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화〉잠입
다시 찾게 된 초원.
백우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갈타이 부족이었다.
그곳은 이 미 그들의 거 점 이 나 다름없는 곳이 었기 에 .
“또…, 왔구려.”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부족 전사의 외침을 듣고 달려 나온 자갈타이는 똥 씹은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잘 지냈어?”
백우진이 눈치 없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자갈타이 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났다.
“그대 같으면 잘 지냈겠소? 하루하루가 가시 방석이오, 하루하루가!”
그의 열변에 백우진이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아니, 왜?”
정 말 모르겠다는 듯 순진무구한 표정.
자갈타이는 그래서 더 열받았다.
“당신들이 바르탄 부족을 박살 내 지 않았소! 그 소식 이 하무르 칸의 귀 에 들어가고, 내가그일에 연루되었단 것이 알려지면 난끝장이란 말이오!”
“오…, 확실히 그렇긴 하겠다.”
바르탄이 하무르 칸에게 있어 어느 수준에 위치한 부하인지는 모른다.
그러나그 위치가 어떻든지도자로서 부하가 당했다는데 그저 가만히 두 고볼 리는 없다.
그랬다간 그에 게 충성을 맹 세 한 이 들이 회 의 감을 느끼고 흔들릴지 도 모 르니.
“근데 뒤처리 깔끔하게 해서 당분간은 알려질 걱정은 안 해도 되지 않 나?”
바르탄을 비롯한 부족의 전사들 전부를 굴비 엮듯이 묶어서 관아에다 던 져놓았다.
설상가상으로 바르탄은 모용세 가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부족민 들은 자갈타이 부족이 울며 겨자 먹기로 흡수했다.
백우진의 말에 그는 가슴을 두드리 며 답답하다는 투로 말했다.
“지금 당장이야그렇다고 쳐도, 언제고 알려질 것 아니오.”
하무르 칸 휘하에 있는 부족들은 정기적으로 칸에게 공물을 보낸다.
그런데 정해진 날짜에 공물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칸의 부하들이 바르탄 부족을 찾아올 터.
그때가 되면 바르탄 부족이 누군가에 의해 와해 되었단 사실을 숨길 수 없 게 된다.
물론 뒤처리는 확실하게 했다.
붙잡힌 전사들은 관아에 있는데 북방의 이민족들이 아무리 막무가내 라 해도 거기까지 치고 들어갈 수는 없고, 또 다른 목격자인 부족민들은 자갈타 이 가 흡수하여 지켜보고 있으니.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죄를 지으면 제 발 저리기 마련이고, 더군다나 자갈타이는 강심장이 아니 기에 더더욱.
“하루하루 불안해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소.”
“어…, 확실히 그래 보이긴 하네.”
자갈타이의 얼굴은 며칠 전에 비해 확연하게 늙수그레했다.
그가 요 며칠간 얼마나 마음고생 이 심했는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자갈타이는 핏발이 선 눈으로 백우진을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게 다그대들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그대들이 책임지시오!”
“책임?”
어딘가 묘한 말투에 자갈타이는 불길함을 느꼈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 았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매한가지니 어떤 식으로든 매달려 보리라생각 할뿐.
“그, 그렇소.”
“책임이란말이지….”
백우진은 벌벌 떨면서도 물러나지 않는 자갈타이를 보았다.
어이가 없다.
약탈이나 일삼는 놈들 안 죽이고 살려준 것만 해도 감지덕지 인 상황 아니 었던가.
아직 덜 맞아서 그런 건가싶어서 드잡이질을 하려다 이내 멈추었다.
한 번쯤 해봄직한 작전이 떠올랐기 때문.
“하무르 칸의 부족이 여기서 며칠 거리에 있지?”
“•••대략닷새 거리에 있을거요.”
백우진의 목표는 하무르 칸.
정확하게 는 그가 알고 있을 현무단에 대한 정보다.
이 를 알아내 기 위 해 선 어 떤 식 으로든 그와 접촉을 해 야만 한다.
그는 마교와 긴밀하게 연결되 어 있을 가능성 이 높다.
그의 부족에 현무단이 붙잡혀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 상황.
최 악의 경우엔 전면전을 펼쳐야 할지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지.’
하무르 칸은 수많은 부족을 발아래 둔 대부족이다.
고작 여덟로 그들을 상대해 승리할 확률은 계란으로 바위를 부술 확률보 다적지 않을까.
그러다 조금 전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전쟁을 억제하고 하무르 칸과 대담을 나눌 방법.
“이봐, 자갈타이.”
“•••말하시오.”
“고작 살아남는 건 어렵지 않아. 사실 이 초원에 서 도망치 기만 해도 삶은 연명할 수 있잖아. 근데 그렇게 살고 싶은 건 아니잖아, 그치?”
“ 맞소.”
그리 크지 않은 부족이 라곤 하나, 그 또한 한 부족의 족장인 몸.
작기는 해도 한 공동체 내에서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수장이 라는 뜻이다.
권력은 크든, 작든 한 번 맛보게 되면 놓칠 수 없게 되는 법이다.
자갈타이 또한 마찬가지.
그가 원하는 건 단순한 연명이 아니라, 지금 같은 삶을 누리고 싶다는 의미 도 포함되 어 있었다.
“좋아, 내가책임지도록 하지.”
백우진이 웃으며 흔쾌히 책임지겠다 말하자, 자갈타이는 오히려 불길함 을느꼈다.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그였기에, 백우진이 그런 식으 로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 다.
“이봐, 자갈타이.”
백우진이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은근한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애석하게도 지금의 권력을 유지한 상태로 삶을 연명하기는 불가능해.”
“그럼 어쩌란 말이오. 내 부족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밖에 없다, 이 말을 하고싶은거요?”
그거 울분에 찬 소리로 말하자, 백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한테 네 운명을 한 번 맡겨보는 건 어때.”
“•••운명을 맡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요?”
“말하자면 도박이지.”
“도박…?”
그래, 도박이다.
전부와 전무.
승자는모든 걸 얻고, 패자는모든 걸 잃게 되는 건곤일척의 칼끝승부.
“잘만되면 년 초원의 왕이 될 수도 있어.”
어때.
“그 정도 보상이면 한 번쯤 인생을 걸어볼 만하지 않나?”
자갈타이는 생각했다.
혹시 이놈은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찾아온 악마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
자갈타이 부족으로부터 하루 거리에 위치한우루치 부족.
낮은 목책의 입구를 지키고 선 전사의 앞으로 얼굴을 까맣게 칠한 타부족 전사 둘이 나란히 걸어와 멈춰 섰다.
우루치 부족의 전사는 꼬나쥐 고 있는 창을 앞으로 들이 밀어 그들의 앞에 겨눴다.
“누구냐!”
그의 외침에 좌측에 선 전사가그를 향해 소리쳤다.
“나는 자갈타이 부족의 전사, 사무르 장!”
옆에 있던 다른 전사도 그에 호응하듯소리친다.
“마찬가지로 자갈타이 부족의 전사인 과, 광수르.”
그들은 백우진의 명에 따라 자갈타이 부족의 전사로 다시 변장한 장삼과 구왕수였다.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우리는우루치 부족을 복속시키러 이곳에 왔다!”
“쓰, 쓸데없는 피를 흘리고 싶지 않으니 투항하라!”
우루치 부족을 향한 자갈타이 부족의 선전포고.
그것은 비 단 우루치 부족에 서 만 벌 어 지 고 있는 일 이 아니 었다.
“웬 미친놈들이 감히 … !”
라고 했던 우루치 부족은 두 사람의 합동 공격에 무너져내 렸다.
“자갈타이 부족을 따르겠소….”
침통한 표정으로 충성을 맹세하는 우루치.
비 단 이 것은 우루치 부족에 게 만 일어 나고 있는 일은 아니 었으니.
“나는 자갈타이 부족의 …!”
자갈타이 부족으로부터 하루 거 리 에 있는 작은 부족들이 전부 복속되 었 다.
그가 생각하기에 전쟁을 피할방법은 두가지뿐이었다.
...
!...
그들에게 철저하게 복종하거나, 그들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강력한 힘 을 보유하거나.
그들에 게 복종한다는 선택 지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 .
차선책 으로 자갈타이 부족을 중심으로 주변 부족을 통합하여 커다란 부 족을 만들기로 했다.
하무르 칸이 라는 지도자 아래 똘똘 뭉친 이들에 비해 질적으로는 떨 어지 겠지 만, 겉으로 드러나는 부피 라도 크게 부풀려 놓으면 그쪽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못할 테니.
이를 위해 백우진은 조원들을 둘, 둘, 셋으로 짝지어 주변 부족의 복속을 맡겼다.
그들이 명령에 따라 주변 부족을 하나둘씩 복속시 키는 동안, 백우진은 말 을 타고 초원을 내달렸다.
오랜만에 백우진은 완전히 혼자가 되 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그녀에 게 자갈타이 부족 근처에서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
말이 쉴 시간을 제외하면 밤낮으로 초원을 내달리기를 나흘째.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의 끝자락에 크기를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대 부족이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하무르 칸의 부족이었다.
“어마어마하네….”
그들과 견줄 만한 부족을 만들겠단 생각은 애초부터 잘못되 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저 정도 크기의 부족이 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부족을 복속시켜야 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백우진은 초원에 드문드문 존재하는 커다란 바위에 말을 묶어놓고, 육포 를 안주삼아 술을 마시며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몸을 숨길만 한 지 형 지물이 존재 치 않는 초원 이 었기 에 조금 더 수월 하게 움직 이 려면 밤이 되 기를 기 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해는 생각보다 빨리 저물었다.
붉은 노을이 저물고, 어둑한 밤이 찾아왔다.
밤하늘을 밝게 비추는 달마저 때마침 흘러가는 구름에 자취를 감추었을 때.
비 로소 백우진은 몸을 일으켰다.
“이제 가볼까.”
두터운 밤의 기운이 장막이 되어 그의 몸을 감쌌다.
자취를 감춘 그의 걸음이 하무르 칸의 부족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리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 들었다.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전사들과 초원의 부족이라곤 믿을 수 없는 목조 건 축물까지.
그들은 이미 부족이라고 부르기 힘든 지경까지 와 있는 듯했다.
“어우, 이건 안되겠는데.”
부족 주변을 빙 둘러보던 백우진은 밤의 장막으로 내부에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하겠다고 판단했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불빛들에 빽빽하게 자리 잡은 전사들까지.
안으로들어서자마자몇 걸음 가지 못해 정체가발각될 게 분명했다.
“어쩔수 없나….”
최 악의 경우는 이미 상정해두었다.
지금의 경지로 펼칠 수 있는 밤의 장막으로도 그들의 눈을 속일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서도 답또한마련해 두었다.
웬만해선 사용하고 싶지 않았을 뿐.
허나 여 기까지 온 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 부족 내에 현무단이 잡혀 있는지, 아닌지까지는 알아내야만 했 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마음을 굳게 먹은 백우진이 하무르 칸 부족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일렁이는 불빛에 그의 발아래 기다란 그림자가 생겨난다.
백우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제 그림자에 손을 가져갔다.
츠츠츠츠-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미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그림자 안으로 스며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