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탐 ( 1 )
카나기, 공생의 학파.
괴물을 사냥하거나, 괴물을 기르고 통제하는 마술을 연구하는 학파. 그들은 진귀한 괴물의 새끼를 그 어미로부터 훔치기 위해, 사람을 해하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세력권을 위협하는 적을 쫓아내기 위해, 그런 갖가지 이유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 그 검은 그중 무엇도 아닌 해괴한 이유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개 도둑질을 하려고 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돌려주세요!"
"제기랄, 바지 벗겨져! 놔!"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자신의 허리에 달려드는 여자를 우악스레 떼어내는 남자. 그 여자는 다이너의 여주인이었다. 남자는 패잔병 신세로 북서 자치령에서 머무르고 있는, 카나기의 1위계 마술사다.
그는 시커팩 개 한마리와 장사를 하고 있는 다이너를 덮쳐서는, 여자도 돈도 놔두고 시커팩 개를 이렇게 억지로 질질 끌고 가는 중이었다.
"마술사님, 그놈이 없으면 저는 그냥 여기서 굶어 죽습니다. 차라리 여기서 베어 죽여주십시오."
"오냐, 네 말대로 해 주마."
뻥! 갈색 머리의 여자를 걷어차고 칼을 뽑아드는 카나기. 관리 상태가 좋지 못한, 이가 상한 장검이 햇빛을 받아 푸르게 빛난다. 여자는 뒤로 개구리처럼 넘어진 상태로,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질렀다.
"응?"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떴다. 날아들 거라고 생각했던 검은 날아들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든 환도가, 그 검을 형편없이 깨뜨려버렸기 때문이었다.
"누, 누구냐!"
인근의 풀숲에서 마치 뱀처럼 뛰어올라 자신의 칼을 깨부숴버린 하얀 머리의 남자를 보고, 경악해 소리 지르는 마술사. 그 하얀 머리의 남자, 이제 아나테마가 된 아이는,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환도를 둥글게 휘둘러왔다.
"커헉!"
가슴에 차고 있던 엄심갑이 부서지고 배에 새빨간 상처가 길게 남았다. 얕은 상처였다. 카나기의 마술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 아이는 그 상처를 어깨로 들이받았다. 쿵! 뒤로 넘어지는 마술사. 아이는 그 마술사의 목을 발로 거세게 짓밟으며 몸을 곧추세웠다.
"그만, 그만! 또 죽일 셈이냐. 젠장, 이놈들이 대체 뭐하는 건지 알아야 하니 살려두라고 그랬잖나."
"이 정도면 쌩쌩하게 살려둔 상태죠."
"잠시 후면 죽어버릴 것 같잖나! 발 떼!"
입에서 비눗방울 같은 거품을 내며 마구 몸을 비트는 마술사를 보고 당황해서 외치는 마레. 아이는 그 발을 치우고, 마레는 손뼉을 쳐 남자에게 환술을 걸어 깊은 잠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카나기의 잡졸이, 다이너를 덮쳐 시커팩 개를 뺴앗아가려 하는 걸 목격한 것이. 마레의 자료를 따라 블로어가 있을 가능성이 두 번째로 높은 곳을 찾아가던 두 사람은 이 황당한 광경을 세 번이나 보아야만 했다.
첫 번째는 개인의 기호, 두 번째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세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달랐다. 이건 분명히 누군가의 조직적인 계획과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이 놈들, 대체 무슨 계획을 세웠길래 이따위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거야?"
두 번째 놈을 만났을 때 붙잡아 심문하려 했지만, 아이가 너무 난폭하게 손을 쓰는 바람에 이미 절명해서 심문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레는 다음에 똑같은 일이 있거든 절대로 손속을 과하게 써서 목숨을 빼앗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둔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어? 이런, 저번에 만났던 아가씨군. 저번에 건넨 장미는 아직 잘 간수하고 있나?"
조디악이 덮친 마을로 찾아가는 갈림길, 그 갈림길에서 장사를 하던 갈색 머리 아가씨였다. 마레는 그것을 알아보고, 눈물범벅이 되어 개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이는 여자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어떤가, 이게 다 주의 뜻 아니겠나? 이제 아름다운 아가씨의 귀에 꽂혀 있던 장미는, 그 심장으로 뿌리를 뻗어 이미 그 마음에는 나에 대한,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신앙의 푸른 꽃잎을..."
"역겨운 수작 그만 부려요!"
"흐어어억!"
또 박치기를 얻어맞고 나뒹구는 마레. 울면서 연신 고개를 숙이던 여주인은 그 꼴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
로프로 꽁꽁 묶인 채 너른 바위 위에 제물처럼 놓여 있는 카나기의 잡졸.
그 로프를 묶은 장본인인 마레는 손을 털며, 자신의 속박이 제대로 되었는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 동안 아이는 식탁보를 깔고 앉아 라즈베리 파이를 먹고 있었다. 그들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다이너의 여주인이 장사 밑천을 다 털어 챙겨준 여러 답례품 중 하나였다.
그녀는 맛있는 요리를 여러 가지 즉석에서 만들어 대접하고 챙겨주더니, 시커팩 개와 함께 수레를 이끌고 사라졌다.
"됐어, 이제 이놈이 일어나기만 하면 심문을 시작할 수 있겠군."
마지막으로 로프의 매듭 점검을 끝낸 마레는 싸늘하게 말했다. 그리고 뒤돌아선 채로 아이에게 준엄하게 말한다.
"너는 여기에 없는 쪽이 나을 거다."
"왜요?"
"이 놈이 일어나면, 안 보는 게 나은 광경이 펼쳐질 테니까. 너 같은 꼬맹이 정서교육에 안 좋다."
평소의 유들유들함이나 장난기가 완전히 빠져 있는 냉혹한 목소리였다. 그 말에 압도된 아이는, 주섬주섬 보따리로 파이와 각종 음식을 싸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대로, 몇 시간 정도는 자리를 피해 있을 생각이었다.
*
연초록 풀잎이 어린아이의 키만큼이나 높다랗게 자라 있는 풀밭. 갈색 바짓단을 습기로 적셔가며, 그 풀밭을 헤쳐나가던 아이의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응?"
다음 순간, 아이는 품에서 환도를 뽑아들어 날아드는 공격을 막고 있었다. 공격해온 무기는 쇠스랑이었다. 그 쇠스랑을 쥐고 있는 건 얼굴에 황금의 가면을 쓴 검은 인간. 레버넌트였다.
스사사삭ㅡ
풀숲 헤치는 소리가 적막을 메운다. 긴장감이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암습인가? 얼마 전, 그 마을에서 했던 일 때문에 암살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을지도 모른다. 스물을 헤아리는 레버넌트가 빠져나갈 틈 없는 거대한 원형의 진을 이루곤 아이를 조여들고 있었다.
손에는 하나같이 기다란 낫 같은 쇠스랑을 들고 있다. 아이는 두 손으로 환도를 쥐어잡고 어깨높이로 치켜든 상태로, 자신을 조여오는 레버넌트들을 바라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이였다.
"하압!"
곤충의 날개 같은 투명한 검날. 그 검날이 피로 물들어간다. 한 번의 칼질로 세 명의 레버넌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기다랗게 자란 풀숲을 이용해, 잠시 안 보일 정도로 몸을 숙인 아이가 솟구치듯 환도를 휘둘러 이뤄낸 성과였다.
"스아아악!"
그 일격을 이뤄낸 대가로 열린 아이의 등짝을 향해 네 개의 쇠스랑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 네 개의 쇠스랑 역시 별 득을 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거대한 쯔바이핸더가 네 명의 레버넌트를 그 쇠스랑째로 양단해버렸기 때문이다.
바웅ㅡ
거대한 파공음. 세 번 더 칼이 휘둘러지고 나자, 스무 명에 달했던 레버넌트는 모두 가면을 바닥에 흘린 채 쓰러지고 말았다. 아이는 가쁜 숨을 내쉬며, 레바테인을 집어 넣기 위해 검에서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황급히 다시 레바테인을 붙잡고, 날아드는 검기에 참격을 맞부딪혔다.
"윽!"
묵직한 중량을 실었으나 예리하기 그지없는 일격. 대태도의 일격이었다. 어딘가의 풀숲에서 나타난 대태도의 검사가, 원심력을 담아 크게 휘둘러 아이를 덮쳐온 것이었다. 레바테인을 놓으려는 찰나를 노리고 날아든 일격이었기 때문에, 검을 제대로 잡지 못해 레바테인을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대태도가 아이의 어깨를 비스듬히 베고 지나갔다. 튀는 피. 아이는 어깨를 붙잡고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을 덮쳐온 대태도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사형?"
얼굴에는 문둥이 가면을 쓰고 있으나, 그 기다란 검은 머리와 상처로 가득한 상체는 분명 사형, 레고르 보르지아의 것이었다. 그는 아이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더니, 곧 대태도를 붙잡고 투포환 선수와 같은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검의 끝에서 푸른 기운이 물밀듯이 차올라 검날 전체를 새파란 빛으로 물들인다. 그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일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쐐애액! 솟구치는 검. 아이는 황급히 림에게 또 다른 검을 청원했다.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검을.
"림! 유혼(幽魂)!"
깡! 큰 쇳소리. 그리고 두 개의 대태도가 공중에서 서로 부딪힌다. 부러진 쪽은 레고르였다. 아이의 손에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이빨을 뽑아 만든 듯, 새하얗기 그지없는 대태도가 들려 있었다. 레고르는 칼을 잃자 손잡이를 내던지고 뒤로 주춤주춤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 카나기를 죽이기 위해 림의 뱃속에 저장되어 있는 검. 요도 유혼이라고 불리는 검이었다.
"거기 서!"
뒤로 물러서는 레고르를 쫓기 위해 풀을 박차고 덮쳐드는 아이. 그러나, 잠시 후 황망해서 멈춰선다. 레고르가 밟고 선 바위가, 갑자기 우르릉 소리를 내더니, 하늘로 높게 치솟아 거인의 형상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바닥에서 솟아난 그 돌거인은 하늘을 바라보고 거대한 괴성을 질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잔'크낫츠? 아."
잔'크낫츠는 어깨에 레고르를 태운 채로, 깍지를 끼고 아이에게 그것을 휘둘렀다. 아이는 유혼을 휘둘러 그 주먹을 베어내려 했다. 유혼에 어리는 붉은 기운. 그러나 그 유혼은 잔'크낫츠의 주먹을 이겨내지 못하고 형편없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주먹에 깔리는 아이. 아이는, 잔'크낫츠에게 박살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림, 됐어! 이제 그만, 그만해! 네 사도 죽는 꼴 보고 싶어?"
'알았다, 어린 순례자야.'
다음 순간, 잔'크낫츠도, 레고르 형상의 검사도, 레버넌트의 시체도,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있는 것이라곤 풀밭에서 보따리를 들고 서 있는 아이뿐이었다. 녹초가 된 아이는 뒤로 털썩 주저앉았다.
"요즘 가면 갈수록 거짓말치는 연출력이 늘어나는 것 같아. 신답지 않게."
'칭찬인가? 고맙게 듣지.'
"아니거든!"
벌렁 드러누웠다가 보따리를 풀어 라즈베리 파이를 꺼내는 아이. 방금 겪었던 것은 림이 보여준 환상이었다. 실전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림은 가끔씩 이렇게 느닷없이 적이 출몰하는 환상을 보여주고 생사의 결투를 하게 만들곤 했다.
그 마무리는 항상 잔'크낫츠였다. 아직까지 아이가 보았던 적 중에서 가장 강한 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훈련은 비록 당할 때에는 질겁을 할 정도로 가혹했지만, 어떤 훈련보다도 아이를 크게 성장시키는 훈련이었다. 처음에 당했을 때에는 불평을 했던 아이도, 이것의 성과를 직접 확인하게 되자 두말없이 따르게 될 정도였다.
원래 처음에는 레바테인을 꺼내고 바로 휘두르는 걸 아주 어려워했던 아이는, 이 훈련을 세 번 정도 거치고 나자 검집에서 칼을 뽑아 쓰듯 아주 자연스럽게 레바테인을 청원할 수 있게 되었다. 림은 그런 아이가 대견스러워 씩 웃으며 말했다.
'네 성장 속도는 정말 대단하군. 거의 선주에 버금갈 정도야.'
"선주... 네 전 사도 말이지? 천 년 전에, 마술사 신 세 명을 죽였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림. 아이는 라즈베리 파이를 파이 껍질부터 갉아먹으며, 조용히 얘기를 시작했다. 마레가 심문을 끝마칠 때까지, 딱히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칼들도, 다 선주가 만든 거라고 그랬잖아. 그렇지?"
참마의 대검 레바테인, 요도 유혼. 그것을 비롯해 림의 뱃속에 남아 있는 일곱 개의 검의 형상은, 모두 선주가 마술사를 사냥하며 형을 깎아 저장한 것이었다. 레바테인은 아지프가 그 시체를 되살리는 바람에, 삶을 모독당하던 불의 산의 거인을 선주가 무찔러 안식을 선물하고 받은 검이었다.
아이는 둘 중 레바테인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마술을 쳐부순다는 곧은 의지가 아주 강하게 남아 있는 검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건 조금... 싫어."
유혼을 꺼내서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아이. 우선 대태도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본 가장 강한 대태도 사용자는 레고르였기 때문에, 정신을 차려보면 무의식적으로 레고르의 검세를 살짝살짝 베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게 정말 죽도록 싫었다.
두 번째로는 이 검에 남아 있는 끈적한 죽음과 증오의 기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이 검을 집었을때, 검이 아니라 어떤 짐승의 빗장뼈를 들고 있는 듯한 섬찟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내장과 피가 잔뜩 쳐발려진 빗장뼈.
"이건 대체 어떻게 만든 검이라고 했지?"
'이건, 카나기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살겁을 일으킨 6위계의 카나기 무반을 죽이고 그 놈의 검을 빼앗아 벼린 것이다. 그래서 카나기의 검사를 죽이는데 있어서, 아주 탁월한 효과를 가지고 있지. 놈들은 마술사이면서도 마력을 검에 넣어 사용한다. 이 검이 카나기의 검과 부딪히면, 그 마력을 전부 빨아들여 거꾸로 발출하게 되어 있다.'
조용히 설명해주는 림.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반? 그게 뭔데?"
'카나기는 괴물 사냥의 전통과, 괴물을 길들이는 전통. 두 가지의 전통이 합쳐져 성립된 종파다. 신에게 받은 힘을 검에 불어넣어서 괴물을 사냥하는 자들을 무반, 괴물을 길들이는 자들을 문반이라고 하지.'
'무반은 대부분의 경우 문반보다 푸대접을 받았다. 카나기의 학장은 대대로 문반이 했고, 고위직도 대부분 문반이 차지했으며, 무반은 단순한 사냥꾼 취급을 받았지. 그런데 어느 날, 6위계의 무반이 나타났다. 문반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 놈을 배신해 설산에 몰아넣곤, 가족을 전부 찢어 죽였고... 그래서, 그 무반은 미쳐버렸다.'
'가장 무서운 괴물은 인간이라면서, 자기도 괴물이 되겠다고 선언하고서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과 흰 옷 한 벌만을 입고서는 하레하둔을 헤매는 귀신이 된 거야. 그리고 인간을 보면 칼로 베어죽이고 글자 하나를 남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지. 그렇게 천 명이 죽었다던가, 만 명이 죽었다던가.'
"윽.."
소름 끼치는 이야기에 부르르 떠는 아이. 이 유혼에 붙어 있는 진득한 증오의 원혼은 그래서 형성된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보니 더욱 더 께름칙해서 쓰기 싫어졌다.
'그래서 원래 어두우나 그윽하다(幽昏)는 뜻으로 유혼이라고 불리던 검은, 어느새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망령(幽魂)이라는 뜻의 유혼으로 이름이 바뀌어버렸지. 그리고, 선주는 그 망령에게 안식을 선물해주었다. 나는 그 칼을 삼켜 이렇게 바꾸었지. 그게, 네가 들고 있는 검. 요도 유혼의 내력이다. 어때, 이제 좀 쓰고 싶나? 그 검은 아마도, 세상에 존재했던 어떤 검보다도 카나기의 피를 많이 먹은 검이야.'
"싫어. 정말 싫어졌어. 이게 뭐야. 다시는 안 쓸 거야."
정말로 짐승의 사체를 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유혼을 내던지는 아이. 림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아이는 라즈베리 파이를 하나 더 집어 입으로 가져가며, 지나가는 듯 물었다.
"그래서 림, 그 선주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어?"
림은 기묘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비밀이다.'
"에이, 그러지 말고 알려줘. 맨날 비밀이라고만 하고."
'비밀이야.'
"알려주면, 음, 이 라즈베리 파이 공양해줄게. 이거 그 누나가 준 건데, 엄청 잘 만들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파이 만드는 재주가 있나 봐."
아이가 끈질기게 말하자, 림은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미 935번 너에게 선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단다. 다만, 네가 전부 잊어버렸을 뿐이지."
*
'사실 나는 이미 935번 너에게 선주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단다. 다만, 네가 전부 잊어버렸을 뿐이지.
후.
선주는 신을 죽인 대가로
존재가 지워지는 형벌을 받았다.
금기의 에단, 그 녀석이 저지른 짓이지.
그래,
그렇게 역사에서 존재가 지워지는 벌이었던 거야.
그 녀석을 기억하는 건, 나뿐이야.'
'선주는 너보다는, 그래, 네 검은 머리 사형과 비슷한 인간이었다.
복수를 위해 헤매다 내 사도가 되었고,
닿는 모든 마술사를 베어 죽이며 전진했다.
그 죽인 자 가운데에는, 자신의 어머니도, 자신의 연인도 있었어.
내가... 그렇게 강요했다.
죽이기 싫다고 울부짖는 손을 붙잡고, 억지로 심장을 부수게 시켰어.
그때 나는,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마술사는 모두 기만하는 자이므로.
살려두어 봤자 내 사도가 다칠 것이라고만 생각했어.
한때의 감정만으로 이걸 살려주는 건, 우행이라고.
어쩌면 검이라기보다는, 인생 자체가 한 발의 마탄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언가의 생을 빼앗고, 스스로도 덧없이 부서져 흩어지는.
그런 삶이었다.
그렇게 강철 같은 의지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단련해서,
7위계의 마도사 셋과 겨루어도 지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갔다.
사람들은 모르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강한 사내는 그 선주였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단을 쓰러뜨리고 죽었는데,
내 얼굴을 만지면서 이름을 부르더구나.
자기가 죽인 연인의 이름을.
나는 나도 모르게 후회하느냐고 물었지.
후회한다고 하더군.'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그렇게 그 녀석을 몰아붙였어.'
'지금이나 옛날이나, 신의 도덕과 인간의 격률은 다르기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나는 내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 내 힘을 강요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도덕만을 강요한 끝에...
나는 사랑해마지않던 나의 사도를 그런 죽음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다르게 대해보자고 생각하는 중이란다.
이전이라면, 저 마레라는 녀석은 살아있지 못했겠지.
저 자의 영혼은 죄의식에 짓눌려 있을 뿐 맑고 청명하더구나.
하지만 나는, 이전이었더라면 네가 거부하더라도, 억지로 네 손을 잡고 칼을 심장에 꽂게 하였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이런저런 배움도 듣지 못했을 것 아닌가.
저 자는, 아마 네 좋은 스승이 되어줄 텐데 말이다.'
'이번에는 네가, 네 선의와 자비 그리고 네가 택한 정의의 방식의 결과로 조금 울고, 힘들고, 헤매더라도, 나는 그저 묵묵히 지켜보려고 한다.'
'그 흔들림과 아픔까지 포함해서 성립하는 생물이 인간이라는 걸,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서 배웠으니 말이야.'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는 아이.
그러나, 잠시 후 다시 물어본다.
"근데 림, 선주는 어떤 사람이었어?"
'비밀이다.'
림은 기묘하게 웃었다.
웃는 듯도, 우는 듯도 보이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애달파서, 아이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라즈베리 파이는 공양하거라.'
"응?"
"왜!"
'약속했잖나.'
"어, 어...내가 언제!"
*