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마■경
흐릿한 동공으로 빛이 스며든다.
“아침…, 인가.”
정신이 몽롱하다.
멍한 눈빛으로 그녀 가 앉아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꿈을 꾼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치료를 이어가며 자신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뭐였지….”
정확히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비몽사몽했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치료를 끝마쳐갈 즈음, 그녀 가 자신을 바라보며 짓고 있던 표정 한 자락.
그녀는 마침내 마음을 다잡았다.
무엇을 위한 다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리 라.
“좀 서글프네.”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5,700자 한 번 썼다고 마왕 모가지 딸 운명에 처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젠 무림까지.
심지어 마지막 상대 가 다름 아닌 전 여친이 다.
심지어 아직 사랑해 마지않는, 미련이 뚝뚝묻어 나오다못해 질질 흐르는 전여친.
“꼬여도 단단히 꼬였어, 아주.”
쓰게 웃으며 백우진은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개운하다.
무림에 온 이후로 이 렇게까지 좋았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몸 상태가 최 상이다.
불안정하게 타오르고 있던 체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하다.
단순히 상태만 괜찮아진 게 아니 었다.
혈도를 타고 흐르는 내기는 더욱 짙어졌고,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 바람 의 가호라도 깃든 것처럼 가볍고 표홀해졌다.
“이건….”
아무래 도 지 난밤의 치 료가 단순히 마기를 빨아들이 는 것으로 끝나지 않 은모양.
백우진은 곧장 검을 뽑아 기운을 흘려 넣었다.
검 위로 아지 랑이 가 피 어오른다.
검기 (劍氣).
평소였다면 여기가 끝이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어가며 타오르는 검 기는 그 뒤 로 주기 적으로 적은 양의 내공을 소모하여 형태 를 유지 한다.
그런데 오늘의 끝은 검기가 아니었다.
검기를 이룬 뒤에도 검은 게걸스럽게 내공을 먹어 치웠다.
과도하게 몸을 부풀린 아지랑이가 얇은 실오라기로 변해 검을 촘촘하게 감쌌다.
그렇게 촘촘하게 짜여 올라간실오라기는또 하나의 검이 되었다.
두꺼운 무쇠조차 두부 썰 듯 갈라버릴 수 있는, 검강(劍鵫)의 발현이 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올라섰네.”
범인은 평생을 두드려도 허물지 못할 벽을 하룻밤 사이에 부수고 넘어가 마침내 화경(化境)의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
인지의 벽을허물자, 감각이 급속도로확장되기 시작한다.
더 많은 소음, 한층 강렬해진 존재감, 살갗에 닿는 공기로부터 느끼는 예 민함까지.
화경에 처음오른 이들은 이 부분에서 제법 괴로워한다.
인간의 영역을 확실하게 초월해버린 감각이 미쳐 날뛸 때마다 너무나도 많은 것들을 강제 적 으로 느껴 야만 하기 에.
그러나 백우진은 이러한 감각이 괴롭다기보다 오히려 반가웠다.
“이제야 좀 살만하네.”
감각은 단순히 넓 어지 기 만 하는 게 아니 다.
동시에 더 예민해지고, 더 깊어진다.
한껏 치 장한 화려한 겉부분을 강제로 들어 내 조금 더 본질적 인 부분을 바 라볼수 있게 된다.
그것이 화경의 고수들에 게 얕은수나 속임수가 잘 통하지 않는 이유다.
“이런느낌이라면….”
그는 노인에게서 전해 들은 천마신공의 구결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았다.
고작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두리뭉술한 구결들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다가왔다.
백 우진의 한쪽 입 꼬리 가 올라갔다.
천마신공을 익히는 데에 있어 높다란 장벽으로 작용하던 구결들이 대다 수해소되었다.
‘ 가능하다.’
지금 상태라면 천마신공이 어떤 무공인지 맛 정도는 볼 수 있을 듯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천마신공은 고금 제일의 무공으로 불리는 걸까.
제 아무리 닳고 닳아도 무인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
역대 천마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에 한 발 더 다가서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당장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마신공의 구결을 마음속으로 읽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되지.’
그는 가까스로 참아냈다.
여기선 할수 없는 일이다.
아니,해선 안되는 일이라고보는게 맞겠지.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초절정에서는 느끼지 못 했던 은밀한 시선이 느껴 진다.
누군가가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다.
이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자에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느낌.
이러한 일이 가능한 사람은 천마신교, 아니, 무림 전체를 통틀어도 몇 존재 하지않을 터.
천마가 자신을 내 려다보고 있는 게 틀림 없다.
감시 인가, 아니면 단순히 관찰인가.
백우진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 어 까무룩 잠들기 전 보았던 그녀의 표정 을 상기했다.
그는 그녀를 잘 안다.
용사라는 허울 좋은 이름만 달고 있는 백우진에게 사명감, 이타심, 배려심 이 무엇인지 알려준 누구보다 정의롭고, 다정한 사람.
그런 그녀 가 필연적으로 남을 짓밟아야만 하는 천마로서의 삶을 받아들 였다는 것은, 평생 가꿔온 제 삶의 가치를 모두 바치는 한이 있더 라도 가지고 싶은,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일 터.
‘멈출수는 없겠지.’
어쭙잖은 각오로는 그녀를 막을 수 없다.
그랬다간 도리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테지.
더 단단한 결의와 결심 이 필요하다.
먼 훗날 칼을 맞대 게 되 리 라는 단순한 예 상과 이를 준비하는 마음가짐 이 아니 라, 반드시 그녀를 죽이고 말겠다는 비정한 마음으로 자신을 둘러싸야 만한다.
백 우진은 힘 없이 웃으며 고개 를 저 었다.
“그게 쉽겠냐고….”
그에게 있어 동료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매우 다양하고, 광범위했다.
친구, 연인, 가족.
빈털터리 나 다름없는 백우진에 게 동료란 이 모든 걸 포함한 포괄적 인 존 재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았던 이 가 있었겠냐만.
‘안제.’
안젤리카 하츠.
그녀는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고, 각별했다.
그녀는 한 사내가 평생 안고 살아가게 될 의미를 수없이 가져간 사람이다.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첫 친구였고, 예견된 험난한 가시밭 길에 흔쾌히 함께 올라서 준 첫 동료였으며, 언제나 혼자였던 제 곁에 다가와 준 첫가족이었다.
동시에.
첫사랑이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잊지 않고 떠올리는 열렬한 첫사랑.
제 게서 그토록 많은 의 미를 훔쳐 간 사람을 죽이 겠다고 결심을 내리는 건 쉬운일이 아니다.
“이런게 업보라는 거겠지.”
이곳에서 그녀의 진심을 알게 된 순간, 백우진은 후회했다.
조금 더 이 기적으로 나갔더라면.
그녀의 검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뻔뻔한 태도로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다 면.
그러다문득, 이곳에서 만난사람들이 떠올랐다.
제 말이라면 믿고 따르는 조원들과 죽어서도 자신을 사랑하겠다 맹세한 여인들.
그때에 대한 후회는 그들 모두를 제 알량한 후회 속으로 밀어 넣는 일임을 깨달았다.
“•••보고싶네.”
밤마다 당돌하게 유혹해오는 당선영, 소매를 잡고 좌우로 세 번씩 흔들면 그것이 신호라고 말하며 매일 같이 흔들어대던 제갈연지.
먹을 거 주면 되게 좋아하는 설수연, 남들은 혐오하는 주인님 이란 단어에 집착하는 송희 연, 그다지 오랜 시간 곁에 있지는 못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심 어주었던 도경.
차가운 표정으로 제 곁을 든든히 지켜주는 혈수마녀, 정혜까지.
아, 덤으로 뺀질거리는 장삼과 구왕수도.
그들을 잃고 싶지 않다.
..
........
그런데 그녀 또한 잃고 싶지 않다.
“으 O •
백우진은 한없이 불가능에 가깝지 만, 해낼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내 가강해지면되는구나?”
그녀가 어떤 수를 사용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 면 된다.
대략천마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손쉽게 상대할수 있는 정도가되 면되지 않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 다.
그러나 나름대로의 가능성은 엿보았다.
천마신공.
고금 제일의 무공이라 불리는 그것을 제대로 익히고, 나름대로 변형을 가 할수만 있다면.
그는 곧장 전각을 나섰다.
목적지는 마경.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고, 동시에 활로를 엿보게 한 사지로 그는 다 시금 걸어 들어갔다.
지독한 두통이 몰려온다.
“크으으…!”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으나, 그는 이 고통이 싫지 않았다.
그가그로써 존재할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일러주는 것이기에.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아내며,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남들은 거기서 거기인 곳으로 보일 테지만, 그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어렵지 않게 가늠이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해질 만큼, 이곳에서 오래도록 살았다.
위치를 가늠한 그는 곧장 달렸다.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제법 커다란 동굴이 존재했다.
안으로들어서자한쪽 벽면에 바를 정(正)자가수도 없이 새겨져 있다.
그것들을 토대로 날짜를 가늠하던 그의 안색이 눈에 띄 게 흐려졌다.
“점점 더 길어지고 있군….”
사흘, 나흘, 닷새 그리고 일주일.
돌아오는시간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남은 결말은 뻔하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 평생 마경을 헤매 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 거나.
어느 쪽도 좋은 점 이 라곤 하나도 없는, 불명 예스럽고 치욕적 인 선택 지 뿐 이었다.
“정녕 안되는것인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쳤건만.
그럼에도 부족했던가.
이 제는 정말 포기해 야 하나 진지 하게 고민을 이 어 가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으음…?
으레 느껴 지는 마인 또는 마물과는 전혀 다른 느낌 .
“사람…, 인가.”
그는 저도 모르게 반가움을 느꼈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게 대체 얼마만인지.
그는 곧장 동굴을 나섰다.
목표는 기척이 느껴졌던 장소.
“•••오랜만에 만난사람이니, 적어도 사람으로죽게 해주마.”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대체 무슨 연유가 있기에 이곳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끝 없이 이어지는고통에 시달리며 마인이 되게 두느니, 고통 없이 삶을 끝내주 는것이나으리라.
넝마주이를 휘 날리며 도착한 그는 마경을 거니는 사내를 발견하고 제 눈 을의심했다.
‘마경에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어떤 식으로든 마경에 흘러 들어온 이들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같은표정 을 짓고 있다.
공포와 두려움.
헌데 사내의 얼굴에는 그러한 감정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집 앞마당에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표정이며 걸음걸이가 여유롭기 짝 이 없다.
느긋한 시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내, 백우진의 시선이 마침내 그 와 마주쳤다.
그가 잠시 긴장하는 사이, 백우진은 매우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영감. 거기 계셨수?”
그는 눈가를 좁히며 백우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잘 아는 것처럼 얘 기하는 말투.
‘이미 본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자신이 정신을 잃고 이곳을 헤매는 사이 마주쳤던 모양.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백우진이 선심 쓰듯 말했다.
“자, 약속대로 왔으니 술래잡기 나 다시 합시다. 대신 놀이 끝나면 나한테 천마신공 가르쳐주는 거 잊지 마시고.”
“••••••?”
이를들은노인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했다.
뭘하고,뭘 가르쳐?
“이번에는 내가 술래였던가? 그럼 어서 숨으쇼.”
익숙하게 나무에 얼굴을 파묻고 숫자를 세는 백우진.
그 모습을 본 노인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 작했다.
‘설마…, 내가수, 술래잡기 따위를…?’
노인은 기껏 돌아온 정신이 다시 아득히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