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잠입
세상이 온통 회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그와동시에 백우진의 몸주변에 짙은회색빛 불똥이 튀어 오른다.
이는 경고였다.
초대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자에게 보내는 위협적인 경 고.
백우진은 제 손가락을 내려 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시시각각 제 영토를 넓혀가는 중이었다.
‘생각보다침식이 훨씬 빨라.’
이 세상, 영계(影界)에 허락된 색상은단하나, 회색뿐.
무엇이 더 짙고, 옅냐의 차이는 있을지 언정 다른 색상은 눈을 씻고 찾아봐 도볼수없다.
그 이유인즉, 어떤 것이든 이 세상에 들어서는순간 고유의 색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손끝이 회 색 으로 물드는 건 그러 한 이 유에 서 였다.
이 땅에서 유일하게 회색이 아닌 색을 지닌 백우진을 물들이 기 위해 세상 전체 가 으름장을 놓고 있는 것이다.
‘최대한 빨리 움직이자.’
옛날에 비해 경지가 한참 낮은 탓인지, 침식 속도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
그는 밝게 타오르는 횃불과 때마침 구름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넘나들며 빠르게 부족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다른 부족과 달리, 하무르 칸의 부족은 목조 건물도 여럿 지어져 있었다.
이곳은 이미 하나의 부족이 아니라 마을로 봐야 할 수준으로 보인다.
그만큼 넓고, 복잡했다.
‘그래도 잠영을 택한 건 최고의 선택이 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백우진은 영계로 파고드는 ‘잠영(鱢影)’ 을 사용하는 것에 회의 적이었다.
영 계는 허 락되 지 않은 자가 드나들기 엔 너무나도 위 험한 곳이 다.
자칫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간 어떤 식의 문제를 떠 안게 될지도 모르기에 .
그러나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부족이 넓은 만큼 전사들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또한 그들 하나하나의 기 세 가 생 각보다 날카롭다.
경지는 삼류부터 일류까지 제각각이지만, 경지의 고저를 불문하고 날이 바짝서 있다.
‘전장에서 만나기 제일 싫은놈들투성이야.’
저런 놈들은 약하고, 강하고를 떠나 전장에서 만나기 싫은 부류에 속한다.
죽이기 전까지 악착같이 달려들기에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해지기 때문.
회색빛이 시시각각조여들며 그를 위협하고 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여러 갈래로 길이 뻗어 나가는부족의 중앙에 멈춰 선 백우진은 생각했다.
‘여기 전부를 둘러볼 시간은 없다.’
침 식 속도가 예 상보다 빠른 탓에 가장 의 심되 는 곳들만 확인하는 데 에도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진다.
‘만약 현무단이 이곳에 잡혀 있다면….’
하무르 칸이 라는 자가 바보가 아닌 이 상 다른 곳보다 경 계 가 삼엄할 터 .
백우진은 전사들의 기세가 가장 많이 느껴지는 곳들을 피하지 않고, 오히 려 그쪽 위 주로 확인하기 로 마음먹 었다.
생각을 마친 그의 행동이 한층 빨라졌다.
전사들이 모여 쉬는 쉼 터를 지나고, 온갖 장신구로 몸을 치 장한 여 인의 움 막을지나쳤다.
부족 안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든 백우진은 그 어떤 곳보다 경계가 삼엄한 두 곳을 발견했다.
하나는 도저히 움막이라곤 믿기 힘든 수준의 거대한 움막이 었다.
‘저기에 하무르 칸이 있을 것 같은데.’
부족 내에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고, 주변을 둘러싼 전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이 것만 봐도 그 안에 중요한 사람이 있으리 라고 짐 작케 했다.
‘저기를 제외하면….’
남은 곳은단 하나.
하무르 칸의 거처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곳에 위치한목조 건물.
겉보기엔 평범한 건물이다.
그런데 전사둘이 입구를 지키고 있고, 네 명의 전사들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주변을 순찰하고 있다는 건 그만큼 중요한 게 들어 있다는 뜻 아니겠나
•
눈을 부릅뜬 그들의 삼엄한 경계를 유유히 뚫으며 백우진은 안으로 들어 섰다.
움직 이는 그림 자나 다름없는 상태 인 그는 미 약한 틈만 있다면 어디든 들어갈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선 건물 내부는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실종된 현무단 또는 중요한 게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안이 텅텅 비어 있다.
하지만실망하기엔 이르다.
“그러니까 더 수상하지.”
아무것도 없는 건물의 입구며 주변을 그토록 둘러싸고 있을 리 가 없잖은 가.
이곳에 무언가가 있음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게 어디에 있느냐는 건데….’
건물은 그리 넓지 않았다.
더군다나 무언가를 숨길만 한 가구나 장식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의심이 되는 곳은 단연 바닥.
“후우!
백우진은 짧게 숨을 내뱉으며 그림자 속에서 빠져 나왔다.
“끄응…!”
온몸의 근육과 뼈가 비명을 질러대고 있다.
적잖은 시간동안 영계에 머무른대가였다.
사실 이러한 고통은 아주 값싼 대가에 불과했다.
진짜 심 각한 건 침 식 이 진행되 어 회 색으로 물든 손이 었다.
영계가 제 안으로 들어온 물체를 회색으로 물들이는 이유는 그것을 제 세 상의 일부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 손을그대로 두었다간 손의 소유권을영계에 빼앗기게 되어 다시는사 용할수 없게 된다.
다행히 신체의 일부분만침식된 상태기에 되돌릴 여지는 남아 있다.
백우진은 내공을 끌어올려 손에다 들이붓듯이 밀어 넣었다.
파츠츠츠
물밀듯이 밀려오는 내공과 영계의 기운이 충돌한다.
잠시 팽팽했던 두기운의 기세가 내공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었다.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영계의 기운은 말끔히 소멸하여 사라졌다.
원 래의 색으로 돌아온 손을 몇 번 쥐 락펴 락하며 감각을 되 찾은 뒤 , 백우진 은 곧장 허리를 숙이고 앉아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찾았다.”
먼지 가 잔뜩 쌓인 바닥을 슥슥 훑어 가던 손가락에 무언가가 걸렸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얇은 틈새 였다.
백우진은 곧장 주변에 기운을 흩뿌려 소음을 차단한 뒤, 검을 뽑아 틈새에 찔러 넣고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힘을주어 들어 올렸다.
그러자 원래대로라면 특정한 방식에 의해서만 열려야 할 두꺼운 바닥이 홀라당 뒤 집혀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드러났다.
“이거 뭔가….”
계단 너머로 내리깔린 짙은 어둠.
이를 본 백우진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불길함을 전하는 넘실거리는 어둠과 코끝을 강하게 찌르는 죽음의 냄새.
당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지하를 발견했을 때와 똑같았다.
“이로써 하나는확실하네.”
하무르 칸이 마교와 손을 잡았다는 것.
그것만큼은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백우진은 넘실거리는 어둠을 파헤치기 위해 안력을 한껏 돋우며 발걸음 을 내디뎠다.
한걸음, 다섯걸음, 열걸음.
계단을 내려갈수록 그는 형언하기 힘든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이거진짜 별론데.”
그는 더 내려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췄다.
꺼림칙하다.
이 아래로 내려가면 위험할 것 같다고, 계속해서 경고를 보내온다.
지금이 라도 발걸음을 돌릴까 생 각도 했지 만.
“•••좆됐네.”
늦었다.
되돌아가는 선택지를 만지작거리면 무언가 변화가 찾아와야 하는데 똑같 이 꺼림칙하다.
뭔지는 몰라도 무언가가 자신을 옥죄 어 오고 있는 걸지도.
백우진은호리병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뒤, 멈췄던 걸음을 다시 움직였 다.
목표는지하.
이 러나저러 나 똑같은 상황이 라면 차라리 하나라도 더 보고, 들은 뒤 에 활 로를 찾자.
조심스럽게 한 계단, 한 계단밟아내려가던 걸음에 거침이 없어졌다.
그는 성큼성큼 내려가 단숨에 어둠을 뚫고 지하에 도달했다.
“후우….”
여전히 어둡다.
또한 그 속에서 온갖 것들이 그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
백우진은 하는수 없이 다시 한번 그림자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영계에서 어둠은 무용지물이다.
어둠이 서서히 사라지고, 회색빛 세상이 그의 눈을 대신 메웠다.
그렇게 나타난 건 다름 아닌 감옥이 었다.
두꺼운 쇠창살이 빼곡하게 박혀 있는 아무 튼튼한 감옥.
각 감옥마다 강렬한 기척이 느껴 진다.
백우진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가장 근처에 있는 쇠창살 앞으로 향했다.
“그르믉….”
짐승의 울음소리.
허나 쇠창살 안에 든 것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다.
“뭐야, 저건.”
그것을 본 백우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그것은분명 인간의 형태를하고 있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동공은 까맣게 물들었고, 손톱은 웬만한 명검과 견주어도 손색 이 없을 만 큼 날카롭게 자라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신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수준의 크기 였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숨을 내쉴 때마다 짙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모든 걸 종합하면 그 정체는 단 하나로 귀 결된다.
“마인…, 인가.”
백우진의 두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마인은 인간에게 강제적으로 마기를 주입하며 만들어내는 괴물이다.
체내에 주입된 마기가 비정상적인 폭주를 일으켜 그의 이성을 말살하고, 그 과정에서 신체 또한 비정상적인 변형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눈앞의 마인은 어떠 한가.
근육의 발달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보면 인간이라고 착각 할 만한외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
백우진의 머릿속에 당가에서 보았던 비밀 실험실이 떠올랐다.
남몰래 사람을 납치하여 행해진 비인간적인 실험들.
어쩌면 이곳에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마인 개량을 위한 미친 실험이 진행 되고 있는걸까.
“이런….”
우연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동공이 마인이 인간이었을 적에 입고 있었을 것으로 추 정되는 의복의 잔해를 발견한 것은.
“씨발.”
갈기갈기 찢어진 의복에 적힌 글자는 ‘현(玄)’.
그것은 현무단의 상징 이 었다.
말인즉,눈앞의 마인이 현무단원이었다는 것.
두근! 두근!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백우진은 마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안면 근육도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탓에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눈앞의 마인이 적어도백무혁이 아니라는 것.
“후우….”
거칠게 뛰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는다.
하지만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것만은 변하지 않았다.
백 우진은 또 다른 쇠 창살의 안을 들여 다봤다.
비슷한 형태의 마인이 어김없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역시나 그 또한 현무단원이었는지, 발아래 찢겨진 의복의 흔적들이 보였 다.
‘아니다.’
다행히 이번에도 백무혁은 아니었다.
기다랗게 놓인 쇠창살에는 전부 비슷한 형태를 한 마인들이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절반 정도가 현무단원 이 었다.
사실상 파견 나온 현무단원 중 거의 대다수가 마인으로 변해버린 상황.
그럼에도 백우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아직까지 백무혁으로 추정되는 마인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기에.
“후우….”
몸을 서서히 조여오는 불안감을 애써 털어내며 마침내 기다란 길의 끝에 다다랐다.
백 우진은 마지 막 남은 쇠 창살 너 머를 들여 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견했다.
팔과 다리에 쇠사슬을 동여맨 채 벽에 묶여 있는 백무혁을.
백우진은 곧장 영계 에서 빠져나와 검기를 두른 검을 휘둘렀다.
서걱-
쿠궁!
쇠창살을 자르고 들어가 백무혁의 팔과 다리를 구속하고 있는 쇠사슬도 모조리 끊어냈다.
백 우진은 자연스레 앞으로 쏟아지 는 그를 받아 바닥에 눕혔다.
“형.”
축 늘어져 있던 그의 몸이 움찔거리며 반응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갈라진 입 술 사이 를 비 집고 새 어 나오는 신음.
마침 내 정신을 차린 백무혁 이 힘 겹 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정신이 들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백무혁은 제 눈을 의심했다.
“우•..진이냐?”
이곳에 있어선 안될 제 동생이 눈앞에 있었기에.
죽을 날을 앞두고 꿈을 꾸는 것인가 싶었으나,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던 쇠사슬 탓에 느껴지는 통증이 그 에게 현실감을 선사했다.
‘꿈이…, 아니다.’
자신은 여전히 갇혀 있고, 눈앞에 있는 것은 백우진이 맞았다.
백무혁의 두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네가여길 왜…!”
무사한 형의 모습을 확인한 백우진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는지 가볍 게 웃는 얼굴로 그의 물음에 답했다.
“서찰보내놓고 안오길래 찾으러 왔지.”
“아, 이런…!”
생각해 보니 무림맹을 나서기 전에 동생에게 서찰을 보냈었다.
요녕 에 조사차 들렀다가 끝낸 후 돌아가겠다고.
그때 이후로 자신은 아무런 소식조차 전하지 못했으니, 백우진을 이곳에 부른 것은 결국 자신의 탓이 라는 뜻이 었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백우진에게 재차 물었다.
“이곳은 어떻게 찾았느냐.”
“요녕에서부터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지.”
“그럼 혹시.”
백무혁이 간절한표정으로그에게 또 한번 물었다.
“모용세가의 도움을 받았느냐.”
“어…, 사소한도움을 받기는 했지.”
바르탄을 죽게 만든 건 통탄을 금치 못할 실수였으나, 물질적인 도움을 받 기는 했다.
“아…!”
그러자백무혁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그렇다면 늦었구나.”
“그게 무슨 뜻이야.”
그의 말투에서 불길한 낌새를 느낀 백우진이 얼굴을 굳히며 반문하자, 백 무혁 이 두 눈에 강렬한 증오를 내비치며 말을 씹어 뱉 었다.
“모용진천, 그자가우리를 팔아넘겼다. 아니, 한패였다고 하는 게 맞겠지.”
猌,,
전해지는 거센 충격에 말문이 막혀오던 그 순간.
두사람의 대화소리만이 유일한소음이었던 감옥에 또다른 소음이 끼어 들었다.
끼이익-
요란한 쇳소리 가 귓전을 때린다.
| |.....
...
그와동시에 모든 감옥의 문이 일제히 개방됐다.
쿵-쿵-
열린 문 너머로쇠창살 안에 쥐 죽은듯서 있던 마인들이 걸어 나왔다.
“크르르…!”
인간에 대한 강렬한 살의를 품은 수십 쌍의 검은 눈동자가 일제히 백우진 에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