 뒤를 이었다.
“백우진과유화연, 비무대위로!”
천막으로 둘러쳐진 간이 대 기실에 앉아 있던 백우진이 몸을 일으켰다.
이 몸과 쌓인 인연이 너무나도 길고 두터워 그녀를 보는 것이 거북한 건 사 실이나,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는 법.
정신을 무장하며 천막을 걷어 밖으로 나가려는그 순간, 옆에 서 있던 제갈 연지가 백우진의 팔을 덥석 붙잡고 끌어당겼다.
“배,백공자.”
“왜 그래 ?”
완연한봄날씨에 제 몸을 바르르 떠는제갈연지.
수도 없이 많은 말들이 머릿속을 떠돈다. 그녀는 힘겹게 입꼬리를 들어 올 렸다.
“이,이기고오실 거죠…?”
촉촉한 눈망울이 꼭 지구에서 보았던 장화 신은 고양이를 연상시켰다.
백우진은 웃는 얼굴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의 손길이 몸에 닿자 긴장감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덩달아그녀의 입 도.
“바, 방심하면 안 돼요. 대화도 많이 나누지 마세요 그리고, 그리고….”
할 말을 끊임없이 생각해내는 그녀의 이마를 검지로 가볍게 밀어내며 뒤 로물러났다.
“다녀올게.”
...
....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말들을 모두 지워냈다.
‘믿자.’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은 백우진을 믿는 것이었다.
반대편 간이 대기실에 홀로 앉아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유화연은 얇 은 천을 뚫고 들어오는 수많은 소문을 들으며 미소 지 었다.
그들이 곳곳에서 떠들수록 백우진의 귀에도 들어갈 터다. 하루에 단 한 순간이라도 그가 자신을 떠올리고 어떠한 감정이든 가져주었다면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백우진과유화연, 비무대위로!”
비로소 기다렸던 신호가 떨어졌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곧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그리고 한껏 여유로움을 가장하고, 기품 있 는 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반대편 천막이 걷어 올려지고, 비무 상대가 걸어 나왔다.
‘아아, 드디어.’
먼발치 에 서 만 지 켜봐야 했던 님 의 얼굴을 보다 가까운 거 리 에 서 마주보 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지금까지 지나왔던 역경의 순간들이 치유되 는 감각을 느꼈다.
이 자리에 서기 위해 부단히도노력했다.하나하나 자신과조원들의 한계 에 가까운 과제들을 골라 엮었고, 이를 빠르게 해결하기 위한최적의 동선을 짜기 위해 밤낮없이 머리를 혹사시켰다.
더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조원을 훈련시켰고, 그들에게 시킨 훈련 의 몇 배 나 되는 강도로 제 몸 또한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재차 느꼈다. 뚜렷한 목적을 지닌 인간에게 한계란 얼마 든지 뛰 어넘고 부술 수 있는 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힘든 길을 걸어보기도 전에 편한 길로 나아가려 했던 과거의 자신을 더욱 후회하고, 증오하게 되 었다.
힘들었던 순간들이 하나의 조각으로, 모이고 모여 지금이 라는 거대한 그 림을 만들어냈다.
‘가가….’
지 나쳐 가고, 스쳐 가고, 곁눈질하며 봐야 했던 님 이 눈앞에 있다.
그것도 또렷한 시 선으로 자신을 바라본 채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당장에라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만…, 꾹 참았 다.
‘참아야 해.’
섣불리 다가가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자제시켰다.
과도한 흥분으로 떨고 있는 손과 발을 쥐락펴락하며 감정을 덜어낸다.
최선을 다하되, 살수만큼은 엄히 금지한다는 염철진 교수가 일러주는 주 의사항이 한 귀로 들어와 반대편으로 사라져간다.
한 걸음, 두 걸음. 염철진 교수가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그 걸음을 따라 주변의 것들이 하나둘씩 지워지 기 시 작했다.
주변을 둘러 싸는 생 도들, 그들의 성대 에 서 쥐 어짠 무의 미 한 소음으로 치 부되는응원들이 그녀의 시야로부터, 감각으로부터 배제되고,오로지 백우 진만을 담아냈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세계에는 자신과백우진 둘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절대로….’
백우진이 검을 뽑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그녀 또한 따라서 검을 뽑았다.
날카로운 기세가 쏟아진다.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명명백 백히 전해져 온다.
그의 입장에서 자신은오래 붙어 있어봤자좋을 거 하나 없는 지나간, 이제 는 잊어버린 연인에 불과할테니.
하지만.
‘절대로.’
그녀 또한 응어 리 진 가슴과 함께 담아두었던 기 운을 풀어 낸다.
백우진과는 반대되는, 강렬하다 못해 아교처럼 달라붙어 끈적이며 제 의 지를 전달한다.
‘절대로쉽게 끝내지 않겠어요.’
이 소중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음미하기 위해.
하염없이 오래 머무르고, 수도 없이 제자리걸음 하게 만들었던 벽을 단숨 에 부순다.
벽 너머로 드리워진 길, 누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새하얀눈길 위에 제 족적을 남긴다.
그곳에 도달하고 나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부순 것은 그저 단면으 로 이루어진 벽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하나의 우물이었음을.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우물을 깨부수고 나와 세상과 마주했음을.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무수히 많은 생도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쥐고 있는 검에서 벌어지는 변화로부터 비롯되 었다.
“거,검기다!”
그녀는 이 승부를 오래도록 끌고 가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검으로써 내비 쳤다.
눈빛에서 읽어낸 의 지, 검으로 내비친 각오, 비장하게 흩날리는 기세.
집착으로 자양분으로 삼고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지켜보는 백우진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