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화〉탈출
작고, 한적한 마을에서 어른들의 예쁨을 받으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때가 떠올랐다. 그랬던 그들이 일순 돌변하여 자신과 동생을 향해 날린 욕설과 주 먹질을 날렸던 때도.
그의 물음에 잊고 싶지만 차마 떨쳐내지 못한 기억들이 떠올라 그녀의 기 분을 상하게 했다.
“대답하고싶지 않습니다.”
그녀의 날선 대답은 간접적인 답변이 되었다.
“박해당한 건가.”
“••••••.”
그림 자 일족은 특별하다. 태 어날 때부터 지 닌 능력뿐만 아니 라, 신체적 인 능력 또한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몇 배는 뛰 어나다.
주머니 속에 든 송곳은 밖으로 튀 어나오기 마련이듯, 그들이 아무리 평범 하게 살고자 해도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 드러나는 비범함은 그들을 평범 에서 걸러지게 만들었고.
모난돌이 정 맞는다고, 그들이 가진 능력이 두려워진 이들에 의해 차별은 시작되었다.
판타지 세계의 일족이 그러했듯, 이들 또한 이곳에서 그에 준하는 박해를 받아왔고, 이를 복수하기 위해 인류의 적이라 칭해지는 마교에 투신한 것이 다.
“마교에서의 삶은 만족스럽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 었다.
그녀의 동생은 그림 자 일족의 아비와 평범한 어 미 사이 에 서 태 어 났다. 일 족과 일족 사이에서 태어난자신과 달리, 혼혈로 태어난동생은 일족을 뛰어 넘는 신체 능력을지녔지만, 그림자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몸이었다.
그림 자 속에 머무는 시 간이 길 어 질수록 동생 은 감정과 함께 말 또한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 괴로웠던 그녀는 동생을 임무에서 제외해주길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족의 부흥을 위해 희생을 불가피한 것이라며, 오히려 일족들이 막아선 것이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박해당한 마을에서 떠나온 자신들을 환영하던 일 족의 어른들과 마교는 자신들을 그저 편리한도구쯤으로 생각한다는것을.
이제 동생은 거의 꼭두각시가되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말 잘 듣 는 인형. 유일하게 감정을 내비치는 순간은 자신이 먹을 것을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뿐.
‘이젠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어….’
동생은 지금도 진미 연의 그림 자 속에 숨어 호위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
희미하게 남은 감정도 이대로가면 얼마지나지 않아사라질 터였다.
그것이 끔찍이도 싫어 동생을 데리고 도망칠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자신 이 없었다. 마교와 일족의 추적으로부터 벗어날 자신도, 평범한 이들 사이에 섞여 살아갈 자신도.
“딱봐도불만이 많아보이는 얼굴인데.”
제 얼굴에 감정 이 묻어나 있음을 깨달은 그녀 가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 다. 금세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 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우진을 노 려보았다.
“동생을구해준보답은 이제 끝입니다. 더 이상 당신의 말에 답하지 않을 겁니다.”
그녀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그 뒤로 들려오는 백우진의 말이 석벽 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던 그녀의 발목을 꽉 붙잡았다.
“갈곳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는 거라면 나한테 오는 게 어때.”
황당한 나머지 그녀는 돌아서서 백우진을 다시 쳐다보고야 말았다.
내공은 묶이고, 팔다리에 무거운 쇳덩이를 매달고 있는 주제에 대체 무슨 자심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지.
그녀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에 성공한 백우진이 재차 말을 이었다.
“내가잘해줄게.”
응?
:k * *
결행의 날이 다가왔다.
며칠 더 끼니마다 환약을 받아먹어 몸집을 키운 마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가 않았다.
“식사하십시오.”
여느 때처럼 식사를 들고 나타난 그녀를 보며 백우진이 퀭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게 아침이야, 저녁이야.”
무시하려 했지만, 이제 끝이 다가온 사람처럼 퀭한눈빛이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아침입니다.”
나지 막한 음성 으로 답하자 백 우진은 힘 없이 고개를 끄덕 이 며 밥을 씹 어 삼켰다.
분명 고슬고슬한 쌀밥이 분명한데 입에 넣으면 모래를 씹는 기분이다.
대충 몇 숟가락 떠서 넘기고 밥상구석에 놓인 환약을 집어 술과 함께 단 숨에 넘겼다.
“후우.”
목구멍을 타고 매끄럽게 흘러 전신 곳곳으로 숨어들어야 할 마기가 오늘 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밖에서 스며든 미약한 마기가 기폭제가 된 것처럼 잠들어 있던 마기가 서서히 깨어났다.
“우웁…!”
속이 메스꺼워졌다.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듯, 자신을 담은 그릇을 제 입맛에 맞기 만들기 위해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백우진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되 어 야 하는 것은 단전에 묶여 있 는 내공을 푸는 것이다.
풀어낼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해 약을 먹 던가, 외 부에 서의 조력으로 단전을 묶고 있는 군자산의 기운을 몰아내던가.
오직 진미연만이 가지고 있는 해약을 구할 방법은 없고, 적지에 홀로 붙잡 혀 있는 지금 외부의 조력자를 구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좀만 더꼬시면 됐는데.’
유일하게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자 일족의 여인을 꼬셔보려 했지 만, 실패했다.
더 이상 미친 소리는 그만하라며 매몰차게 떠 나가더라.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세 번째 방법뿐이 었다. 바로 제 몸에 차곡차곡 쌓 인 마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백우진은 판타지 세계에서도 마기를 이용해본 적이 있다. 거대한 마기로 이루어진 폭탄이 대도시의 한가운데에서 터지려 할 때, 이를 제 몸으로몽땅 흡수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었다.
‘성향은 매우 유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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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판타지와 무림.
두 세계 모두 결국 ‘NovelGod’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인지, 두 세계에서 일컫는 마기는 그 성질이며 성향이 매우 비슷했다.
그렇기 에 백 우진은 이 러한 도박수를 내 건 것이 다.
애초에 진미연의 실험의 결과물로써 폭주하는 성질을 한 번 거세시킨 녀석들이 아닌가.
그 덕분에 마기를 마음대로 돌아다니 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수월했다.
그림자 일족만이 영계에서 유일하게 자유롭듯, 마기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이들은 마족밖에 없다.
아무리 기감이 뛰어난 그라고 해도 마기를 완벽하게 다루는 것은 불가능 했다. 하지만 완벽한 제어가 불가능해도 마기를 이용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 다.
’그저길을 터주는 거다.‘
마기 가 나아가는 길을 제 한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 이 도록 유도만 하 는 것.
당연하게도, 백우진이 마기를 유도하는 곳은 군자산의 기운이 얽힌 단전 부근이다.
마기는 오로지 닿는 모든 것을 파괴 하고, 제 색으로 물들이 기 위해 존재 한 다. 군자산 또한 녀석의 앞에선 깨부술적에 불과하다는뜻이다.
단전에 도달한 마기는 단전에 아교처럼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는 군자산 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크흡…!”
무식한 마기는 군자산뿐만 아니라 단전에까지 들이박았다. 백우진은 목 구멍을 타고 오르는 피를 억지로 다시 집어삼켰다.
무차별한 공격 속에서 밀려오는 격통을 참아내 어 얻어내는 보상은 두둑 했다.
대체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끈적끈적하고 단단하기까지 한군자산의 기운 이 양아치 같은 마기의 쉴 새 없는 난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퍼엉
기(氣)라는 것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물과 같다. 절대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흐른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강제하고 있던 군자산이 사라지자, 불만을 가득 머 금은 채 단전에 갇혀 있던 기가 단숨에 터져 나왔다.
’됐다…!‘
음주선공에 의해 쌓인 기운은 미약하나마 선기(仙氣)를 머금고 있다. 그 리고 이 선기는 마기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만만한 애 하나 붙들고 신나게 주먹을 휘두르고 있던 마기는 창졸지간에 날아든 기파(氣波)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단숨에 녹아내렸다.
“어우야.”
내공이 흐르지 않아몸곳곳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단숨에 녹아내리면서 느껴 지는 극한의 청량감에 뇌 가 저릿할 지경.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날뛰는 기운을 다시금 단전에 갈무리한 백우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닥에 드리워진 제 그림자를 향해 손을 박아 넣었다.
“커헉!”
그림자에서 빠져나온 손은 웬 사내의 목을 움켜쥔 채였다.
“새꺄, 아무리 감시를 하더라도 사람이 똥을 싸는 것처럼 부끄러운 일을 할 때는 비켜줘야 예의 아니냐고.”
“크흐흑…!”
목을 움켜쥔 손을 마구 때리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 사내 .
“뭐 猌 오히 려 냄 새 참느라 네 가 더 고역 이 었다고?”
과연 맞는 해석일까.
“그럼 실컷 맡아라, 자식아!”
방 한구석에 놓인 요강에 다가 머리를 그대로 꽂아버 렸다.
한 차례 부르르 떨 어 대 던 몸은 이 내 축 늘어 졌다. 정신을 잃은 듯했다.
열두 시진 내내 붙어 있던 감시를 비로소 떨쳐내고 경쾌한 걸음으로 바깥 으로 향하려 던 백 우진 이 뒤 로 돌아섰다.
“ 아.”
질펀한 무언가 위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기절한 녀석의 허리춤에 채워진 검을 뽑아 들었다.
“그래, 이래야지.”
한 손엔 검, 한 손엔 호리병. 무엇 하나라도 없으면 이제는 허전할 지경이 다.
악과 깡으로 지켜낸 호리병의 술을 연거푸 들이켜자 한동안 멈춰 있던 음 주선공이 자연스럽게 운용된다.
그와동시에 체내에 흐르는 기운들이 한 단계 짙어졌다.
“오.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음주선공의 성취가 訟성에 올라서면서 내공의 질이 한층 상승했다.
기존에 최소 십의 내공을 사용해야 검기를 만들 수 있었다면, 지금은 칠 정 도면 충분히 검기를 맺히게 할 수 있을 듯했다.
“여기가 노다지야, 아주.”
기분 좋게 석벽을 돌려 공동으로 나온 그는 바로 옆에 걸린 등불 아래에 서린 그림자에 발을 밀어 넣어 그 안에 숨은 녀석을 무력화시켰다.
“크하악!”
그림자속에서 비명이 메아리 퍼지듯 터져 나왔다.
공동 내부에는 숨기 좋은 장소에 그림자 일족이 한 명씩 숨어 있었다.
백우진이 그림 자 안으로 발을 밀어 넣는 모습을 본 그림 자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불혹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놀랍군.분명 그대는우리 일족의 피가섞이지 않은듯한데.”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쯤으로 여긴 능력을 그가 사용하는 것에 적잖이 놀란 듯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인간이 노력하면 안되는 게 없더라고.”
물론 약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하지만.
“산개.”
사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의 뒤로 정렬해 있던 일족들이 사방으 로 흩어졌다.
사방팔방에서 암기가 쏟아졌다. 이미 기감을 넓게 퍼뜨려 일정 공간을 장 악하고 있던 그에게 닿는 것은 없었다.
백우진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움직임 속에 무시무시한 예기가 깃든, 검무(劍舞)를.
칼에 맺힌 검기는 닿는 모든 것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암기, 소리 없이 다가와 휘두르는 단검, 공동에 가득한 진미연의 실험체들까지.
“이런!”
사내는뒤늦게 알아차렸다.
“실험실을 보호해라!”
그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들이 아니라, 이곳 실험실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것임을.
백우진이 나아가는 주요 방위를 점한 일족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깊게 숨 을 들이 마셨다. 그러 자 코를 마비 시 킬 정도로 찔러 오는 고약한 냄 새 대 신 향 긋한 냄새 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이건 무슨 냄새지…?”
맡기만해도 긴장감이 풀려 온몸이 나른해지고, 기분을 좋게 만드는….
서걱
“크악!”
죽음의 냄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